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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의 본질에서 ‘훔친’ 브랜드 혁신
[국내특집] 레고의 재발견, 상상력에 불을 지피다- ① 부활
[87호] 2017년 07월 01일 (토) 김정필 fermata@hani.co.kr
아날로그 시대를 풍미하다 비디오게임과 인터넷에 밀려 소파 밑으로 사라졌던 레고가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소비자의 상상력에 다시 불을 지핀 레고 열풍에 아이·어른 구분 없이 동참하고 있다. 일부 레고는 원가보다 수십 배 비싼 가격에 중고로 거래되며 ‘레테크’(레고+재테크)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아시아 시장에 관심이 큰 레고그룹은 최근 한국 시장에서 소비자와 소통을 강화하며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2000년대 초·중반 파산 위기를 극복한 레고가 ‘세기의 장난감’으로 거듭나며 얻은 소중한 교훈이 하나 있다. ‘어떤 순간에도 브랜드의 정체성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점이다. _편집자
 
블록과 무관한 신사업 투자로 위기 자초... 브랜드 정체성 회복해 리빌딩 성공
 
레고코리아가 최근 6개월 사이 판교와 서울에 잇따라 레고스토어를 개점하는 등 부쩍 한국 시장에서 마케팅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미래 사업 방향의 주 무대를 아시아로 보는 레고그룹은 200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최악의 영업손실로 폐업 위기에 직면했다가 극적으로 부활의 신화를 썼다. 레고그룹이 세기의 기업으로 되살아난 비결은 브랜드의 본질적 가치를 새삼 깨달은 데 있다. 무한 창조가 가능한 ‘블록 정신’으로 다시 돌아가 혁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레고를 레고답게 만드는 브랜드의 본질이자 소비자가 원하던 바다.
 
김정필 부편집장
 
   
아이들과 부모들이 레고 창작 페스티벌에 참가해 ‘꿈의 도시’를 주제로 레고 블록을 쌓고 있다. 최근 레고코리아는 본사 매뉴얼에 따라 운영되는 레고스토어 2곳을 한국에 열었다. REUTERS
투명한 통에 수백 개의 머리통이 나뒹군다. 바로 옆의 다른 통에는 상반신·하반신 수백 개가 제각각 엉켜 있다. 각양각색의 헤어스타일을 한 가발들은 다른 통에 널브러져 있다. 흡사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 잔혹한 파편들 사이로 갑자기 5살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이 헤집고 들어온다. 머리통 크기에 비하면 아이의 손은 마치 소인국의 걸리버 같다.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기엔 인내심이 다했다는 듯 아이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 차 있다.
 
이윽고 안경 쓴 머리통이 카우보이 패션의 상·하반신과 결합되고, 카우보이 손에는 중세시대 병사들이 사용하는 날카로운 창이 들렸다. 아이는 자기 손가락 크기 정도 되는, 시공을 초월한 융합형 레고 인간 ‘중세시대 카우보이 병사’를 들어 보이며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레고도 하나 만들어줄까?”
 
5살 아이의 상상력을 통해 탄생한 전세계 유일한 이 레고 피겨의 고향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현대백화점(판교점) 5층 레고스토어다. 레고코리아는 2016년 12월9일 국내 처음으로 레고스토어를 선보였다. 레고스토어는 레고그룹의 전세계 통일 가이드라인에 매장 디자인과 배치, 아이템을 일치시켜 소비자에게 균질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레고스토어의 가장 큰 특징은 완제품 구입 외에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레고스토어에는 소비자가 원하는 미니피겨를 조합해 낱개로 구입할 수 있는 ‘나만의 맞춤 미니피겨(Build-A-Minifigure) 존’이 있다. 직사각형 상자 각 면에 달린 4개의 투명한 통에 머리, 상반신, 하반신 등 부위별 피겨 브릭(Brick)이 담겨 있다. 각 피겨 브릭의 디자인은 천차만별이다. 피겨 브릭을 소비자의 취향에 맞게 조립해 만든 레고 피겨 3개는 1만5900원에 판매된다. 또 소비자가 원하는 색상과 모양의 모듈식 브릭을 규격화한 용기에 담아 구입할 수 있는 ‘픽어브릭(Pick-A-Brick)존’도 있다. 100여 가지 다른 모양의 브릭을 규격화된 두 종류(2만9900원, 1만9900원)의 원통형 용기에 원하는 대로 담을 수 있다. 직사각형 기본 브릭 외에 다양한 형태의 브릭을 만날 수 있다.
 
한국 등 아시아 시장 주목
레고그룹의 한국 시장에 대한 공격적 마케팅이 최근 주목을 끌고 있다. 한국에 레고스토어가 들어선 것은 홍콩과 일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에 이어 아시아에선 다섯 번째다. 현대백화점 판교점에 이어, 2017년 4월14일 서울 송파구 잠실 롯데월드몰 지하 1층 매장에 2호점이 공식 오픈했다. 롯데월드몰 잠실점에선 픽어브릭존과 미니피겨존 외에 ‘레고 메시지 브릭 각인’ 서비스도 제공한다. 2×4 브릭 열쇠고리에 고객이 원하는 메시지를 새겨 구입할 수 있다.
 
브랜드 관리 강화를 위해 새로 설립된 레고브랜드그룹 회장 예르겐 비 크누스토르프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향후 사업 방향의 초점을 아시아로 잡았다고 밝혔다. 그는 “레고그룹의 미래 성장 목표는 세계의 더 많은 아동이 레고를 갖고 놀게 하는 것”이라며 “중국 시장에 대한 기대가 크고 한국과 일본, 홍콩, 대만 등의 성장이 확대돼 아시아 시장의 발전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다”고 했다.
 
레고코리아는 레고 어린이 체험단 운영과 브릭 창작 전시 등 정기적으로 다양한 시민체험형 행사를 진행하며 소비자 접촉면을 넓히고 있다. 그동안 한국 소비자의 특성은 완구의 교육적 가치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강했지만, 이런 틀에서 벗어나 소비자가 직접 레고를 만들고 공개 장소에서 전시함으로써 본격 소통의 장을 열겠다는 것이다. 이는 폐쇄된 집이라는 공간에서 나 홀로 창작활동을 펼치는 대다수 소비자를 밖으로 끌어냄으로써 레고를 통한 교류를 확대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레고그룹이 각국에 레고스토어를 운용하는 이유는 더 많은 소비자가 ‘레고의 본질’을 체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차원에서다. 레고코리아 관계자는 “레고의 본질은 설명서 없이도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레고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상상력을 키우는 교육적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는 소비자의 창의력에 불을 지펴 직접 레고 브릭에 생명력을 불어넣도록 하려는 레고그룹의 전략이 담겨 있다. 레고코리아 관계자는 “레고의 핵심 마케팅 방향은, 레고의 창작 경험이 소비자에게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는 기폭제가 되도록 체험 기회를 대폭 늘려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레고스토어를 찾는 고객은 유아동을 동반한 가족 단위부터 성인까지 연령층이 다양하고 재방문 비율도 높다.
 
픽어브릭존과 미니피겨존 서비스는 레고코리아의 마케팅 방향을 적극 구현하는 수단이다. 소비자가 레고 세트를 구입해 설명서 순서대로 조립한 뒤 장식용으로 둘 수도 있지만, 레고의 진정한 가치는 조립을 완성한 제품을 다시 부수고 뒤섞은 뒤 소비자 자신만의 창조물을 다시 만들 때 발휘된다. 이 과정을 통해 상상력과 창의력이 계발된다. 레고코리아 관계자는 “자신만의 창작물을 만들 때 추가로 필요한 부품이 개개인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원하는 모양과 색상의 브릭 및 피겨를 개별 구매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말했다.
 
레고코리아는 2017년 7월10일 ‘디지털 네이티브를 위한 레고 라이프’라는 주제로 공식 행사를 열어 레고의 디지털 혁신 방안을 공개할 예정이다. 이날 공개될 내용은 어린이를 위한 안전한 소셜네트워크 애플리케이션 ‘레고 라이프’와 코딩 기술을 이용한 새 모델 ‘레고 부스트’ 등이다. 레고코리아 관계자는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환경과 기기에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인 어린이들을 위해 레고의 본질에 기반한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레고코리아는 2017년 6월5일 신임 대표로 마이클 에베센을 선임했다. 2010년 러시아 및 중유럽 지역 수석마케팅 디렉터를 역임한 그는 2014년부터 아시아·태평양 지역 사업전략 총괄로 근무했다. 에베센 대표는 “레고코리아는 그동안 아시아에서 의미 있는 성장을 거듭해왔고 앞으로 발전 가능성도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레고브랜드그룹 최고경영자 예르겐 비 크누스토르프가 덴마크 빌룬 본사에서 대형 소방관 레고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그는 2016년 말까지 레고그룹 최고경영자로 있으며 레고의 부활을 진두지휘했다. REUTERS
 
파산 위기와 기사회생
레고 블록은 낱개로 보면 딱딱하기 그지없는 모듈 모양이다. 생기도 활력도 없다. 그런데 이 블록이 2개 이상 모이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대감이 생긴다. 흔히 레고 블록 6개로 9억1500만 개 이상의 조합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과거 레고를 ‘세기의 장난감’으로 선정한 미국 경제지 <포천>(Fortune)은 ‘믿거나 말거나’ 전세계에 흩어진 레고 블록이 2천억 개로 추정된다며 최소 100억 개는 각 가정의 소파 쿠션 밑에, 30억 개는 진공청소기 안에 있을 것이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 정도로 레고는 우리에게 친숙한 장난감이다.
 
레고는 덴마크 도목수였던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안센이 1932년 창업했다. 레고는 덴마크어 ‘leg godt’(잘 놀아요)의 각 단어 첫 두 글자에서 따왔다. 회사 이념은 창업 이후 변함이 없다. 아이들에게 창조의 자긍심을 주고, 상상력과 창의성을 자극하며,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는 아이를 육성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치관은 ‘부모의 교육열’과 ‘아이의 재미’가 시너지효과를 일으켜, 장난감 산업에서 레고를 최고의 위치로 올려놨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부터 탄탄하게 쌓아진 레고 블록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인터넷과 비디오게임 등에 빠지면서 아날로그 기업인 레고는 깊은 수렁에 잠긴다. 레고그룹의 연도별 사업보고서를 살펴보면, 1998년 창업 이후 처음 적자를 낸 뒤 지속적으로 적자에 허덕이다가 2003년 15억6500만크로네(약 2648억원)의 최대 영업손실을 내며 파산 위기에 몰린다. 이듬해인 2004년에도 11억6200만크로네(약 1966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매출액은 2002년 96억1천만크로네(약 1조6262억원)에서 2003년 67억9200만크로네(약 1조1493억원)로 곤두박질쳤다.
 
2004년 당시 전략개발책임자인 예르겐 비 크누스토르프는 회사 재정 상태가 크게 악화되자 그룹 이사회로부터 문제를 진단해 보고하라는 임무를 받는다. 크누스토르프는 글로벌 전략 컨설팅 회사 매킨지앤드컴퍼니 출신으로 2001년 9월 레고에 입사했다. 입사한 지 3년도 안 된 그는 보고서를 준비하며 ‘사실 확인이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라는 매킨지의 교육 내용에 충실하려 했다. 그는 몇 개월 동안 각 부서 조사와 임직원 인터뷰, 주요 고객 유통사 인터뷰를 통해 사실을 수집했다. 그는 “리더는 상황을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는 제너럴일렉트릭(GE)의 전 최고경영자 잭 웰치의 명언을 따라 보고서를 단호하게 작성했다.
 
크누스토르프는 레고그룹이 혁신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수익성이 없는 혁신’의 악순환에 빠져 어려움에 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과거 10년 동안 레고가 시도한 온갖 새사업을 하나하나 점검했다. 소프트웨어(컴퓨터게임과 레고 무비메이커), 학습 콘셉트(레고 에듀케이션), 라이프스타일 제품(레고 아동복), 여아용 장난감(레고 인형), 미디어(책·잡지·텔레비전프로그램), 신규 놀이공원 3곳 등이 목록에 올랐다. 문제는 혁신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쏟아부은 노력과 확장, 실험에도 불구하고 신사업 중 상당수는 적자를 냈다는 사실이다. 레고그룹이 새로운 시장에 뛰어든 속도가 적자를 쌓은 속도와 거의 일치했다.
 
크누스토르프는 보고서에서 “우리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 실험하고 다양화하는 것은 좋지만, 그 이면에는 통합성을 유지하는 경영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겐 혁신 절차를 이끄는 전반적인 지침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레고그룹 CEO이던 창업자의 손자 키엘 키르크 크리스티안센은 크누스토르프를 눈여겨보다 2004년 새로운 CEO로 깜짝 발탁했다. 크리스티안센은 ‘레고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서 해법을 찾았다. 그것은 바로 기본이었다. 그는 레고그룹이 너무 많은 유행에 따르느라 레고 브랜드의 핵심 가치인 조립식 장난감을 소홀히 했다고 판단했다. 그는 블록을 파는 일로 돌아가 아이들의 상상력이 주도권을 쥐는 작업에 매진했다.
 
‘블록’에서 찾은 정체성
우선 주요 협력업체와 관계를 탄탄하게 정비한 크누스토르프는 고객과의 관계 회복에 나섰다. 그는 레고가 지닌 창의성의 핵심인 블록에서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 폐쇄적인 조직문화를 바꿔 고객과 대화 범위를 넓혔고 고객을 개발 과정에도 참여시켰다. 소수의 유력 제품 라인에 집중해 수익성 있는 혁신으로 연결하려 했다.
 
크누스토르프 취임 뒤 레고그룹은 적자에서 흑자로 노선을 갈아탔다. 최근 10여 년간 매년 두 자릿수 매출 성장률을 보인 레고그룹은 2016년 379억3400만크로네(약 6조4229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영업이익은 124억4800만크로네(약 2조1076억원)로, 영업이익률이 무려 32.8%였다. 이는 글로벌 정보통신(IT) 기업과 비슷한 수치다. 2017년 2월1일 발표된 영국 브랜드 평가기관 ‘브랜드 파이낸스’의 ‘2017년 글로벌 500개 브랜드 가치 집계’에서 레고는 가장 영향력 있는 브랜드 1위로 선정됐다.
 
현대백화점(판교점) 레고스토어에서 피겨 브릭으로 새 생명을 불어넣은 5살 아이는 두 손에 레고 피겨 3개가 든 투명 포장 상자를 들고 싱글벙글이다. ‘중세시대 카우보이 병사’ 옆에는, 각각 엄마와 아빠에게 나눠줄 ‘구레나룻을 한 파마머리 테니스 선수’와 ‘도끼를 든 경찰’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 이날 이 아이한테서 외면받은 레고 블록과 피겨 파편들은 언젠가 다른 고객의 상상력으로 옷을 갖춰 입고 전혀 다른 생명으로 탄생할 것이다. 이것이 레고그룹의 존속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임은 두말할 나위 없을 듯하다.
 
레고그룹은 매일 소비자와 호흡하며 ‘생과 사’의 치열한 경쟁 무대에서 고뇌하고 변화하고 있다. 물론 ‘기본을 확실하게 통제해야 진정한 혁신으로 갈 수 있다’는 과거 실패의 교훈처럼 그 중심에는 레고 블록과 아이의 상상력이 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혁신적인 기업은 가장 절제된 기업이기도 하다.
 
* 참고 문헌: <레고: 어떻게 무너진 블록을 다시 쌓았나>, 데이비드 로버트슨·빌 브린 지음, 김태훈 옮김, 해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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