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 > 커버스토리 > 2016년
     
[Cover Story] 공개된 한국인 리스트는 ‘조족지혈’
파나마 페이퍼스 스캔들- ③ 한국 부유층의 역외 탈세 투어
[74호] 2016년 06월 01일 (수) 김용진 economyinsight@hani.co.kr

아모레퍼시픽 창업주 일가 등 유령회사 설립 ‘고객’ 명단에 이름 올려…
해명 요구엔 너도나도 발뺌

<뉴스타파>는 2013년부터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손잡고 모두 4차례 조세회피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400여 명의 한국인이 자산을 조세회피처로 옮긴 사실이 드러났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 대통령의 장남부터 대기업 회장·임원까지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의 실명이 낱낱이 공개됐다. 하지만 이는 전세계 수백 개에 이르는 조세회피처 알선 로펌들 중 두세 곳에서 정보가 유출된 결과일 뿐이다.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한국의 국세청과 국회는 탈루된 이 한 조각의 세금조차 걷어들일 의지가 없다.

김용진 <뉴스타파> 기자

전두환과 노태우는 공통점이 많다. 이들은 내란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돼 나란히 법정에 선 재판 동기이며, 대통령 재임 시절 수천억원의 뇌물을 받아 비자금을 조성했다. 각각 2천억원대의 추징금 확정판결을 받은 이들은 추징금을 찔끔찔끔 낸 것도 비슷하다. 검찰 수사 당시 둘 다 해외에 돈을 숨겨놨을 것이란 설이 파다했다. 최근 ‘파나마 페이퍼스’로 두 사람 사이에 또 하나 예사롭지 않은 공통점이 나왔다. 전 전 대통령의 장남에 이어 노 전 대통령의 장남도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든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먼저 최근 확인된 노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씨 사례부터 살펴보자.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파나마 법률회사 ‘모색 폰세카’에서 유출된 데이터에서 노씨가 2012년 5월18일 영국령 버진아일랜드(BVI)에 ‘원아시아인터내셔널’(One Asia International), ‘GCI아시아’(GCI Asia), ‘루제스인터내셔널’(Luxes International) 등 3개의 유령회사를 설립한 사실을 확인했다. 노씨가 이사이자 주주인 동시에 실소유주로 등재돼 있었다. 1달러짜리 주식 한 주만 발행한 전형적인 유령회사다.

특이한 점은 GCI아시아를 또 다른 유령회사인 루제스인터내셔널의 주주로 해놓는 등 지배구조를 복잡하게 설계해놨다는 것이다. 노씨는 “홍콩에 살며 사업 준비차 1달러짜리 회사를 몇 개 만들어뒀는데, 이혼하고 결국 아무것도 못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뉴스타파> 취재 결과 노씨와 관련된 홍콩 유령회사 7곳이 추가로 드러났다. 7곳 모두 회사 주소가 동일했고, 그중 2곳은 노씨의 BVI 유령회사와 직접 연결돼 있다.

   
▲ <뉴스타파> 김용진 기자(스크린 앞 책상 오른쪽)와 심인보 기자가 2016년 4월 서울 중구 성공회빌딩 <뉴스타파> 사무실에서 ‘조세도피처의 한국인들 2016’ 1차 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뉴스타파>는 2013년 6월 조세회피처 유령회사 설립 대행업체인 PTN에서 유출된 데이터를 분석해 전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씨가 BVI에 ‘블루아도니스’라는 유령회사를 만든 사실을 공개했다. <뉴스타파>는 전재국씨가 블루아도니스를 만든 뒤 이 법인 명의로 아랍은행 싱가포르 지점에 비밀계좌를 개설한 사실도 밝혀냈다. 이 은행은 일반인을 상대로 한 소매금융은 하지 않는 곳으로, 특이하게 한국인 2명이 VIP 고객 관리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이 은행에 한국인 큰손 고객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방증한다. PTN 내부 자료에 따르면 당초 전재국씨는 2004년 9월22일까지 아랍은행 싱가포르 지점 계좌를 만들 계획이었지만, 계좌 개설에 필요한 공증 서류가 BVI에서 싱가포르로 배송되는 과정에서 분실돼 일정이 지연됐다. 당시 PTN 싱가포르 본사 직원과 BVI 지사 사이의 전자우편에는 유령회사 명의의 계좌를 만들지 못한 탓에 “고객인 전재국씨의 은행계좌에 들어 있는 돈이 모두 잠겨 있다. 전씨가 몹시 화나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같은 전자우편 내용을 정리해보면, 당시 전재국씨는 어떤 계좌에 예치해둔 돈을 아랍은행 계좌로 급하게 이체하려 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두 전 대통령의 장남들이 조세회피처에 유령회사를 만든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 소수 특권층과 부유층의 고질적 조세회피 경향성에서 필연적으로 귀결된 행위일까? <뉴스타파>는 2013년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함께 진행한 ‘역외 탈세(Offshore Leaks) 프로젝트’에서 조세회피처 유령회사 설립 대행업체인 PTN과 CTL의 유출 자료를 토대로 전재국씨 등 한국인 180여 명이 연관된 사실을 확인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을 지낸 OCI의 이수영 회장,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 황용득 한화역사 사장, 조민호 전 SK케미칼 부회장, 이수형 삼성 전무 등 재계 주요 인사와 전성용 경동대 총장, 윤석화씨 등 교육문화계 인사 등이 망라됐다.

부유층의 필수 코스 ‘조세회피행?’

이번에는 파나마 로펌인 모색 폰세카에서 유출된 자료가 공개됐다. 모색 폰세카는 ‘역외 비밀 도매상’으로 불릴 정도로 역외 탈세와 검은돈 은닉 서비스로 악명이 높다. 이 분야에서 세계 5위권 로펌으로 알려졌다. 우리에겐 파나마운하로만 알려진 중미의 소국 파나마에 있는 법률회사 서버에서 한국인 고객의 이름이 줄줄이 나올 줄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뉴스타파>는 모색 폰세카 유출 자료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씨 외에 현재 200여 명의 한국인 이름을 발견했다.

이 중에는 아모레퍼시픽그룹 창업주 고 서성환 전 회장의 장남 서영배 태평양개발 회장과 막내딸 서미숙씨가 만든 유령회사도 발견했다. 서미숙씨는 2006년 4월28일, BVI에 바이저인터내셔널(Weise International)이라는 유령회사를 만들어 이사에 이름을 올렸고, 세 아들과 공동주주가 됐다. 서씨의 조세회피처 회사 설립을 대행해준 곳은 싱가포르의 ING아시아프라이빗뱅크(Aisa Private Bank)다. 서씨를 담당한 이 은행 VIP 고객 컨설턴트는 한국인 김아무개씨였다. 김씨는 서씨의 오빠인 서영배 회장의 유령회사 설립도 도왔다.

이 밖에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 등 진로그룹 임직원 다수, 김광호 전 모나리자 회장, 카지노로 유명한 파라다이스의 박병룡 대표, 조태권 광주요 회장, 최병두 전 하이디스 사장 등 재계 인사들이 줄줄이 나왔다. SAP코리아의 형원준 대표 등 정보기술(IT) 업계 유명 인사들의 이름도 나왔다. 특히 유회원 전 론스타코리아 대표와 BBK 사건에 연루됐던 조봉연 전 오리엔스캐피탈 대표도 조세회피처에서 유령회사를 운영한 것으로 드러났다. <뉴스타파>는 2016년 5월4일 인터넷 홈페이지에 한국인 170여 명의 데이터를 공개하고, 신원 확인 작업에 시민들이 참여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013년과 2016년 두 차례에 걸친 조세회피처 관련 데이터 유출로 400여 명의 한국인이 조세회피처로 간 사실이 확인됐다.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이 수백 명에 포함돼 있지 않지만 해외 계좌 하나 정도는 갖고 있을 법한 ‘그 사람들’은 조세회피처 유령회사나 해외 계좌를 보유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할까?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2013년 내부 자료가 유출된 PTN이나 CTL 같은 업체들은 전세계 수백 군데에서 성업 중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고작 두세 곳이 털렸을 뿐인데 한국인 고객 정보가 이 정도로 쏟아져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얼마나 될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사실 PTN, CTL, 모색 폰세카의 내부 자료 유출로 조세회피처행이 드러난 한국인은 지극히 운이 나쁜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운 나쁜 사람이 한 명 있다.

조세회피처 ‘3관왕’과 무기력한 국세청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이 주소인 박아무개씨는 2013년 PTN 유출 문서를 통해 BVI에 유령회사를 설립한 사실이 드러났지만, 당시엔 취재진이 박씨를 특별히 주목할 만한 단서가 없었다. 2015년 <뉴스타파>는 ICIJ와 함께 HSBC 스위스지점에서 유출된 고객 정보를 확보해 스위스 비밀계좌를 가진 한국인들을 분석했다. 10여 명의 한국인 계좌주가 나왔는데 그중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바로 ‘분당구 이매동’의 박씨였다. 놀랍게도 그는 스위스 계좌에 100억원 넘는 돈을 예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이름이 이번 모색 폰세카 유출 자료에도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세 가지 유출 문서에서 드러난 박씨의 행적을 종합해보면, 박씨는 1999년 스위스 HSBC에 비밀계좌를 만들었고, 2006~2007년 최고 예치 금액은 100억원에 달했다. 2005년 1월에는 모색 폰세카 싱가포르 지점을 통해 BVI에 베젤컨설턴시라는 유령회사를 만들었다. 2008년 8월에는 홍콩 UBS를 통해 역시 BVI에 당카홀딩스라는 유령회사를 만들었다.

취재진은 그를 ‘3관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세 가지 유출 문서에 모두 이름을 올릴 확률은 벼락 맞을 확률보다 더 낮지 않을까? 박씨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뉴스타파>는 베트남에서 작은 신발공장을 한다는 그의 서울 강남 사무실을 찾아가봤다. 위치는 강남이지만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에 경리직원 한 명이 작은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박씨가 사는 분당 집도 평범한 아파트였다. 스위스 비밀계좌에 100억원을 숨겨둔 갑부로 볼 만한 구석은 전혀 없었다. 박씨는 “국세청에 말했다”는 답변 외에 일절 말하지 않았다. <뉴스타파>는 국세청에 확인 요청을 했으나, 국세청은 세무조사 여부조차 확인해주는 것을 거부했다.

   
▲ 국세청은 <뉴스타파>의 ‘한국인 조세회피’ 연속 보도 이후에도 역외 탈세 의혹을 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적극적인 세무조사 의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정부세종청사의 국세청 현판. 연합뉴스

삼성 본관 26층 임원실을 주소로 한 스위스 비밀계좌의 소유주인 삼성중공업 김형도 전무도 마찬가지다. 삼성그룹 비서실 출신인 그는 <뉴스타파>에 아버지의 유산으로 스위스 비밀계좌를 물려받았으며 회사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뉴스타파>의 후속 취재 결과 그의 아버지 역시 삼성건설의 리비아 지사장, 제일기획 전무이사를 거친 삼성 임원 출신인 것으로 확인됐다. 그의 스위스 비밀계좌가 삼성과 연관됐을 가능성이 적지 않지만 국세청이 그와 관련된 조사를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국세청의 이런 불투명성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세청은 2013년 <뉴스타파>가 밝힌 조세회피처 관련 한국인 가운데 몇 명을 조사했고, 세금을 얼마나 추징했는지도 전혀 공개하지 않았다. 1년6개월이 지난 2014년 10월에야 182명 가운데 고작 48명을 조사하고 형사고소를 한 것은 3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마저도 감사원의 국세청 감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진 것이다.

이번 파나마 페이퍼스 파문도 마찬가지다. 국세청은 마치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조용하다. 다른 나라 조세 당국이 관련 자료를 입수하려고 국제 공조 등 전력을 기울이고, 동시에 자국 언론에서 거론된 조세회피 의혹 인물들을 즉각 조사하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지금 국세청의 모습은 무기력하고 무능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뉴스타파가 2013년부터 조세회피처 프로젝트를 연속 보도한 뒤 국회는 여러 역외 탈세 방지 법안을 논의했다. 우선 해외 계좌 신고제도의 경우, 10억원 이상일 때 신고 의무가 있는 것을 5억원 이상으로 기준을 낮추는 법안이 추진됐으나 무산됐다. 미국의 신고 기준은 1만달러(약 1200만원), 일본은 부동산을 포함해 5천만엔(약 5억4천만원)이다. 또 해외 신고 대상인 재산의 범위를 현금·주식·채권 등 현금성 자산으로 국한하지 말고 회사 소유 지분, 지적재산권, 부동산까지 확대하자는 법안 역시 정부 반대로 무산됐다. 형법의 공소시효에 해당하는 국세 부과 제척 기한을 연장하자는 법안도 마찬가지다. 야당은 이를 무기한 연장하거나, 조세 당국이 탈세 사실을 알게 된 날로부터 1년으로 연장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정부와 여당은 세금 관련 자료를 보관해야 하는 기업의 부담이 너무 크다며 기존 10년을 15년으로 연장하는 데 그쳤다.

역외 탈세 방지 법안 줄줄이 입법 무산

여러 국가들이 현재 역외 탈세를 막고 조세제도의 투명성을 높이는 방안을 마련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반면 우리 정부·여당과 조세 당국의 소극적인 태도는 역외 탈세와 자금 유출을 방지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뉴스타파>는 2013년부터 ICIJ와 모두 네 차례 조세회피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조세회피처에 유령회사를 만든 사람 수백 명을 접촉했다. 이들의 반응은 보통 네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 해외 사업상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둘째, 만들기는 했지만 실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셋째, 명의를 도용당했거나 단순히 빌려줬다는 것이다. 넷째, 아예 대답 없이 피하는 경우다. 어떤 유형이든 죄의식 없이 재수 없어 걸렸다는 반응이 많았다.

이와 대척점에 있어야 할 국세청의 반응은 복합적이다. 짐짓 역외 조세회피와 관련된 모든 상황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혹은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서도 조세회피처에 유령회사를 설립했다는 것 자체는 불법이 아니라는 미묘한 입장도 내놓는다.

조세회피처 문제는 간단치 않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 교수인 가브리엘 주크만은 저서 <국가의 잃어버린 부: 조세도피처라는 재앙>에서 2013년 현재 전세계 가계 금융자산의 8%, 유럽연합(EU)의 경우 12%가 조세회피처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 역사상 가장 높은 수치다. 주크만 교수는 조세회피처를 통한 조세포탈과의 전면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단순히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전쟁을 통해 서민과 중산층의 세금을 낮추고, 동시에 악화되는 공공재정을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크만은 이를 통해 더 많은 성장과 고용을 이룰 수 있고,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본다. 역외 탈세와 국부 유출과의 전쟁은 한마디로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다.

muckraker@newstapa.org

정기구독자는 과거 기사 전체와 2016년 6월 이후 온라인 기사 전체를,
온라인 회원은 과거 기사 일부와 2016년 6월 이후 온라인 기사 전체를 보실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김용진의 다른기사 보기  
ⓒ Economy Insight(http://www.economyinsight.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 기사의견(0)  
 
   * 3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600byte)
   * 욕설이나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운영원칙]
매체소개 구독신청 구독문의기사문의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무단수집거부찾아오시는 길
한겨레신문(주) | 제호 : 이코노미 인사이트 | 등록번호 : 서울 아 01706 | 등록일자 : 2011년 07월 19일 | 발행인 : 양상우 | 편집인 : 고경태
발행주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효창목길 6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 한겨레 고객센터 1566-9595 | 청소년보호 책임자 : 윤종훈
Copyright 2010 Hankyore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