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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로 배우는 경제 특강 (전체보기)
[Insight]
[4호] 2010년 09월 01일 (수) 기욤 뒤발 economyinsight@hani.co.kr

이곳은 무더위를 잊는 시간 여행으로 가는 출발역이다. 옛날이야기 몇 토막만 살짝 들춰봐도 부채 바람이 선선하다. 현재진행형 우화도 적지 않아서다. 불평등은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을까? 오늘날 한국 사회에 만연한 소득과 재산의 극심한 격차를 정당화하려는 이들을 고민에 빠뜨리는 질문이기도 하다.자연환경을 경시한 활동이 인간의 생존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는가? 인간이 진정으로 환경을 보살폈다는 ‘그리운 옛날’을 찬양해봤자 4대강은 여전히 아슬아슬하다. 잊혀졌던 역사의 책갈피 18꼭지를 다시 펼친다.
ⓒ Alternatives Economiq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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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세계화, 호박길>


   
▲ 호박 펜던트(BC 7세기)
세계무역기구(WTO)가 창설되기 훨씬 전부터 인류는 이미 국경을 넘어 교역했다. 그 증거가 있다면? 바로 발트 해변의 침엽수 송진이 굳어 만들어진 호박 장신구가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인 투탕카멘(?~BC 1327) 묘에서 발견됐다는 점이다. 기원전 2000년께 청동기시대부터 호박은 주술적 효력이 있다고 해서 지중해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후세에 로마의 작가 대(大)플리니우스(AD 23~79)가 명명했듯, 지중해와 발트해 사이에 ‘호박길’이 나게 된 것이다. 반대로 그리스와 로마의 물건들 또한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다수 발견됐는데 이는 호박을 사고 지급한 현물 결제에 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날부터 멀리까지 교역한 물품이 호박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무기나 날카로운 물건을 만드는 데 알맞으며 규산이 풍부한 흑요석은 지중해의 화산섬들에서 나는데, 이것이 유럽에서 아주 먼 곳에서도 발견됐다. 아프가니스탄의 청금석도 지중해 연안 전체에서 흔히 발견됐다. 영국의 섬들에서 많이 나는 주석은 선사시대부터 갈리아 지역을 거쳐 지중해 지역으로 수입됐고 구리와 혼합해 훨씬 내구성이 좋은 청동을 생산하는 데 쓰였다. 우리가 잘 아는 ‘비단길’은 기원전 2세기부터 활발히 이용돼 중국과 유럽을 이어줬다.

파라오 무덤 속에서 나온 장신구

물론 고대의 원거리 교역은 범위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소수 특권층을 위한 고가품이 주요 품목이었다. 오늘날 다국적기업과 같은 조직이 생겨났던 것도 아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원거리 교역은 가까운 곳에서 반복되다가 그 범위가 넓어지면서 시작됐다. 그리스와 로마의 탐험가들이 발트해까지 온 적은 있지만 상인들이 스칸디나비아반도를 직접 오가기 위해 호박길을 다니지는 않았다.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호박을 게르만인에게 먼저 팔았고 게르만인들이 다시 주변 민족에게 파는 식으로 근거리 교역이 수없이 반복돼 결국 호박이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 속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 붉은색 점선 및 실선: 비단길(Routes de la soie) 파란색 실선: 호박길(Routes de l’ambre)
※참고 사이트 www.arbre-celtique.com/encyclopedie/periplede-pytheas-5-la-route-de-l-ambre-descriptionde-la-terre-2731.htm에 고대 호박길에 대한 설명이 있다. www.bernsteinstrasse.net에 전문이 게재돼 있다.
 


<국가가 경제 주관한 ‘함무라비법전’>

   
▲ 함무라비법전 석판
옛날 옛적부터 국가와 법의 발전은 경제활동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법전인 함무라비법전을 보면 이같은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함무라비왕(BC 1728~1686)의 지시로 석판에 새겨진 이 법전에는 모두 282개 조항이 수록됐는데, 농경·남성중심·노예제도 사회에 필요한 거의 모든 민법과 상법이 망라돼 있다.

먼저, 사유재산 보호에 관한 내용을 보자. “누군가 물건을 분실했는데 그 물건을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고, 이 소유자는 자신이 상인에게서 물건을 구입했고 값을 지급하는 것을 본 증인이 있다고 한다. 한편, 물건의 본래 주인은 물건이 자신의 것임을 증명해줄 사람들을 데려오겠다고 한다. 이 경우 물건을 소유한 자는 자신에게 물건을 판 상인과 이를 본 증인들을 데려오고, 본래 주인은 물건이 자신의 소유임을 증명해줄 사람들을 데려온다. 이때 재판관은 각 증인의 진술을 듣고 판단하는데, 증언이 사실과 다를 경우 상인은 도둑으로 간주돼 사형에 처해진다. 그리고 물건을 분실한 본래 주인은 물건을 되돌려받고, 그것을 샀던 사람은 상인의 재산에서 그 물건값을 변상받게 된다.”(9조) 이 시대는 도둑을 엄격하게 처벌했다.     

남편 빚 못 갚으면 부인 데려갈 수도

당시 채무 관련 문제는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됐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재산뿐 아니라 채무자 자신과 그 가족까지 소유하고, 그들은 채권자의 노예가 됐다. 이에 따라 노예제도를 체계화할 몇 가지 규율이 생겨나게 된다. “곡식이나 은을 빌려준 채권자가 채무자를 감옥에 가뒀는데 그가 감옥에서 자연사했을 경우, 사건은 종결된다.”(115조) 하지만 “채무자가 감옥에서 구타나 학대를 당해 사망했을 경우, 채무자의 주인은 채권자를 고소한다. 이때 채무자가 자유인일 경우에는 채권자의 아들이 사형에 처해지고, 채무자가 노예일 경우에는 금 3분의 1 미나1)를 지급받는다. 그리고 채권자는 채무자의 주인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된다.”(제116조) “누군가 빚을 갚지 못해 대신 자신과 부인, 아들 또는 딸을 팔거나, 강제노동을 시킬 수 있도록 채권자에게 넘겼을 경우, 이들을 산 사람이나 채권자의 집에서 3년 동안 일을 해야 하고, 3년이 지난 뒤에는 자유인이 된다.”(117조) 151조에는 “남편이 결혼 전에 빚이 있었더라도 ‘채권자는 채무자의 부인을 구속할 수 없다’는 내용의 계약을 부부가 체결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했을 경우엔 채권자는 그의 부인을 담보물로 소유할 수 없다. 그러나 여자가 결혼 전에 빚이 있었다면, 어떠한 경우라도 채권자는 그 남편을 구속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당시 남성 중심 사회에서 볼 수 있던 남녀 간의 여러 불평등한 조항 중 하나다.

노예 의료비, 주인이 분담토록

이 시대에도 국가는 많은 부분에 개입하고 있었는데, 특히 의료비를 국가가 결정했다. 단, 그 비용은 환자의 법적 지위에 따라 달라진다. “의사가 부러진 사지나 아픈 부위를 치료할 경우, 환자는 5세겔2)을 지급해야 한다.”(221조) “환자가 자유인일 경우, 3세겔만 지급하면 된다.”(222조) “환자가 노예일 경우, 그 주인이 2세겔을 지급해야 한다.”(223조)

당시 노예제도는 경제 시스템의 핵심이었고, 그만큼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국가의 주요 관심사였다. 226조에도 노예제도와 관련된 내용이 나와 있다. “이발사가 주인에게 알리지 않고 주인 소유의 노예에게서 노예 표식을 떼어냈을 경우 그 이발사는 양손이 잘리게 된다.” 

※ 1) 당시의 무게 단위. 2) 통화 단위.


<위기를 기다리던 파라오와 요셉>

   
▲ 테베(Thebes)의 나크트 무덤 벽화에 그려진 농사짓는 모습.
오늘날의 경제위기들은 주로 과잉생산에 따른 위기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져 실업과 파산의 소용돌이가 시작됐다. 하지만 고대의 위기들은 결핍의 위기였다. 특히 식량이 부족했다. 하지만 과거의 경제위기는 사회질서를 뒤바꾸고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성경에도 나와 있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보자. 이집트에 간 요셉의 모험 이야기다.

7년 풍년 뒤 7년 흉년

“어느 날 파라오는 꿈을 꿨다. 살지고 예쁜 암소 일곱 마리가 강에서 올라와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뒤를 이어 야위고 못생긴 암소 일곱 마리가 강에서 올라왔다. 그런데 못생긴 암소들이 예쁜 암소들을 잡아먹어버리는 게 아닌가? 파라오는 잠에서 깨어났다.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두툼하고 보기 좋은 이삭 일곱 알이 한 줄기에 돋아났다. 연이어 뜨거운 바람에 말라버린 빈약한 이삭 일곱 알이 돋았다. 그런데 빈약한 이삭들이 두툼하고 잘 여문 이삭 일곱 알을 모두 삼켜버렸다.” 유대인 요셉은 파라오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였다. 파라오는 요셉이 해몽을 잘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를 불렀다. “요셉이 파라오께 아뢰었다. ‘그 꿈은 바로 이집트 전역에 일곱 해의 대풍년이 들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일곱 해의 흉년이 뒤따를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파라오께서는 사람들을 임명하셔서 전국에 보내 일곱 해의 풍년 동안 얻은 수확물의 5분의 1을 거두셔야 합니다. 그들이 곡물을 모아 마을에 비축해 잘 보관하게 해야 합니다.’” 파라오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요셉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테베(Thebes)의 나크트 무덤 벽화에 그려진 농사짓는 모습.

“일곱 해의 풍년 동안 땅은 많은 것을 가져왔다. 요셉은 모든 수확물을 모았다. 이어 일곱 해의 흉년이 시작됐다. 이집트 전역이 굶주렸고 사람들은 파라오에게 빵을 달라고 울부짖었다. 요셉은 식량 창고를 모두 열어 백성에게 곡식을 팔았다. 곡식을 팔아 이집트와 가나안에 있는 돈을 모두 받았다. 그리고 이 돈을 파라오에게 바쳤다. 돈이 다 떨어진 이집트인들은 요셉에게 와서 외쳤다. ‘우리에게 빵을 주시오!’ 요셉은 ‘가축을 가져오면 빵을 주겠소’라고 답했다. 그들은 가축을 바쳤고 요셉은 빵을 내줬다. 이듬해 백성들은 다시 요셉을 찾아와 말했다. ‘이제는 돈도 바닥났고 가축들도 왕께 바쳤소. 우리와 우리 땅을 팔테니 빵을 주시오.’ 요셉은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샀고 파라오에게 바쳤다. 이집트 전체가 파라오의 소유가 됐다.”

흉년 틈타 온 나라 삼켜버린 술책

이렇게 파라오는 국가를 장악할 수 있었고 사회질서도 완전히 뒤바뀌었다. “요셉은 마을 백성들을 이집트 국경 변두리로 가게 했다. 그는 백성에게 말했다. ‘여기 씨앗이 있으니 가져다 땅에 뿌려라. 그리고 추수 때마다 5분의 1을 파라오께 바쳐야 한다. 나머지 5분의 4는 너희 것이다. 그중 밭에 뿌릴 씨앗을 남기고 너희와 자식들, 집안 식구의 양식으로 삼아라.’ 요셉은 땅에서 얻은 소득의 5분의 1을 파라오에게 바치는 것을 법으로 공포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파라오의 소유가 아닌 것은 제사장들의 땅밖에 없었다.” 꽤 교묘한 방책이었다 할 수 있겠다. 


<노예제 옹호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궤변>

고대 경제는 노예제에 의해 지탱됐고 노예를 통해 부를 창출했다. 사람을 물질적인 재산과 동일시하고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이 제도에 대해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에서는 여러 의견이 대립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노예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모든 수사학 요소를 이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스스로도 납득할 만한 정당성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노예 주인들이 가지는 권력은 천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법만이 인간을 자유인과 노예로 나눌 뿐 자연은 이들 사이에 차이를 전혀 두지 않는다. 또한 노예제는 폭력의 결과이므로 불공정한 것이다.” 노예제 비판론자들의 이런 주장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한편으로 보면 소유물도 가정의 일부이며, 생활필수품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도 행복할 수도 없으므로, 소유하는 것은 가정을 위해 중요한 것이다.”      

   
▲ <일하는 노예>(BC 5세기)
그는 이어 결론을 내렸다. “이런 원칙에 따라 소유는 존재하기 위한 수단이며 부(富)라는 것은 수단의 다양성을 의미하고 노예는 생명이 있는 재산일 뿐이라 말할 수 있다. 게다가 가축과 노예의 유용성은 거의 똑같다. 둘 다 육체적 힘을 통해 우리 생활에 필요한 일들을 돕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는 복종하기 위해, 또 어떤 존재는 지배하기 위해 태어난다. 물론 서로 미묘한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또한 자유인과 노예는 육체도 다르게 타고나는데 그것은 자연이 원하는 바라 볼 수 있다. 자연은 노예에게는 사회에 필요한 노동을 할 수 있게 육체적 원기를 줬고 반대로 자유인에겐 노역에 몸을 굽히지 않는 대신 전쟁과 평화를 지키는 중요한 시민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에 관한 자신의 논거가 가진 취약점을 인정하기도 했다. “이와 다른 경우가 종종 있기도 한다. 자유인 중엔 육체만 자유로운 사람이 있기도 하고 영혼만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중략) 게다가 반대 의견이 어느 정도는 진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도 어렵다.”

반론 거세지자 위법성 인정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이를 강제한 힘의 관계뿐임을 인정했다. “노예제와 노예에 대한 관념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스스로 노예로 전락할 수 있고 법에 의해 노예 신분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법은 전쟁에서 패한 자가 정복자의 소유물이 되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일종의 합의다. 그러나 많은 법률학자들이 이를 위법이라 비난한다. (중략) 왜냐하면 이를 통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강한 자만이 희생자들을 종으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누구의 심기도 건드리지 않을 만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상반된 두 가지 의견 모두 현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노예제를 옹호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왜곡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의 극심한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애쓰는 이들이 겪을 고충을 분명 떠오르게 한다.

※ 참고 문헌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1>,
 remacle.org/bloodwolf/philosophes/Aristote/politique1.htm.


<강한 정치 약한 경제, 로마공화국의 몰락>

정치적 성공이 항상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제·사회적 위기가 촉발될 수도 있다. 로마공화국의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봐도 이것이 흔히 나타나는 경우임을 알 수 있다. 기원전 5세기에서 2세기 사이 계속된 대(大)정복 전쟁을 통해 로마공화국은 지중해 연안 전체로 영토를 확장했으며 카르타고를 완전히 흔들어 기원전 146년에 멸망시켰다. 로마인들이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라 불렀듯, 그 뒤에도 로마공화국은 지중해 세계를 완벽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경제와 사회는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식민지의 값싼 농산물과 광물, 상품, 노예들이 로마로 몰려들자 수공업과 가족 농업에 기초한 로마 경제는 큰 압박을 받게 됐다. 이탈리아의 소지주들은 빚이 불어나 더 이상 시칠리아나 북아프리카에서 수입되는 곡물과 경쟁할 여력이 없었다. 대다수가 토지를 헐값에 팔고 도시로 떠나는 것 말고는 다른 해결책이 없었다. 하지만 도시의 상황도 낫지 않았다. 외국에서 값싼 상품과 노예가 들어와 지역 수공업이 몰락하고 말았다. 중산층은 점차 사라져갔고 해상무역이나 은행거래 등에 거액을 투자한 토지 지주와 소수의 투기자만 이득을 봤다. 국민은 극심한 빈곤에 처하게 됐고, 로마공화국에는 거대한 사회·정치적 위기가 일어났다.      

   
▲ 스파르타쿠스의 죽음(BC 71년)
식민지 물품 밀려오자 경쟁력 상실


호민관이던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BC 133년 토지 개혁으로 중산층을 되살리려는 시도를 한다. 한 가족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를 최대 250ha로 제한해 최하층민에게도 땅을 분배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소수 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원로원이 법안에 반대했다. BC 132년, 티베리우스는 이 법안을 발효시키기 위해 위법으로 호민관의 재선을 노렸지만 300여 지지자와 함께 암살됐다.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 실패

그가 죽자 친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싸움을 이어나갔다. 그는 최저임금보장제를 실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식민지에서 세금으로 걷힌 곡물이 싼 가격에 국민에게 판매됐다. 공화정 말기와 로마제국 시절, 곡물은 로마 시민에게 무상으로 분배됐다. 하지만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토지 개혁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도 적들에게 쫓기다 BC 122년에 자살했다.

폭동으로 얼룩진 공화정 말기의 로마 사회는 위기를 맞았다. 국가는 쇠약해졌고 처음으로 외적의 침입을 받기에 이른다. BC 110~101년, 킴브리족과 튜턴족이 쳐들어와 갈리아와 이베리아 지역을 황폐화시켰고 로마는 이들을 북부 이탈리아에서야 무찌를 수 있었다. BC 91~89년에는 이탈리아반도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사회가 어지러워지면서 BC 73~71년에 일어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같은 노예 폭동도 반복됐다. 카르타고에 맞서 눈부신 승리를 거둔 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이 승리가 가져온 불안정한 결과들로 인해 공화국은 이미 해체 단계에 들어섰던 것이다. 내전으로 끊임없이 위협받던 공화정은 결국 군부독재와 제국에 그 자리를 넘겨주고 만다.


<코란 “채무거래는 반드시 기록하라”>

   
▲ 이슬람 세밀화(1236~37)
대부분의 종교 경전들은 사회의 경제와 금융거래를 조직하는 기능을 갖기도 한다.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도 ‘암소장’이라는 불리는 제2수라1)의 282아야2)에서 대차관계를 맺을 때 따라야 하는 절차를 자세히 명시하고 있다.     

 “오, 믿는 사람들아! 당신들이 서로 일정한 기간까지 대차관계를 맺을 경우에는 이것을 기록해둬라. 서기는 당신들 사이에 틀림이 없도록 공정하게 기록해야 한다. 서기는 기록하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부채자(負債者) 편이 구술해야 한다. 알라를 경외하고 조금이라도 실제보다 적게 말해서는 안 된다. 만약 부채자가 정신박약이거나 병약자, 또는 스스로 구술하지 못하는 자인 경우에는 그 후견인이 공정히 구술해야 한다. 당신들 중에서 남자 증인 두 명을 불러라. 만약 남자 두 명이 나오지 않으면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을 불러라. 여자 한 명이 잘못하면 다른 한 사람이 주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증인들은 호출받을 때 거부해서는 안 된다. 또 당신들은 액수의 다소를 불문하고 그 기한에 대해 기록하는 것을 싫어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알라께서 보실 때 공정하며 증언의 형식으로서도 타당하고 의혹이 생기는 일도 적다.”

대차대조표로 쓰인 점토판

아주 오래전부터 재산과 부채의 변화를 기록하고 경제와 금융거래에서 서로 다른 쪽의 계약 상태를 나타내는 것은 문자의 주된 기능이었다. 문자 체계가 처음 만들어진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점토판 대부분도 이런 용도로 쓰였다. 흔히 얘기하듯, 기록은 우리가 잊어버리거나 불성실하지 않도록 해준다. 계약을 기록하고 지급 기일에 대한 양쪽의 합의를 확인하는 일은 전자상거래가 일반적인 오늘날의 경제에서도 중요하다.

※ 1) 코란의 장. 2) 코란의 구절.


<최초의 다국적기업 ‘시토 수도회’>

세계화 경제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다국적기업이다. 다국적기업의 강점은 세계 곳곳에 똑같은 공장과 기계를 설치해 똑같은 작업 방식을 적용하고 똑같은 수익을 얻어낸다는 것이다. 이런 다국적기업의 개념은 자본주의 기업가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시토(Citeaux)회라는 한 수도회에서 시작됐다.

세계 각지에 똑같은 공장과 작업 방식

1098년 부르고뉴(프랑스 동부 연안) 지방에 설립된 시토 수도회는 12~13세기에 크게 성장해 총 742개 수도원을 독일·벨기에·포르투갈·이탈리아·스위스·영국·스페인 등 기독교 국가들에 세우게 된다. 당시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있기 전으로, 수도사들의 문란한 생활에 반발해 시토 수도회가 생겨난 것이다. 다른 수도원들이 소유 농장에 거주하는 농노에게 세금을 부과한 것과는 달리, 시토 수도회는 소유 토지를 직접 경작했다. 시토 수도사 대부분은 다른 수도원들과 멀리 떨어진 대자연 속에 살면서 경작되지 않던 많은 토지를 개간했다. 또한 기후의 특수성에 맞춰 부르고뉴와 독일에서는 포도주를, 영국에서는 양모를 생산하며 막강한 경제주체로 활동하게 된다.

놀라운 점은, 각지의 시토 수도원들은 지금의 공장처럼 거의 동일한 형태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중세 전문 역사학자 장 짐펠은 “시토 수도원은 어느 지역에 세워진 것이든, 장님도 길을 잃지 않고 찾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내부 구조가 같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시토 수도회의 규율은 헨리 포드가 자신의 생산공장 노동자에게 강요한 노동 규율과 비슷했다”고 강조한다. 암흑기의 중세 전반기와 달리, 중세 후반 들어 기술 진보와 생산성 향상이 이뤄질 수 있던 것은 이렇게 고도로 ‘산업화’한 시토 수도회의 활동 덕분이었다.

※ 참고 문헌 장 짐펠, <중세 시대의 산업혁명>, Seuil, 2002, www.cister.net.


<환경 파괴로 자멸한 ‘이스터 섬’>

   
▲ 이스터 섬에 있는 라 페루즈 백작(1786)
태평양 한가운데에 외로이 떠 있는 이스터 섬. 원주민은 이 섬을 ‘라파 누이’(Rapa Nui)라고 부른다. 지금은 거의 사막에 가까운 황량한 곳이다. 라누 라라쿠 화산이 우뚝 서 있는 이곳에 현재 3천여 명의 주민이 관광 수입으로 겨우 생활하고 있다. 섬의 해안선을 따라 397개의 거대한 모아이 석상이 늘어서 있다. 이스터 섬이 처음부터 황량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의 생물학자이자 지리·역사학자인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자신의 저서 <붕괴>에서 “오랜 옛날 이스터 섬은 나무가 우거지고 농사를 짓던 곳이었다”고 썼다. 고고학 자료를 보면, 이곳에 6천~3만 명의 주민이 살았고 16세기께 급작스러운 쇠락을 맞기 전에는 1만5천 명 넘게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유럽인이 이스터 섬을 발견한 18세기엔 인구가 고작 4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석상 운반 위해  숲 파헤쳐

이스터 섬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부족 간 대립이 발생하고 종교에 대한 열의가 강해진 게 섬의 쇠락을 가져온 원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실제로 섬 주위에 늘어서 있는 400개 모아이 석상 외에도 라노 라라쿠 채석장에는 제작되다가 중단된 400여 개 석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석상 제작이 한창 붐을 이루던 무렵 심각한 정치적 위기와 더불어 기아가 발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상을 건립하기 위해 많은 일꾼을 동원한 상황에서 이들에게 공급할 식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더욱이 14km에 이르는 거리를 통나무 위에 석상을 굴리는 방식으로 운반하려면 엄청난 양의 나무와 껍질로 만든 끈이 필요하므로 당연히 숲이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자연환경이 파괴된 상태에서 농경지마저 바람과 침식 작용으로 황폐해지자 식량 생산이 급격히 감소했다. 식량 공급이 어려워지자 종교에 대한 열의는 그만큼 커져갔다. 섬 주민은 자연을 파괴하면서까지 신에게 뭔가 바침으로써 굶주림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말았다.

극단적이지만 인간에 의해 자연환경이 파괴된 예는 이스터 섬만이 아니다. 아테네와 페리클레스를 낳은 고대 그리스도 주변 환경을 무분별하게 채굴한 게 쇠퇴의 한 요인이었다.


<애플 뺨치는 우월적 지위>

   
▲ 가론 강에 있는 바자클댐의 물레방아들
몇 년 전 마이크로소프트는 컴퓨터 운영체제에 대한 우월적 지위 남용으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요즘에는 애플이 아이폰으로 얻은 우월적 지위를 남용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힘의 우위 남용은 세계적 대기업이 출현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 13세기와 14세기의 프랑스 툴루즈에서 있었던 예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2세기 말 가론 강에는 수많은 물레방아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3개의 큰 댐이 건설됐다. 장 짐펠은 그의 저서1)에서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댐 건설”이었다고 설명한다. 강의 흐름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16개의 물레방아에 물을 공급하는 나르본성의 댐, 도라드댐(물레방아 15개에 공급), 바자클댐(물레방아 12개에 공급)순으로 나온다. 강은 이미 한정됐으므로 댐의 역학적 출력량은 오직 물의 낙하 높이에 달려 있었다. 3개의 댐 소유주들은 낙차를 더 키우기 위해 댐을 증축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하류에 위치한 댐을 더 높이면 그만큼 상류 쪽 댐의 높이가 제한받았다. 그래서 바자클댐만 다른 댐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류 댐 주식회사의 M&A

이 때문에 13세기 중반부터 각 댐의 소유주들은 서로를 고소하기에 이른다. 분쟁을 끝내기 위해 1316년 10월27일, 5명의 전문가가 모였고 공식적인 댐의 높이를 정하게 됐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1356년 도라드댐 쪽은 다시 소송을 제기했다. 바자클댐의 높이가 너무 높아져 도라드댐이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정도가 됐기 때문이다. 1358년 바자클댐 쪽은 유죄를 선고받는다. 바자클댐 쪽은 판결 집행을 따르지 않고 계속 지연 전술을 폈다. 시간을 끈 효과가 있었다. 바자클댐의 소유주들이 이미 13년 전부터 작동을 멈춘 도라드댐 주식의 과반수를 이듬해 매입한 것이다(당시 댐들은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됐다). 1408년 도라드댐의 마지막 주주가 바자클댐 쪽에 주식을 매각했다. 장 짐펠은 “양심의 가책 없이 50년 동안 바자클댐을 운영해온 쪽이 승리를 거뒀다”고 비판했다. 강자는 약자에게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남겨줘야 한다.

※ 1) <중세 시대의 산업혁명>, Seuil, 2002.


<중국도 몰랐던 ‘송나라의 시계 발명’>

   
▲ 중국의 시계 그림(6세기)
기술의 진보는 경제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뛰어난 제품을 발명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기술혁신이 사회와 경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려면 이런 발명품이 널리 전파될 수 있도록 적절한 제도적 환경과 사회관계들이 뒷받침돼야 한다. 시계가 발명됐던 6세기 중국으로 가보자.     

황제의 독점욕으로 기술 전수 안 돼

역사학자 루이스 멈퍼드1)는 “산업혁명을 이끈 것은 증기기관이 아니라 시계다. 아직까지도 이렇게 도처에 존재하는 기계는 없다”라고 못박았다. 유럽에서 기계식 시계가 처음 쓰이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흔히 기술 발전 면에서 암흑기라고 잘못 알고 있는 중세 시대인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시계는 이미 11세기 송나라 소송(蘇頌)에 의해 발명됐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의 중앙집권 체제하에서 시계는 황제를 위해서만 사용됐으며 비밀스럽게 보관됐고 단 한 개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황제만이 모든 분야의 일정을 계획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른 시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금지됐고, 이 때문에 시계 제작 기술은 발전은커녕 제대로 전수조차 되지 않았다. 정치적 격동기가 지나고 명 왕조가 권력을 잡은 1368년, 이제 시계는 더 이상 기능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자연히 망가졌다. 그 뒤 시계를 다시 만들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1600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유럽의 시계를 중국 황실에 소개했을 때, 시계가 원래 중국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국의 다른 발명품들까지 예를 들지 않더라도, 기술혁신만으로 경제가 발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또 서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던 데에는 서유럽 정치의 중앙집권화 정도가 낮았고 유럽이 분열돼 있던 배경이 크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 1)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 <기술과 문명>(Technique et Civilisation), Seuil, 1950. 이 책의 23쪽 내용을 장 짐펠이 그의 책 <중세 시대의 산업혁명> 142쪽에서 인용했다.


<빚더미에 오른 파뉘르주의 요설>

   
▲ 라블제의 팡타그뤼엘 삽화(1532)
경제와 사회 속에 나타나는 근본적인 변화를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은 소설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프랑수아 라블레1)도 16세기 초 <제3의 서>를 통해, 태곳적부터 내려온 민간 지혜로는 죄악시된 대부업의 성행과 재정 부채 증가가 오히려 노사 관계의 평화 조정과 경제성장의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설명한 사람 중 하나다.     

빌려준 게 없으면 구해주지 않는다?

유토피아를 정복하고 난 뒤 팡타그뤼엘(라블레 작품 속 인물. 거칠고 풍자적인 유머가 풍부하다)은 심복인 파뉘르주를 살미공댕의 영주로 임명했다. 쾌활한 낙천가여서 열심히 일하지 않는 파뉘르주는 결국 빚더미에 올랐다. 그러자 팡타그뤼엘이 물었다. “자네는 언제 빚을 청산하려는가?” 파뉘르주는 대답했다. “그리스 책력의 초하룻날에요(로마 책력과 달리 그리스 책력에는 초하룻날이 없으므로 무기한 연기한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제가 빚을 청산하지 않도록 지켜주시기를. 그렇게 되면 제게 한 푼이라도 빌려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찾을 수 없을 테니까요. (중략) 전하께서도 매일 누군가에게 빚을 지세요. 그러면 그는 빚을 받지 못할까봐 두려워 전하께서 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시도록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드릴 겁니다. 어느 자리에서나 전하에 관해 좋게 말하고, 전하께서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빌릴 수 있도록 언제나 새로운 채권자를 물색해드릴 테지요. 다른 사람의 흙으로 자기 구덩이를 메울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열렬한 독백이 이어진다. “빚 없는 세계, 그런 곳에서는 어떤 천체도 규칙적인 운행을 하지 않을 겁니다. 모든 것이 무질서해지겠지요. 목성은 토성에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해 토성을 자신의 영역에서 쫓아내고 (중략) 사람들은 더 이상 서로 구해주지 않을 겁니다. ‘도와줘! 불이야! 물이야! 사람 죽는다!’라고 외쳐봤자 소용이 없겠지요. 아무도 도우러 가지 않을 테니까요. 왜냐고요? 아무것도 빌려준 것이 없으니까, 그리고 빚진 것이 없으니까요. (중략) 사람들은 사람들에 대해 늑대가 돼버릴 테니까요.” 그의 말은 천진난만한 묘사로 끝맺는다. “반대로 각자가 빌려주거나 빚을 지고, 모두가 채무자가 되거나 채권자가 되는 또 다른 세상을 상상해보십시오. (중략) 오! 대자연은 자신의 업적과 산물에 얼마나 만족할 것인가! 케레스(고대 로마 곡물의 여신)는 밀을 맡고, 바쿠스는 포도주를 맡고, 플로라(꽃과 풍요, 봄의 여신)는 꽃을 맡고, 포모나(과일의 여신)는 과일을 맡고.”

하지만 팡타그뤼엘은 파뉘르주의 말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빚을 지는 것과 거짓말하는 것은 보통 서로 연결되게 마련이지. 그렇다고 해서 절대로 빚을 지거나 빌려주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네. (중략) 그러나 일을 해서 돈을 벌기보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지 빌리려 하는 것은 큰 수치라네.” 도덕적인 교훈은 어쩌면 잠정적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1) 몽테뉴와 함께 프랑스 르네상스 문학의 대표적 작가.


<청교도 금욕이 탐욕으로>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19세기 말 미국에서 자본주의의 약진은 17~18세기 영국 청교도들이 종교 박해를 피해 뉴잉글랜드라고 불린 곳으로 망명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는 당시 매우 영향력이 컸던 청교도 목사인 리처드 박스터(1615~91)의 주장에 관심을 가졌다. 막스 베버의 논증을 따라가보자.     

   
▲ 영국 국교회를 비방한 죄로 재판을 받는 리처드 박스터.
명상보다 노동을 중요시한 속내


우선, 청교도를 오해하면 안 된다. 청교도들은 부 자체를 늘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베버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한다. “화폐와 재물에 대한 추구를 죄악시하는 사례는 청교도의 저술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재물에 매우 너그러웠던 중세 말의 윤리적 문헌과 대비된다.” 그는 청교도들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실제 도덕적 비난 대상은 재산을 가지고 휴식하는 것이다. 시간 낭비는 모든 죄 중에서도 최고의 중죄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무한히 귀중한 것이다. 낭비한 시간만큼 신의 영광을 위한 노동을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적 수도사 규율에서 중히 여기는 비활동적인 명상은 신의 뜻을 직업 속에서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것보다 신을 덜 기쁘게 한다. 청교도주의가 ‘부정한 생활’이라고 규정한 모든 유혹을 예방할 수 있는 특수한 해결책은 노동”이라고 했다. 여기에 박스터는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부자도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필요를 채우려 굳이 일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신의 계명이 노동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루터의 청교도적 직업 사상은 신이 점지해준 운명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적인 금욕의 방법에 방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만약 직업을 통해 부자가 된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게 다는 아니다. 청교도는 생활과 소비 방식에서 엄격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과 신앙에서 벗어난 삶의 충동적 향락은 그 자체가 합리적 금욕의 적이었다. 청교도는 신의 영광을 위해 재산이 커질수록 부단한 노동으로 재산을 보존하고 증대시켜야 하는 책임감이 더욱 커진다”고 막스 베버는 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은 (중략) 소비, 특히 사치재 소비를 봉쇄해버렸다. 반면 이 금욕은 재화 획득을 전통적인 윤리라는 장애에서 해방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절약은 부를 낳고 부는 낭비를 낳는다

이제 논증의 결론에 도달했다. “이런 소비 억제가 재화 획득의 자유와 결합하면 결과는 자명하다. 금욕주의적 절약으로 자본을 쉽게 형성할 수 있다. 재화의 낭비를 막으니 생산적인 곳에 사용되는 투자자본이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청교도 자신들은 이게 모순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1703~1791) 목사는 “종교는 필연적으로 근면과 절약을 낳을 수밖에 없는데, 이는 부를 수반하게 되고, 부가 늘면 자만과 세속적 애착도 어떤 형태로든 증가하기 마련이다”고 했다.

오늘날 미국의 부유층에서 나타나는 낭비 수준에 가까운 방탕한 소비 행태와 다른 사람에 대한 끝없는 인색함의 모순은 존 웨슬리 목사의 비관론적 예상이 적중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충분히 확인시켜주고 있다.

※ 참고 문헌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리처드 박스터의 전기는 en.wikipedia.org/wiki/Richard_Baxte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매도’ 선보인 네덜란드 튤립 투기>

최초의 투기 거품이 언제 나타났는지는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급격한 시세 폭락으로 이어지는 집단적 투기 열풍은 태초부터 쭉 있어왔는지 모른다. 오늘날 투기의 시발점이던 한 사건이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다. 1637년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튤립 구근 투기’다.

당시 튤립은 지금의 아이패드와 비슷한 수준으로 볼 수 있는 혁신적인 상품이었다. 터키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튤립은 16세기 말이 돼서야 유럽에 수입됐다. 1593년 네덜란드 라이덴대학 정원에서 튤립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처음 몇 년간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으나 17세기 후반 들어 튤립 열풍이 불었다.

투기자에 대한 구제금융의 원조

당시 네덜란드는 자본주의 발전의 시험장과도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 튤립 광풍이 불면서 사회 전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튤립 구근은 6월과 9월 사이에만 매매할 수 있었으나 네덜란드인들이 선물거래를 기획하면서 집단적 열풍은 더욱 커졌다. 즉, 판매자가 예정된 날짜에 미리 합의한 가격으로 튤립을 제공하기로 약속하면서 한 해 내내 튤립 거래가 이뤄질 수 있었다. 선물거래는 투기 수단으로 빠르게 자리잡았다. 특히 판매자들이 가지고 있지도 않은 튤립 구근을 미리 판매하고, 나중에 그보다 낮은 가격에 튤립 구근을 사들이는 ‘공매도’ 방식의 투기가 성행하게 됐다. 오늘날 투기 거품의 기초가 된 이런 관행은 당시 네덜란드 연방공화국도 1610년부터 여러 차례 금지해왔다.

1634년께 튤립 투기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1636년에는 실질적 의미의 튤립 증권거래소가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에 생겨났다. 스코틀랜드의 찰스 매케이는 1841년 이 사건을 최초로 기록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자신의 책 <대중의 미망과 광기>(Extraordinary Popular Delusions)에서 투기 거품의 절정이었을 당시 구매 가격이 2500플로린인 비세로이(Viceroy) 튤립 구근 하나로 살 수 있는 목록을 작성했다. 밀 2마차분(550ℓ), 호밀 4마차분(1100ℓ), 살진 소 4마리, 살진 돼지 8마리, 살진 양 12마리, 와인 큰통 2개(약 200ℓ), 맥주 4배럴, 버터 2t, 치즈 1천 리브르, 침대 하나, 양복 한 벌, 은제 컵…. 이 긴 목록을 통해 당시 투기 광풍의 수준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몇몇 중개인들이 갑자기 겁을 먹기 시작하고 투자에서 손을 떼게 된다. 1637년 2월, 단 며칠 만에 투기 거품이 꺼지면서 튤립 가격이 거의 제로로 급락했고 과도한 채무를 진 투기자들은 피해자로 전락했다.  튤립 투기 거품의 붕괴도 서브프라임 거품 사태처럼 새로운 사업을 벌이려는 투기자들의 의욕을 꺾지는 못했다. 투기자들이 원금을 몽땅 잃더라도 정부가 발벗고 나서서 그들의 재정난을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 참고 사이트 fr.wikipedia.org/wiki/Tulipomanie에 관련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찰스 매케이의 글은 robotics.caltech.edu/~mason/Delusions/epd_tulip.html을 참조한다.


<곡물 자유거래 전도사 튀르고 총감>

프랑스의 밀 부족은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프랑스혁명 이전의 구시대) 말기에 줄곧 문제가 돼왔다. 흉작에 따른 소요 사태가 일어나자 프랑스 왕들은 밀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도록 정기적으로 행정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 때문에 상인들의 의욕은 저하되고, 농민들은 수확물을 숨기기에 급급했으며, 경작을 그만두는 일까지 생겨나 상황은 오히려 악화됐다.

   
▲ 르쥐외르, <굶주린 사람들에게 음식 배급>(18세기)
1774년 경제학에 심취해 있던 리모지의 지방 감찰관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가 재정 총감(지금의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직접 루이 16세를 알현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규제를 계속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곡물 거래를 자유화하는 것이라고 간언했다. 튀르고가 국사원(프랑스 최고 행정재판소)과 국무회의에서 작성한 의견서에서 루이 16세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이는 가장 논리적으로 구성된 경제자유주의 옹호설 중의 하나다.

 문제는 어디에 있나? “각 캉통(Canton·프랑스의 면(面))에서 수확한 밀의 양은 주민들이 생계를 이어가는 데 필요한 양보다 많을 때도, 모자랄 때도 있다. 수확량이 부족한 지역에선 수확량이 풍부한 곳에서 가져온 곡물로, 수확량이 부족한 해에는 몇 해 전에 보관해놓은 곡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신이 먹고사는 데 필요한 양보다 많은 곡물을 보유한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남는 밀은 쓸모가 없게 된다. 곡물이 부족한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없고 다음해에 필요한 경작 제의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견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런 사실을 자유롭게 알리는 것은 유용할뿐만 아니라 정당하다. 모든 사람이 노동이나 재산을 통해 생계를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의 섭리가 누군가에게 예외가 되면 부당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장자유주의와 판박이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중략)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거래 중개를 당사자에게 맡기거나,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 이에 대해 튀르고는 단호했다. “자유 거래는 수급을 위해 가장 안전하고, 가장 신속하며, 가장 비용이 적게 들고, 가장 불편함이 적은 방법이다.” 

왜? “네고시앙(상인)들은 자산 증식과 거래처 확장 과정에서 얻은 정확한 정보와 비즈니스 기술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행정가도 이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상인들은 자신의 사활이 걸려 있기 때문에 주의 깊게 주판알을 두드린다. 이들의 치열한 경쟁은 독점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처럼 거래가 더 자유로워지고 확장될수록 사람들은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더 풍부한 밀을 확보하게 된다.”

튀르고는 또 이렇게 말한다. “정부의 관리로 이뤄진 공급은 이같은 성공을 거둘 수 없다. 정부의 관심은 너무 많은 대상에 분산돼 있어, 자신들의 거래에만 관심 있는 네고시앙들을 따라갈 수 없다. 정부는 필요한 양과 잉여분에 대해 뒤늦게, 그것도 부정확하게 알 수밖에 없다. 정부가 고용한 중개인은 국가 경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는 더 비싸게 사들이고 운송비도 더 많이 지출하며 보관에도 신경을 덜 쓴다. 이 과정에서 많은 곡물이 손실된다. 중개인들이 숙련되지 못하거나 열성이 없어 작업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나는 것이다. 심지어 정부 모르게 범죄 행각을 벌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중개인에 대한 혐의는 그들을 고용한 행정부 전체로 향하게 된다. 정부가 아무리 민중을 구하기 위해 조치를 취했다고 해도 이는 민중을 기만한 것이 된다.”

이런 모든 이유로 왕은 곡물의 자유 거래를 막는 과점, 정보 비대칭, 과도한 거래비용 같은 장애물을 철폐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거래의 자유가 가져오는 단점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자유거래 옹호자들이 펼치는 주장은 튀르고의 주장과 여전히 동일하다.

※ 참고 사이트 1774년 9월13일 포고령, www.taieb.net/auteurs/Turgot/arrets/a13091774.html.


<애덤 스미스가 예찬한 핀 공장의 분업 효과>

   
▲ 리옹의 자카르 직기 작업장(1801)
분업은 자본주의 경제의 성공을 이끈 주요 동력 중 하나다. 18세기 스코틀랜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썼듯, 분업의 중요성을 설파한 선각자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사회의 일반 업무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분업의 효과는 특수한 제조업에서 분업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고찰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핀 제조 공정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한 사람은 철사를 펴고, 다른 사람은 똑바르게 하고, 세 번째 사람은 자르고, 네 번째 사람은 뾰족하게 하고, 다섯 번째 사람은 머리를 붙이기 위해 끝을 간다. 머리를 만드는 데도 두세 가지 별개의 작업이 필요하다. 머리를 붙이는 것, 핀을 희게 가는 것, 그것을 종이에 포장하는 것은 각각 독립된 작업이다.”

“기계가 모자랐지만 온힘을 기울이면 하루에 약 12파운드의 핀을 제조할 수 있었다. (중략) 저마다 4만8천 개 핀의 10분의 1, 즉 4800개를 하루에 제조했다고 볼 수 있다.”     

콜센터·패스트푸드점까지 침입

이 수량은 장인 혼자서 제조할 수 없다. “만약 모두 개별적으로 작업하고, 그들 중 누구도 이 특별한 업무에 대해 교육받지 않았다고 하면 하루에 20개는커녕 단 1개의 핀도 제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분업은 노동의 생산성 향상을 가져온다. (중략)  미개한 사회에서 한 사람이 하는 작업을 문명사회에서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한다.”

애덤 스미스가 강조한 분업은 오늘날에도 계속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노동의 분업화로 작업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반복 행동으로 인한 직업병을 얻어 생산성은 한계에 부딪친다. 또 노동 의욕과 주의력을 떨어뜨려 품질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1980년대 일본식 제조 방식은 다기능직을 만들어 품질을 개선시키고, 임금 노동자를 단결시켜 이러한 부작용을 줄이려 했다. 하지만 이런 조치도 점차 산업화돼가는 농식품 분야, 계산원을 둔 대형 유통매장, 콜센터 같은 서비스 분야,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푸드점에 이르기까지 노동 분업화가 파고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 참고 문헌 애덤 스미스, <국부론>, visualiseur.bnf.fr/Visualiseur?Destination=Gallica&O=NUMM-5689a.


<프랑스혁명의 방아쇠 당긴 공공부채>

국가 부채 위기가 유럽 공동체 건설을 위협하는 지금, 대규모 재정위기가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됐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초기 의회들이 공공 부채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것이 이후 혁명을 촉발한 계기가 됐다.

사실 프랑스는 앙시앵 레짐 말기 내내 국가 부도 위기 상태였다. 특히 루이 14세 통치 이후부터 국가 부도 위기는 계속됐다. 베르사유궁전 건축과 태양왕의 호사로운 생활로 어마어마한 비용이 발생했고 대외적으로는 수많은 전쟁을 치른 탓이었다.

   
▲ 르쥐외르, <아시냐 화폐와 돈의 교환>
‘부유층 과세’ 의회 반대로 좌절


1715년 루이 14세 사후 재무장관들이 여러 정책을 시도하고 장관들도 숱하게 교체됐지만 재정 결핍 상황을 되돌려놓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는 한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바로 왕정은 이론적으로 절대적인 것임에도 재정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려면 오늘날의 국회 같은 의회의 동의와 주요 도시에 소재한 귀족의회의 동의가 있어야 했다. 민중의 세금 부담은 이미 너무 커서 재정 균형을 이루려면 반드시 부유층과 당시 면세 혜택을 받던 귀족과 성직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특권층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던 의회는 개혁에 계속 반대했다. 이런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왕은 삼부회를 소집했다.

1789년 5월5일 삼부회가 열리자 루이 16세는 상황의 엄중함을 숨기지 않았다. 루이 16세는 의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 부채는 이미 내가 즉위하기 전부터 엄청났고 즉위 이후에도 계속 증가했다. 그 원인은 바로 비용이 많이 드는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세금 증가가 이어졌고, 이로 인해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더욱 민감한 문제가 됐다. (중략) 짐은 지출 품목에서 상당한 비용을 삭감하도록 명령했다. 이 점에 대해 짐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안하기 바란다. 그러나 긴축재정으로도 백성을 하루속히 안심시킬 수 없을까봐 염려스럽다. 짐은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현재 재정 상태를 정확히 밝히려고 한다. 여러분이 그것을 검토한 뒤 질서를 지속적으로 확립하고 공공 재정을 확고히 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대책을 제안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런 시나리오는 실현되지 않았고, 이런 조치는 곧 왕의 손에서 멀어져갔다.       
 
인플레 세금 부른 ‘아시냐’ 지폐

어떻게 하면 재정지출이 계속 이어지도록 할 수 있을까? 바로 화폐를 찍어내는 조폐판을 통해 가능하다. 1789년 10월10일 이후부터 국유화된 성직자의 재산을 담보로 ‘아시냐’라고 불리는 화폐 발행이 가능해졌다. 당시는 프랑스에 처음 지폐를 도입한 경제학자 존 로(John Law)가 파산하면서 온 나라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런 혁신적인 지폐 발행은 즉시 사람들 사이에 회의감을 불러일으키며 열띤 논쟁에 불을 지폈다. 튀르고의 친구인 뒤퐁 드 느무르 의원은 1790년 이런 정책은 인플레이션을 불러올 것이라고 비판하는 간행물을 발간했다. “우리는 이미 왕정에 돈이 있는데도 그만큼 아시냐 지폐를 만들었다. 이는 마치 돈의 양을 두 배로 불리는 것과 같다. 만약 돈의 양이 두 배가 되면 물건을 두 배로 비싸게 주고 사야 한다. (중략)  빵 같은 생필품이 두 배로 오르면 결국 시민들이 그 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삼부회가 열릴 당시 재무장관이던 자크 네케르는 몇 년 뒤 이러한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정부는 납세자를 독촉하고 그들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권력도 어려운 시련을 겪지 않을 것이다. 가상의 화폐가 만들어진 배경이다. 이 화폐는 입법자들에게 더 큰 확신을 주고 자신들만의 생각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런 무책임한 정책은 끔찍할 정도로 높은 인플레이션을 낳았다. 밀 공급난과 함께 인플레이션은 혁명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후 프랑스에는 공포정치가 이어졌다.

※ 참고 문헌 플로랭, 아프탈리옹, <프랑스 혁명의 경제>, 레 벨 레트르(Les Belles Lettres)의 역사 컬렉션, 2007.
 


<혁명가들 “길드제를 없애라”>

프랑스는 가장 힘겹게 노조 활동이 정착한 선진국 중 하나이며, 노사 협상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 나라다. 이런 현상의 기원은 역설적이게도 프랑스혁명에서 찾을 수 있다.      

프랑스 노조가 허약해진 이유

혁명가들의 주된 목표 중 하나는 길드제 폐지였다. 길드는 동업자 조직을 통제하고, 여러 직업군을 대표해 정부에 대항했다. 경제자유주의 사상에 젖어 있던 혁명가들은 바로 여기에 왕정의 혁신과 역동성을 저해하는 요소가 있다고 봤다. 그래서 1791년 3월2일 채택된 ‘알라르드 법’(Loi d’Allarde)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동종의 기술 또는 직업을 가진 시민·기업가·상인이 회합해 의장·서기·이사를 임명할 수 없고, 명부도 작성할 수 없으며, 결의안을 통과시키거나 자신들의 공통적 이해에 관한 규정을 만들 수 없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맞는 직종·기술·직업을 가질 수 있다.”

   
▲ 파리 노동자 봉기(1789)
그러나 온건파 혁명가들에게 이 정도는 충분치 않았다. 그들은 노조가 파리에서 점점 세력을 키워가는 것을 염려했다. 1791년 6월14일 변호사이자 브르타뉴 주 제3신분 대의원이던 이삭 르네 기 르 샤플리에는 새로운 법안을 제안하기 위해 연단 위에 섰다. “수많은 사람이 길드제 폐지 이후 동업 조합을 다시 구성하려고 애썼다. (중략) 이런 조합의 목적은 (중략) 임금 인상이 이뤄지도록 사용자를 강요하고, 동종 직업에 종사하는 시민들끼리 협약을 맺는 것을 막고, 노동자가 의무를 이행했다는 고용주의 증명을 조합이 정한대로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용주가 의무이행 증명을 해주지 않은 노동자는 새 고용주 밑에서 일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를 관철하려고 폭력까지 사용했다. 노동자들이 지금의 보수에 만족하는데도 일터를 떠날 것을 강요했다.”

르 샤플리에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이 나라에 더 이상 길드는 없다. 이제는 개인의 이익과 공동 이익 외에 다른 것은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조합 정신이라는 미명하에 공공의 것을 나누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소요 사태를 엄중히 처벌하는 내용을 담은 그의 법안은 의회에서 채택됐다.

이러한 직업적 결사 금지는 약 1세기 뒤인 1884년이 돼서야 철폐됐다. 하지만 그동안 개인과 협약을 맺어온 프랑스 사용자들은 이후에도 노조를 협상 대상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 국가는 조합주의 전통이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이어져왔다. 이들 나라에 강력한 노조가 존재하는 이유다.

※ 참고 문헌 기 쇼시낭-노가레, <미라보에서 로베스피에르까지의 혁명기 대연설>(Les grands discours parlementaires de la Revolution, de Mirabeau a Robespierre), Armand Colin, 2006.


<EU의 반면교사 ‘해밀턴 vs 제퍼슨’>

   
▲ 1804년 7월11일 알렉산더 해밀턴과 애런 버의 결투.
유럽 공동체 건설이 얼마나 어려운지 지켜본 사람들은 종종 부러운 눈길로 미국을 쳐다본다. 그러나 내부 갈등에 관한 한 초기 미국의 상황이 초기 유럽연합 상황보다 더 심각했다. 독립전쟁 당시 총사령관이던 조지 워싱턴은 1789년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 최초의 연립정부에는 장관이 3명뿐이었다. 버지니아의 원예가이자 나중에 대통령에 오른 토머스 제퍼슨은 국무장관이었다. 헨리 녹스는 전쟁장관이었고, 34살의 뉴욕 출신 젊은 은행가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재무장관이었다.

제퍼슨이 5명의 협력자와 일하는 것에 만족한 데 반해, 해밀턴은 휘하에 39명을 뒀다.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의 산업 및 재정 분야 엘리트 출신인 해밀턴과 남서부를 대표하는 벽지 출신 버지니아주 원예가인 제퍼슨 사이에 갈등이 터져나왔다. 노예 문제가 이미 양쪽을 갈라놓았고, 특히 중앙정부에 부여하는 경제권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이 커졌다.

해밀턴은 독립전쟁 중에 진 각 주의 부채를 중앙정부가 장기국채로 바꿔주기를 원했다. 당시 부유한 국제 투자가의 수중에 있던 채무증서에 대한 협상을 손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중앙정부 정책 놓고 사사건건 대립

제퍼슨은 이를 싫어했으나 결국 양보했다. 부채의 ‘장기 공채화’ 법안에 찬성표를 던지는 대가로 제퍼슨은 버지니아주와 가깝고 뉴잉글랜드에서 먼 워싱턴에 수도를 건설한다는 합의를 얻어냈다. 제퍼슨은 훗날 부채의 장기 공채화가 그의 정치 경력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고 말했다.

해밀턴은 또 당시 주요 세원이던 관세를 올리고 주류세를 신설해 연방정부의 세입을 늘리기 원했다. 정작 이런 유형의 세금 때문에 독립전쟁이 일어난 터여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법안이 대중의 지지를 얻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해밀턴은 신생국의 산업을 부양하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제퍼슨은 이에 반대했다. 해밀턴이 원하는 ‘큰 정부’를 우려한 탓도 있다. 하지만 농민들이 영국이나 프랑스의 공산품을 손쉽게 살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걱정이 더 컸다. 농민들이 북동부의 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은 바로 ‘자유 거래’였기 때문이다.

해밀턴이 1791년 미합중국은행(Bank of the United States) 설립을 원하면서 갈등은 더 심화했다. 사기업 형태이긴 하지만 이 은행은 국채를 발행하고 공공 재정을 부양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은행 설립은 1819년 제퍼슨이 회고한 대로 “시민과 그들의 재산을 은행가들과 사기꾼들의 수중에 집어넣어 피해자로 전락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해밀턴은 끝내 자신의 주장을 관철했고 제퍼슨은 다시 백기를 들며 1793년 물러났다. 그러나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였다. 제퍼슨은 1796년과 1800년에 대통령이 됐다. 1804년 해밀턴이 자신의 부통령인 애런 버와의 결투에서 사망하자 제퍼슨은 해밀턴이 이룬 과업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달러화가 미국의 공식 화폐가 되고 전 국토에 유통되는 단 하나의 화폐가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1863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1913년이 돼서야 진정한 의미의 중앙은행을 갖추게 됐다. 유럽이 효율적인 공동 제도를 갖추게 될 때까지 걸릴 시간은 이보다 더 짧기 바란다.

*참고 문헌 ‘알렉산더 해밀턴의 다중 생활’(Les multiples vies d’Alexander Hamilton), <Alternative Eoomiques> 234호(2005년 5월), 사이트에서 열람할 수 있다. 알렉산더 해밀턴(주 저자), ‘연방주의자 논문’(Les Federalistes Papers), www.constitution.org/fed/federa00.htm.
‘제퍼슨과 해밀턴의 (가상) 논쟁’, www.youtube.com/watch?v=notJuFGXQ9w&N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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