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이후 불황이 지속되면서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곳은 부자 들의 집사 노릇을 했던 프라이빗뱅킹이다. 부자들의 눈높이는 그대로인데 이를 충족해줄 수 없게 되자 고객이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저금리로 부유층의 재테크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부유층 자금의 세금 회피처였던 스위스 은행들마저 비밀주의를 포기했다. 그렇더라도 주식투자는 너무 위험이 크다. 슈퍼리치들의 돈은 어디로 갈까? _편집자

과도한 투자에다 수익률 하락으로 고전…
금융위기 이후 더 까다로워진 고객

부자들을 상대로 한 독일 은행들의 프라이빗뱅킹(PB) 부문 수익률이 크게 하락하고 있다. 고객은 여전히 연 5~6%의 높은 수익률을 원하지만 지금 같은 저금리 시대엔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금융위기 이후 부자들도 자신의 돈이 어디에 투자되고 이에 따른 비용이 얼마인지 깐깐하게 따진다. PB 업계가 부진할 수밖 에 없는 이유다.

나디네 오버후버 Nadine Oberhuber <차이트> 온라인 프리랜서 기자

요즘 프라이빗뱅커나 자산관리사는 개구리에 비유된다. 동 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공주가 키스를 하면 왕자로 변신하는 개 구리가 아니라 끓는 물 속의 개구리다. 끓는 물에 개구리를 바 로 집어넣으면 개구리는 필사적으로 밖으로 뛰쳐나오려 한다. 하지만 개구리를 찬물에 넣고 온도를 천천히 올리면 열기는 개 구리의 근육을 마비시켜서 결국 비참하게 죽고 만다.

기업컨설팅업체 AT커니 애널리스트들은 프라이빗뱅킹의 현 상황을 천천히 끊는 물 속의 개구리에 비유한다. 실제 최근 프 라이빗뱅킹 업계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프라이빗 뱅킹은 향후 몇년간 쇠퇴할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업계는 여전 히 제자리에서 뒷짐만 지고 있다. 서서히 끓는 물 속의 개구리 처럼 위험을 인지할 능력조차 없는 것이다.

고액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라이빗뱅킹의 제반 여건 이 점점 악화되고 있다. 프라이빗뱅킹은 금융 부문에서 오랫동 안 높은 성장률과 수익률을 기록하며 가장 매력적인 분야로 자 리잡았다. 특히 대표적인 프라이빗뱅킹 시장인 독일은 유럽 최 대의 자산관리 시장이다. 세계 유수의 컨설팅 업체 캡제미니 (Capgemini)가 낸 ‘세계 보건 보고서’(World Health Report) 에 따르면, 독일에서 100만달러 이상을 투자할 수 있는 재정적 여력이 있는 부유층은 100만여명에 이른다. 이는 프라이빗뱅킹 업계에 비즈니스 기회가 무궁무진함을 뜻한다. 그래서인지 독 일만큼 프라이빗뱅킹 시장의 경쟁이 치열한 곳도 없다.

2012년 글로벌 컨설팅 업체 매킨지의 유럽 프라이빗뱅킹 업계 보고서를 보면, 금융위기 이후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는 프라이 빗뱅킹 부문은 거의 성장하지 못했다. 반면 최대한 높은 수익률 과 최대한 낮은 위험률을 추구하는 고객들의 성향은 변하지 않 았다. 그리고 은행의 프라이빗뱅킹 업무 처리 비용 또한 줄어들 지 않고 있다. 독일 프라이빗뱅커들이 부유층의 자산관리를 통 해 벌어들이는 수익이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매킨지에 따르면 프라이빗뱅커들의 수익은 2008년 이후 30%나 줄었다. 은행들이 프라이빗뱅킹 부문에서 잇따라 철수 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국제적으로 프라이빗뱅킹 부문에 서 상위권에 속하는 스위스은행(Credit Suisse)은 독일 지사를 처분할 계획이다. 그러나 과연 인수를 원하는 업체가 나타날지 미지수다. 리히텐슈타인의 최대 은행인 LGT은행도 2011년 독 일에서 철수했다.

▲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한 은행의 프라이빗뱅킹센터 내부가 화려하다. 금융위기의 여파로 부유층의 돈을 운용할 곳이 줄어들면서 최근 프라이빗뱅킹 사업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REUTERS

투자금 100만달러 이상 독일 재력가 100만명

은행들은 프라이빗뱅킹 부문의 수익률 문의에 극도로 말을 아 꼈다. 매킨지 조사에서 정기적으로 업계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 는 유럽 최대 은행 ‘슈파르카세’(Sparkasse·독일식 저축은행) 의 예르크 루데비크 함부르크 지점장은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 다. “프라이빗뱅킹 시장은 대대적인 새판짜기에 들어갔다.” 적잖 은 은행들이 사업계획서에 목표로 내세웠던 시장점유율은 이미 오래전에 물 건너갔다. 그리고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 랑하는 상업은행인 ‘방크하우스 메츨러’(Bankhaus Metzler)의 요제프 뫼스트 프라이빗뱅킹 이사 겸 지점장은 메츨러의 파트너 에메리히 뮐러를 인용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프라이빗뱅킹 부문에서 돈을 버는 은행은 그리 많지 않다.”

수십년째 이 업계에 있는 한 자산관리사는 프라이빗뱅킹 시장이 어떻게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는지 들려줬다. 이들의 부가 집중되면서 프라이빗뱅킹 은행들은 이들의 자산관리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프라이빗뱅킹 은행들은 부유층의 자산관리를 위해 애널리스트들을 채용하고 엄청난 규모의 자산관리 시스템을 가동했다. 또 부유층에 걸맞은 값비싼 지점 건설에 돈을 쏟아부었다. 대형 은행들도 프라이빗뱅킹 고객에게 개인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쟁 은행들이 늘어나면서 고객 확보를 둘러싼 은행 간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시장이 포화되면 흔히 나타나는 현상처럼 프라이빗뱅킹 은행마다 특별 조건을 미끼로 고객 확보에 열을 올렸다. 심지어 은행들은 신규 고객을 상대로 ‘고객이 만족하지 못할 경우 수수료를 반환한다’는 보증까지 해줬다. 2006년 기업컨설팅 업체 ‘지몬 쿠허 앤드 파트너스’(Simon Kucher & Partners)의 금융전문가 게오르크 뷔프커는 “프라이빗뱅킹 부문에서도 신규 고객 유치전이 점점 가격 인하 경쟁으로 치닫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프라이빗뱅커들이 고객에게 제공하는 특별 조건을 은행 내부에서도 잘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는 이를 ‘경고신호’라고 말한다. 컨설턴트들은 심지어 정기예금에 너무 후한 이율을 제공해 은행 수익이 ‘제로’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한 은행가는 “거액을 예치한 고객이 원하면 은행은 수수료를 깎아줬다”고 전했다. 은행이 금융상품을 판매할 때 거래 수수료가 낮은 주식 대신, 판매 수수료가 높은 투자증권이나 리스크가 높은 유가증권을 추천하면 그만큼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이런 방식은 2008년까지는 유효했다. 그러나 이후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터졌다.

▲ 프라이빗뱅킹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부유층 고객 확보를 둘러싼 은행 간의 출혈경쟁이다. 유럽의 한 은행 본사 건물 밖에 프라이빗뱅킹을 안내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REUTERS

저금리에도 5~6% 수익률 원하는 부자들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고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많은 투자자들이 그제야 자신이 투자한 금융상품에 정확히 어떤 개별 상품이 들어 있는지 관심 갖게 됐다. 금융위기가 부자들의 눈도 열어준 꼴이다. 적잖은 자산관리사들이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부유층 고객이 금융거래 비용과 상품을 꼼꼼히 살펴보게 됐다고 입을 모은다. 방크하우스 메츨러의 요제프 뫼스트는 “은행 고객들이 더 많이 의심하고 더 비판적으로 됐다”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고객들이 수익률에 대한 기대치를 하향 조정한 건 결코 아니다. 함부르크 저축은행의 예르크 루데비크는 “은행 고객 대다수는 안정적 투자를 원하면서도 5~6%의 수익률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안전한 재테크, 최소한의 비용, 여기에 6%의 수익률이란 건 당연히 어울릴 수 없는 물과 기름의 조합과도 같다.

금융계는 더 높은 수익률로 고객을 유인했던 과거 관행의 부메랑을 맞고 있다. 이자율이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는 지금 6%라는 수익률을 대체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더구나 자산관리사들이 지적하는 대로 부자들은 주식 매입을 상당히 주저한다. 그렇다보니 정기예금 수익률이 낮아지면서 부유층의 자산이 늘지 않게 된 것이다. 고객들의 불만이 늘어나는 것도 당연하다. 리히텐슈타인 LGT은행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대형 은행을 이용하는 부유층 고객 4명 가운데 1명꼴로 거래 은행을 바꿀 의사를 내보였다.

앞으로 자산관리사들로선 자력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매킨지 컨설턴트들은 지금까지와 달리 무조건 고객을 끌어들이기보다 어떤 고객층이 은행의 기존 고객, 그리고 은행 이미지에 맞는지를 검토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는 전문용어로 ‘관계 관리(Relationship Management)의 개선’이라고 명명된다. 금융업계는 부유층 위주의 비즈니스를 재편하고 ‘겨우’ 25만유로만 맡기는 고객이라도 유치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은행에 25만유로를 맡기는 고객층이 적은 비용으로 높은 수익을 내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반면 수수료를 인상하는 방식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는 지켜볼 일이다. 지난 몇 년간 금융기관이 고객들에게 제공한 특별 조건과 더불어 바젤 III에 따른 신규 자기자본 규정도 프라이빗뱅킹의 수익률을 낮추는 요인이었다. 특히 업계 관계자들은 부유층 고객들이 금융상품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더 많은 수수료를 요구받으면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경고한다. 요제프 뫼스트는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은행들의 비용 공개를 제시한다. “고객은 은행의 서비스에 대해 수수료를 내는 만큼 투명성이 높아지기를 원한다.” 물론 은행과 고객 모두 더 이상 과거의 수익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면 문제 해결은 더 쉬워질 것이다.

ⓒ Die Zeit 2013년 50호 So scheu, so kritisch
번역 김태영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