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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한 소주로 살아나는 지방 소주
국내 특집 ● 팔도 소주 “살아 있네”
[40호] 2013년 08월 01일 (목) 김연기 economyinsight@hani.co.kr
   
 

지난해 소주 출고량은 모두 34억1127만병에 이른다. 이는 2011년보다 4.5% 증가한 것으로 성인 1인당 88.4병을 마신 셈이다. 서민과 희로애락을 함께한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다. 눈에 잘 안 띄지만 지방 소주도 살아 있다. 순한 소주 바람이 불면서 경영도 좋아졌다.  _편집자

1강, 2중, 7약 체제의 소주 판도… 20도 넘는 독한 술 퇴조로 판매량 늘고 이익 커져

우리나라의 소주는 모두 몇가지일까. 전국적으로 10종을 훨씬 넘는다. 지역별 자도주(自道酒·각 지역을 대표하는 술)의 체제가 무너졌지만 지방 소주들은 아직도 건재하게 살아 있다. 이에 <이코노미 인사이트>는 팔도 소주가 한곳에 모이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른바 ‘팔도 소주 품평회’다. 무슨 거창한 맛의 차이를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상표를 바꿔달고 도수가 조금씩 다르긴 해도 어차피 소주는 소주 아니겠는가. 다만 평소 접하기 힘들었던 다양한 소주를 마셔보며 소주에 얽힌 숨은 이야기를 논해보자는 의도다. 소주 팔도유람의 기회는 서울 소재 대학교 노어노문학과 92~98학번 동문 6명에게 주어졌다. 일행은 장맛비가 쏟아지던 여름 저녁, 10여종의 소주를 모두 맛볼 수 있는 서울 노량진의 한 고깃집에 둘러앉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김연기 부편집장

가장 먼저 고른 소주는 보해의 '월'(月). 마침 일행이 앉은 테이블 벽에 배우 한가인을 모델로 내세운 월의 광고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주저 없이 월을 택했다. 보해를 처음 마셔본 김옥곤(41)씨는 "잔을 입에 대어 한모금 머금었더니 달콤하고 부드럽다. 19.5도라는 도수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달달한 향이 입안에 맴돈다"고 말했다.

월의 가장 큰 특징은 단일주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소주는 크게 원료에 따라 단일주정 소주와 혼합주정 소주로 나뉜다. 한가지 곡물만을 사용해 만든 주정을 단일주정, 여러 곡물을 사용해 만든 주정을 혼합주정이라고 한다. 홍경종 보해 마케팅팀 대리는 "혼합주정 소주와 달리 월은 국내 최초로 단일주정(사탕수수)으로 만들었다. 깔끔한 향과 부드러운 목넘김으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까지 사랑받고 있다"고 말했다. 소주병에 적힌 '외로운 달이 세상을 밝힘에 내가 외롭지 않음을 알았습니다'라는 문구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술맛을 더 돋우었다.

지금까지 지방 소주업체들은 수도권에서 하이트진로, 롯데주류 등 대기업의 물량 공세에 밀려 시장점유율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지방 소주업체들이 수도권 공략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광주·전남에 기반을 둔 보해와 부산·경남의 무학이 대표적이다. 월은 수도권에서만 지난해 매달 평균 20%가 넘는 성장세를 보였다.

사실 소주시장은 맥주나 위스키 등과 달리 지역별 할당제를 뜻하는 자도주의 개념이 남아 있다. 그동안 국내 소주시장은 각 광역시·도에 소주 제조사를 1개씩 둬야 하는 '자도주법'의 영향으로 지역적 특성이 강했다. 이 법은 1996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폐지됐지만 한번 길들여진 입맛과 지역 주민들의 애향심이 맞물리며 여전히 '초법적'인 소주의 자도주화가 이어지고 있다. 지역별 자도주를 살펴보면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은 참이슬, 부산·경남은 즐거워예·좋은데이, 대구·경북은 맛있는 참, 광주·전남은 잎새주, 전북은 하이트소주, 대전·충남은 O2린, 충북은 시원한 청풍, 강원은 처음처럼, 제주는 한라산이다.

   
최근 들어 지방 소주업체들이 수도권 공략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광주·전남에 기반을 둔 보해와 부산·경남의 무학이 대표적이다. 보해가 수도권 공략을 위해 내세운 ‘월’(月) 광고 포스터(왼쪽)와 무학의 대표적인 순한 소주 ‘좋은데이’. 지난 1월 서울의 한 대형마트 주류 코너에서 직원이 물품을 정리하고 있다(오른쪽). 보해 제공

순한 소주에 숨은 경제학

지난해 업체별 전국 점유율은 '1강 2중 7약' 체제로 요약된다. 하이트진로(참이슬·48.3%)가 전체 시장의 절반 가까운 점유율을 차지하며 1인자 자리를 견고히 하고 있는 한편, 롯데주류(처음처럼·14.8%)와 무학(좋은데이·13.3%)이 각각 15% 안팎의 점유율로 그 뒤를 따르고 있다. 금복주(맛있는 참·7.6%), 보해(잎새주·월·5.5%), 선양(O2린·3.5%), 대선주조(즐거워예·3.4%), 충북소주(시원한 청풍·1.4%), 한라산소주(한라산·1.2%), 보배(하이트소주·0.9%) 등이 나머지 4분의 1이 채 안 되는 점유율을 조금씩 나눠갖고 있다.

그러나 지역별로 보면 자도주 업체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한국주류산업협회 관계자는 "지역별로 점유율 차이에 민감한 소주업체 간의 분위기 때문에 지역별 점유율은 공개하고 있지 않다"며 "다만 지역색이 강한 부산·경남, 대구·경북, 광주·전남, 제주도 등에서는 자도주가 여전히 80%를 넘는 지배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일행이 두번째로 고른 소주는 무학의 '좋은데이'. 대학생 시절에는 도수와 상관없이 마셨지만 지금은 가급적 도수가 낮은 소주를 찾는다는 김지연(38)씨가 한잔을 털어넣은 뒤 "생각보다 쓰지 않고 부드럽다"고 말했다. 좋은데이의 알코올 도수는 16.9도. 시중에서 판매되는 16도대 소주 가운데 가장 먼저 출시됐다.

이제는 바야흐로 '초저도주 시대'다. 소주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알코올 도수를 내리더니 16도짜리 신제품까지 잇따라 출시하면서 순한 소주는 이제 업계의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소주의 역사는 '도수 내리기'의 역사라 부를 만하다. 1920년대 소주는 알코올 도수 35도, 제조 방식은 증류식이었다. 그러다 1965년에 도수가 30도로 떨어지고 제조법도 희석식(에틸알코올 등 주정에 물과 조미료, 향료 등을 섞어 마시기 좋은 도수로 희석해 소주 맛을 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1973년 하이트진로의 전신인 진로가 한꺼번에 5도를 낮춘 25도 소주를 내놓은 뒤 20여년간 25도를 유지했다.

이후 1998년 23도 소주가 등장하면서 소주업체들이 본격적으로 도수 내리기 경쟁을 시작했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여성들의 음주가 늘어나고 음주량이 많은 20~30대 남성들도 상대적으로 가벼운 술을 찾는 흐름을 반영한 결과다"라고 말했다. 2001년 22도, 2004년 21도로 내려가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20도 밑으로 떨어졌다. 그러다 무학이 2006년 16.9도짜리 좋은데이를 내놓아 큰 성공을 거두자 대선주조(즐거워예·16.2도), 하이트진로(쏘달·16.9도), 롯데주류(처음처럼 쿨·16.8도), 금복주(The 순한 참·16.9도) 등이 초저도주를 잇따라 출시했다. 한국주류산업협회 관계자는 "지난해 20도 이하의 소주 비율은 전체 소주시장의 80%에 이르고 초저도주도 10%를 넘어서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소주가 순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선 소주업체의 '영업 전략'을 꼽을 수 있다. 도수가 낮으면 소비자들의 섭취량이 늘어난다. 똑같이 마셔도 덜 취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판매량 증가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예전만큼 취하려면 도수가 떨어진 만큼 더 마셔야 하니 매출 증대 효과가 있다는 얘기다. 또한 도수가 낮으면 주정도 적게 들어간다. 도수를 낮춰 4병 만들 주정으로 5병을 만드니 원가절감이다. 서영화 LIG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16도짜리 소주는 19도 소주보다 주정이 10% 정도 적게 들어가 원가 개선 효과가 있다"며 "원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주정이 덜 들어가면 영업이익률도 올라가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추정은 좋은데이의 판매량 추이로도 확인된다. 좋은데이는 2006년 11월 말 출시 이후 6년 만인 지난해 누적 판매 7억병을 돌파했다. 지난해는 1515만8천상자(1상자=360mL병 30개)가 팔려 전년보다 12.9% 판매량이 늘었다. 전국 소주업체 중 유일한 두자릿수 성장이다. 좋은데이 출시 전 무학의 전국 점유율은 10%에 채 미치지 못했으나 지난해는 13.3%로 뛰어 2위인 롯데주류(14.8%)를 턱밑까지 뒤쫓았다. 무학 관계자는 "젊은 층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면밀하게 파악한데다 순한 소주 생산에 따른 원가절감도 경쟁력 향상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참이슬'과 '처음처럼'의 수도권 전쟁

세번째로 술상에 올라온 소주는 대선주조의 '즐거워예'. 16.2도로 시중에 출시된 소주 가운데 도수가 가장 낮다. 최승천(39)씨가 한잔을 맛본 뒤 최근의 순한 소주 트렌드에 대해 나름의 진단을 내렸다.

"소주가 국민한테 큰 사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될 때부터였다.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얼른 취하고 집에 들어가야 했다. 또 회식 자리 등에 참석하지 않으면 사내에서 '왕따'를 당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만큼 도수가 강한 술이 필요했다. 하지만 산업화가 끝나면서 소주도 순해졌다. 1990년대 이후 3차산업 인구가 크게 늘고 여성들의 사회 참여도 본격화됐다. 이젠 어디를 가도 일방적으로 술이 센 사람에게 끌려가는 게 아니라 주량의 차이를 인정해준다."

삼겹살 불판을 한번 갈고 나서 이번에 만난 '선수'는 국내 시장 부동의 강자인 하이트진로의 '참이슬'. 하이트진로는 국내 대표 소주 브랜드인 참이슬로 수도권를 비롯한 전국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참이슬은 마지막으로 시장점유율이 공개된 지난 2월 한 달 동안 401만4천상자가 출고돼 49.4%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다. 한국주류산업협회는 과당경쟁 분위기를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로 지난 3월 이후 점유율 공개를 하지 않고 있다.

하이트진로가 국내 소주시장에서 1위를 차지한 지는 이미 오래됐다. 하이트진로의 전신인 진로는 1970년 소주시장 1위에 오른 이래 43년째 줄곧 정상을 달리고 있다. 세계적 주류 전문 잡지 <드링크인터내셔널>은 진로(참이슬)가 위스키나 보드카 등의 판매량을 앞질러 2001년부터 세계 증류주 판매량 부문에서 11년 연속 1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진로의 역사는 19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평안남도 용강군 진지면에 설립된 '진천(眞泉)양조상회'가 진로의 출발이다. 생산지인 진지(眞池)의 '진'(眞)과 소주를 증류할 때 술방울이 이슬처럼 맺힌다는 데서 '로'(露)를 따왔다. 대학 입학 이후 줄곧 참이슬만 마셔왔다는 신덕철(40)씨는 "적절하게 소주 고유의 쓴맛을 유지하면서도 부드럽게 넘어가는 게 일품"이라고 말했다. 실제 참이슬은 독하다는 인식이 강했던 소주의 인상을 부드럽고 깨끗한 이미지로 바꿔놓았다. 여기에는 참이슬만의 독특한 제조 공법이 숨어 있다. 참이슬 제조 과정에 도입된 대나무숯 여과공법은 소주 특유의 독한 맛을 획기적으로 완화해줬다.

부드럽고 깨끗한 소주로 치자면 롯데주류의 '처음처럼'도 빠질 수 없다. 일행은 참이슬의 강력한 수도권 라이벌인 처음처럼을 다섯번째 '선수'로 술상에 올렸다. 소주 제조에 세계 최초로 알칼리 환원수를 사용해 부드러운 맛과 숙취를 줄여준다는 점을 강조한 처음처럼은 첫선을 보인 2006년부터 술꾼들의 큰 성원을 받았다. 출시 이후부터 소주업계의 전반적인 침체 속에서도 꾸준하게 10%대의 성장을 유지해오다 지난해는 점유율을 15%까지 끌어올렸다.

처음처럼이 나오자 일행 가운데 한명이 이쯤에서 '폭탄주'를 한차례 돌리자고 제의했다. 사실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는 이른바 '소폭'이 유행한 것도 처음처럼의 돌풍에 날개를 달아줬다. 오비맥주의 카스와 처음처럼을 섞은 '카스처럼'이 폭탄주의 대명사가 되면서 처음처럼은 주류업계의 최대 격전지인 서울 종로·강남, 경기 분당 등 샐러리맨 밀집 지역에서 참이슬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점유율을 높였다.

품평회에 충실하고자 부지런히 '달린' 탓인지 참석자들의 얼굴이 금세 불콰해졌다. 누군가가 이쯤에서 품평회는 접고 편하게 마시자고 제의했다. 이후부터는 한라산, 시원한 청풍 등 아직 맛보지 못한 팔도 소주를 홀짝이면서 소주 이야기 대신 사는 이야기로 술자리가 흘러갔다.

지난해 소주 출고량은 34억1127만병(360mL 기준)으로 전년 대비 4.5% 증가했다. 성인 1인당 88.4병을 마신 셈이다. 가히 '국민주(酒)'로 불릴 만하다. 슬플 때는 슬퍼서 한잔, 기쁠 때는 기뻐서 한잔, 우리는 그렇게 소주와 함께 살아왔다. 과음 때문에 이튿날 쓰린 속을 달래면서 몇번이고 '결별'을 다짐하지만 결국 헤어지지 못하는 우리들의 애인이다. 오늘 저녁 팔도 소주 한잔 어떠신가.

yk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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