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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노믹스’로 디플레 극복 시동
[COVER STORY] 꿈틀거리는 일본 경제- ② 통화정책의 변화
[166호] 2024년 02월 01일 (목) 왕리웨이 economyinsight@hani.co.kr

 

왕리웨이 王力為 왕스위 王石玉 <차이신주간> 기자
 

   
▲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해 완화적 통화정책과 유연한 재정정책, 구조개혁을 중심으로 하는 ‘아베노믹스’를 시행했다. 아베 총리가 2015년 9월 도쿄에서 아베노믹스의 ‘세 가지 화살’을 설명하고 있다. REUTERS

일본의 부동산 거품이 붕괴한 뒤 ‘타조정책’(당면한 현실 문제와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은폐하는 정책)과 이로써 탄생한 ‘좀비기업’(한계기업)과 ‘좀비은행’ 현상은 세상에 각인됐다.
“부동산가격 하락의 가장 큰 문제는 은행의 부실이었다. 부실채권 규모가 100조엔(약 907조5천억원)에 달했다.” 도쿠치 다쓰히토 중국 칭화대학교 공공관리학원 산업발전 및 환경거버넌스 센터(CIDEG) 상임이사 겸 연구원은 “부동산기업은 규모가 커도 기업이 무너진 후 리스크를 차단하기가 비교적 간단했는데 은행의 부실채권으로 이어지는 것이 문제였다”면서 “은행에 부실채권이 생기면 자금회전이 원활하지 않고 대출을 꺼리거나 중단해 경제에 위험하다. 일본에서 그런 문제가 생겼다”고 말했다.
1995년이 되자 많은 경제학자와 금융전문가가 일본이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은행의 부실채권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은행은 계속 부실을 숨겼고 은행에 대한 당국의 감독도 부족했다.
1993년 3월 전까지 일본의 은행은 부실대출과 관련된 정확한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았고, 대장성(현 재무성)도 공개를 강제하지 않아서 은행 문제는 줄곧 안개에 싸여 있었다. 훗날 은행이 데이터를 공개했을 때도 대형 은행만 일부 추정한 수치를 공개했고 부실대출로 분류하는 기준도 매우 좁게 설정했다. 도산한 기업의 대출과 상환 기한을 넘긴 지 6개월이 지난 대출만 통계에 포함했는데, 미국은 3개월이 지나면 부실대출로 분류했다. 1998년 3월부터 모든 은행이 3개월 이상 연체된 대출을 기준으로 부실대출 규모를 공개했다.
그때 일본 정부는 대략 5년이 지나면 은행의 막강한 자산과 수익 창출 능력을 이용해 부동산 분야의 손실을 만회하리라 예상했다. 일본 정부의 한 전직 관료는 “당시 정부가 손실 규모를 충분히 계산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부실채권 손실을 30조엔으로 예상했는데 100조엔까지 늘었다”면서 “은행의 수익 창출 능력을 크게 벗어나는 규모였다”고 말했다.
 

   
▲ 1998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은 아시아 금융위기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에서 미셸 캉드쉬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맨 왼쪽) 등을 만났다. 1997년 7월 시작한 아시아 금융위기는 가뜩이나 힘든 일본 경제에 큰 타격을 줬다. REUTERS

은행 부실채권의 확산
부실대출 규모를 파악한 이후에도 이를 처리하는 힘과 속도가 부족했다. 싱위칭 일본 국립정책연구대학원대학 경제학과 교수는 “처음에 주로 부동산기업에 대출을 제공한 주택금융전문회사를 조사했고, 부실채권 규모가 6조엔 정도였지만 그들의 배후에 있는 대형 은행과 지역 은행의 부실채권이 각종 수단을 통해 확산됐다”고 말했다.
1997년 7월 시작한 아시아 금융위기는 가뜩이나 힘든 일본 경제에 큰 타격을 줬다. 그해 11월은 일본의 전후 금융산업 역사상 최악의 시간이었다. 중형 증권사인 산요증권과 20개 대형 은행 중 규모가 가장 작았던 홋카이도타쿠쇼쿠은행이 부실채권 압박으로 잇달아 무너졌다. 도쿠치 다쓰히토는 “그 후 지역 금융에 체계적 위험이 나타났고 홋카이도 지역경제가 마비되고 4대 증권사에 속했던 야마이치증권이 폐업했다”고 말했다.
산요증권이 도산한 뒤 은행 대출 금리가 크게 올랐다. 일본 정부는 금융위기에 대응하려면 공적자금이 필요하다고 결정하고, 1997년 12월 10조엔(약 90조7500억원)을 은행업 구제에 투입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 후 공적자금의 사용처를 논의하는 한편 회계 분야의 개혁을 비준했다.
“정부는 은행이 장부가액으로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과 주식의 가치를 평가하도록 허용했다.” 싱위칭은 “거의 모든 은행이 부동산 자산을 과거 매입 가격으로 기록했다”면서 “실제 가격은 크게 하락해서 분식회계와 다름없었다”고 지적했다.
1998년 2월16일, 일본 국회는 금융기능안정법을 제정해 정부가 공적자금 30조엔을 운용하도록 허용했고, 그중 17조엔을 도산한 은행의 예금주 보호에 사용하고 13조엔을 은행의 자본 재편에 사용하도록 했다. 1998년 3월 정부는 13조엔에서 1조8천억엔을 주요 은행의 자본 재편에 투입했지만 금융시스템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각 금융기관의 상황을 점검하지 않은 상황에서 공적자금을 투입했고, 시장에서는 은행이 숨긴 부실채권이 더 있으리라 추측했다.
2001년 4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취임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총리는 다케나카 헤이조 경제재정상에게 금융감독을 맡겼다. 다케나카는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금융재생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이로써 은행 자산을 더 엄격하게 평가하고, 은행이 자본을 확충하도록 지시했고, 자본 재편을 끝낸 은행에 대한 감독을 강화했다.
다케나카는 은행이 부실채권을 처리하도록 압박했다. 2003년 5월 리소나은행을 사실상 국유화한 것이 대표 사건이었다. 정부는 예금보험법에 따라 리소나은행에 자금을 투입했다.
그때까지 일본에는 국유은행이 없었고 은행은 비국유기관이었다. 정부의 자본을 투입하면 정부가 임원의 연봉을 낮추도록 요구할 수 있다. 또한 은행이 가장 엄격한 기준에 따라 리스크를 통제하고 중소기업의 자금 조달을 지원하도록 요구할 수도 있다. 따라서 당시 은행 임원들은 정부의 자금 투입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다케나카는 회계준칙에도 개입했다. 앞에서 소개한 일본 정부 전직 관료는 “다케나카 헤이조는 기준으로 계산하면 현재 보유한 자금이 매우 부족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다케나카 헤이조는 은행을 정치적으로 압박해 정책을 따르지 않으면 (은행 임원의) 치부를 공개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도쿠치 다쓰히토는 “그는 매우 단호했고 대다수 은행이 정부의 자금을 받았고 금융시장이 빠르게 안정됐다”고 회고했다. 도쿄증권거래소의 은행업 지수도 2003년 4월 저점까지 떨어진 뒤 반등했다.
 

   
▲ 1990년 이후 일본 경제의 거품이 붕괴하자 은행의 부실채권이 가장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도쿄 거리에 주요 은행의 간판이 보인다. REUTERS

완화적 통화정책의 동요
일부 은행은 재자본화를 통해 흑자로 전환했고 곤경에 빠져 파산한 은행도 있었다. 2003년 8월, 일본 금융청은 15개 자본 재편을 진행한 은행과 금융그룹에 시정명령을 내렸는데, 미즈호파이낸셜그룹과 UFJ홀딩스, 미쓰이스미토모파이낸셜그룹 등 5개 대기업도 포함했다. 그들은 업무개선 계획을 제출하고 분기별로 금융청에 개선 상황을 보고해야 했다.
다케나카의 개혁에 힘입어 일본 중앙은행은 90조엔에 달하는 부실자산을 처리했다. 싱위칭은 “이는 일본의 모든 은행이 1985~1989년 제공한 대출의 90%에 해당하는 규모”라고 말했다. 훗날 국제통화기금(IMF)은 일본 정부가 은행 부실을 해결하기 위해 국민이 낸 세금 가운데 약 20조엔 정도 투입했으리라 추산했다.
도모 가쿠치 일본 와세다대학대학원 아시아태평양연구과 교수는 “거품 붕괴 뒤 발생한 부실채권이 큰 문제였고 처리하는 데 10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많은 사람이 더 일찍 처리했으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기업의 파산을 촉구하는 제도가 없었고 부실채권을 감춘 상황에서도 금융기관은 계속 대출을 제공했다. 결국 수많은 좀비기업이 생겨 일본 경제의 잠재성장률을 떨어뜨렸다.”
일본은 부동산 거품을 처리하면서 촉발된 금융위기를 수습하는 데 15년 남짓한 시간이 걸렸다. 이토 다카토시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대장성이 1990년대 중반에 부실채권 문제를 과감하게 해결했더라면 일본은 이렇게 규모가 큰 금융위기를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30년 동안 일본 경제에는 몇 차례 희망이 생겼고 회복의 기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성급하게 거시정책을 긴축으로 바꾸고 국내외 충격을 단절시켜서 지속된 기간이 길지 않았다. 자산가격의 거품이 꺼진 후 일본 중앙은행은 경제성장이 둔화하리라 예상했고 1991년 7월부터 금리를 인하했다. 같은 해 7월과 11월, 12월에 재할인율(중앙은행이 시중은행에 대출할 때 적용하는 금리)을 각각 5.5%와 5%, 4.5%로 낮췄고 1992년과 1993년에도 재할인율을 계속 낮췄다. 1995년 9월이 되자 재할인율이 0.5%까지 떨어졌다.
중신건설의 황원타오 연구팀은 거품경제가 붕괴된 다음에도 일본 정부는 통화정책 완화에 신중해서 5년 가까이 지난 후에야 금리를 0.5%까지 낮췄고 디플레이션이 실물경제에 가져오는 부담을 완전히 차단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대규모 재정부양 정책과 1995년 9월부터 0.5%의 낮은 정책금리를 유지한 덕분에 1996년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3%까지 상승해 거품경제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하지만 1997년 소비세 세율을 인상하고 1995년부터 시행한 소득세 감면을 취소하는 등 재정정책의 충격으로 일본 경제는 1997년 중반부터 다시 침체에 빠졌다. 은행업 위기가 1997년 11월 최고조에 달했고 일본 경제는 1998년 심각한 침체에 빠져 성장률이 1974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1998년에는 소비자물가지수(CPI)도 마이너스로 전환해 디플레이션이 시작됐다.
중신건설이 내놓은 관련 보고서는 CPI의 전년 동기 대비 증가율이 1% 이하이고, 이 상태가 반년 이상 지속되면 디플레이션이 발생한다고 판단했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1992년 11월~1997년 3월 일본은 첫 번째 디플레이션을 겪었다. 53개월 동안 CPI의 동기 대비 상승률이 1% 이하 기간이 40개월에 달했고, 1994년 11월 이후 28개월 연속 CPI 동기 대비 상승률이 1% 이하였다. 같은 기간 경제성장률도 떨어져서 1992~1996년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의 연복합성장률은 0.4%에 불과해 잠재성장률보다 현저하게 낮았다.
두 번째 디플레이션은 1998년 4월에 시작했다.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일본은 1년 동안 낮은 인플레이션을 겪었고 다시 CPI가 마이너스로 전환됐다. 같은 기간 GDP는 2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의 자금 대출과 어음 할인 규모가 1998년부터 빠르게 줄었으며 신용 축소 경향이 첫 번째 디플레이션 기간보다 훨씬 뚜렷했다. “당시 이런 현상에 대한 일본 정부의 평가는 ‘디플레이션 경향이 있다’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파산한 기업의 수와 실업률 등의 지표를 보면 이번 디플레이션의 심각성이 지난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중신건설은 보고서에 이렇게 기술했다.
아시아 금융위기와 일본 은행업 위기의 충격으로 일본 경제는 상황이 나빠졌지만 신임 통화정책위원회 위원 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일부는 적극적인 통화 완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반대 의견도 있었다. 1998년 9월9일, 일본 중앙은행은 정책금리를 0.25%로 낮추기로 했다.
이토 다카토시는 이런 정책이 일본 경제를 침체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는 부족했다고 분석했다. 1998년 하반기에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세를 보였고 일본 중앙은행은 점진적으로 정책금리를 낮추기로 했고, 1999년 2월12일 금리가 0%로 떨어졌다. 2000년 여름에는 경제가 회복되는 것 같았다.

일본 중앙은행의 성급한 판단
제로금리 정책을 1년 반 동안 유지했고, 2000년 8월 일본 중앙은행이 해당 정책을 취소했을 때는 경제성장률이 약간 반등했지만 물가상승률은 여전히 마이너스였다. “이번에도 금리인상 결정을 조급하게 추진했다.” 이토 다카토시는 “2000년 말부터 경제가 다시 침체에 빠지자 중앙은행은 2001년 2월 다시 통화정책을 완화했고, 3월에는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양적완화를 시행해서 자산을 매입하고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했다”고 말했다.
고이즈미 정부가 개혁을 추진한 후 2006년 일본 경제가 강력하게 성장했고, 물가상승률이 1998년 후 처음으로 몇 개월 연속 플러스를 기록했다. 그러나 2006년 8월 정책금리를 0% 이상 인상했다.
“시간이 지나 되돌아봤을 때 통화긴축은 시기상조였다.” 이토 다카토시는 물가상승률이 플러스로 전환했지만 어느 수준까지 상승할지 확실하지 않았고, 가격이 상승한 분야는 대부분 에너지 관련 항목이었다. 에너지와 신선식품을 제외하면 물가상승률은 여전히 마이너스였고, 2008년에야 플러스로 전환됐다. 물가상승률이 0%가 돼야 물가가 안정됐다고 정의하는 일본 중앙은행의 기준을 비판하는 의견도 있었다. 디플레이션을 피하기 위한 완충구간이 필요한 점을 간과한 것이었다.

디플레이션 부추긴 자본 유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일본에 직접적으로 큰 충격을 주지 않았다. 이로써 시라카와 마사아키 당시 일본은행 총재는 미국과 유럽연합(EU) 중앙은행을 따라 양적완화 정책을 시행하길 원하지 않았고, 그 결과 엔화 가치가 과도하게 절상되고 4년 동안 심각한 경기침체를 유발했다.
한 일본 중앙은행 관계자는 경기가 약간 회복되면 바로 긴축으로 전환한 일본 중앙은행의 결정에 “후쿠이 도시히코, 하야미 마사루 두 전임 총재 시절에 잠깐 경제가 회복됐지만 시라카와 마사아키 총재 임기 내에는 경기회복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폴 크루그먼을 비롯한 일부 미국 경제학자는 일본이 더욱 과감해야 하고 중앙은행이 주식이나 토지 등 자산을 매입하는 방법도 있다고 지적했다. 시라카와 총재 임기 때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도입할 준비를 했지만 공개적으로는 “이렇게 해도 큰 효과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경제가 부진한 상황에서 일본 기업은 공장을 국외로 이전했다. 일본의 대외직접투자가 1996년 2조8천억 달러에서 2016년에는 18조달러(약 2경3860조원)로 늘었다. 그와 함께 민간부문도 국외 금융자산을 보유했다. 증권투자의 경우 일본의 가계와 비금융기업(개인)이 국외 증권에 투자한 자산 규모가 1997년 각각 29조8900억엔, 4조9800억엔에서 1999년에는 33조2600억엔, 6조5400억엔으로 늘었다.
중신건설은 보고서에서 자본 유출도 일본이 장기 디플레이션에 빠진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민간부문이 국내에서 투자를 줄이고 국외에서 확장하자 국내 총수요가 더 줄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일본 기업인은 국외투자와 일본의 산업 공동화를 우려했다. 그러나 일본 기업이 1990년대 중반부터 대규모로 생산기지를 국외로 이전하자 우려의 목소리마저 잠잠해졌다. 이토 다카토시는 “본인이 경영하는 기업을 포함한 일본 기업이 살아남으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기간 경제성장 정체와 디플레이션을 겪은 후 2012년 가을에 정권이 교체됐다.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아베 신조 총리는 지긋지긋한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는 것이 경제부흥을 위해 매우 중요하고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려면 적극적인 통화정책이 필수라고 판단했다.
아베 총리는 시라카와 총재에게 물가상승률 2%를 목표로 설정하도록 요구했다. “시라카와 마사아키 총재는 거절했다. 그래서 예정된 임기보다 3주 먼저 사임했다.” 싱위칭은 “아베 총리에게는 물가상승률 목표제를 지지하는 중앙은행 총재가 필요했고, 당시 아시아개발은행(ADB) 행장이었던 구로다 하루히코를 발탁했다”고 말했다. 그 후 완화적 통화정책과 유연한 재정정책, 구조적 개혁을 중심으로 하는 ‘아베노믹스’를 시행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2008년 이후 빠르게 회복했을까?” 싱위칭은 신속하고 과감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실자산을 정리했고 양적완화 정책을 시행했다.
도쿠치 다쓰히토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가 시행한 양적완화는 몇 년 전에 일본 중앙은행이 실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채와 상장지수펀드(ETF) 같은 자산을 매입했는데 일본보다 훨씬 과감했고 강도가 높았고 지속 기간도 길었다”고 말했다. 미 연준은 금리를 0%까지 내렸고 이를 13년 동안 지속했다가 신속하게 5% 넘게 올렸다. 지금은 다시 금리를 인하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것이 통화정책의 유연함이다. 현재 미국 경제가 견고한 것은 미 연준이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도구가 금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부동산 거품 경제가 붕괴한 후 일본은행은 장기간 초저금리의 완화적 통화정책을 시행했고, 이는 금융기관의 수익성을 개선해 부실채권 처리를 위한 자금 확보에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 財新週刊 2023년 제49호
日本經濟30年:教訓與經驗
번역 유인영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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