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섭 <한겨레> 경제부 기자

삼성전자는 지난 9월2~7일 독일 베를린 메세에서 열린 국제가전전시회(IFA)에 전시관을 꾸미면서 ‘갤럭시탭 7.7’ 코너를 마련했다. 갤럭시탭은 7.7인치(대각선 길이) 화면을 장착한 태블릿PC 신제품으로, 삼성이 이번 전시회를 겨냥해 준비한 ‘비밀병기’였다.
하지만 갤럭시탭 7.7은 전시회 개막 첫날 한나절 동안 관람객에게 선보인 뒤 흰 천에 가려졌다. 전시회 개막일 오전 독일 뒤셀도르프 법원이 애플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갤럭시탭 7.7에 대해 독일 내 판매 및 마케팅 금지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앞서 애플은 삼성전자 갤럭시탭 7.7이 아이패드의 디자인을 모방했다고 주장하며 뒤셀도르프 법원에 이 제품에 대한 마케팅 및 판매를 금지해줄 것을 요청하는 가처분 신청을 냈다.

삼성 관계자가 9월2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가전전시회에서 갤럭시 노트를 소개하고 있다.

애플의 전방위적 소송
삼성전자는 갤럭시탭 7.7에 대한 뒤셀도르프 법원의 판매 및 마케팅 금지 결정을 통보받은 즉시 갤럭시탭 7.7 전시 코너를 흰 천으로 가렸다. 천 위엔 ‘뒤셀도르프 법원의 판결로 갤럭시탭 7.7을 보여드릴 수 없다’고 써붙였다. 또 전시장 주변과 베를린 국제공항에 세워진 입간판에 담긴 갤럭시탭 7.7 사진을 스프레이로 시커멓게 가렸다.
이에 따라 전시회 개막일 오후 이후에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은 ‘갤럭시탭 10.1’에 이어 갤럭시탭 7.7도 구경하지 못했다. 갤럭시탭 10.1은 지난 8월 뒤셀도르프 법원의 판매 및 마케팅 금지 판결을 받아 이번 전시회에 출품조차 하지 못했다.
애플과 삼성전자 간 특허침해 소송전이 ‘치킨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이미 12개국 19곳의 법원 및 무역위원회에서 맞붙었고, 독일과 네덜란드 등에선 갤럭시탭과 갤럭시S2 판매 및 마케팅 금지 판결까지 나왔다. 뒤셀도르프 법원은 삼성전자 갤럭시탭 10.1과 갤럭시탭 7.7, 네덜란드 헤이그 법원은 스마트폰인 갤럭시S2에 대해 각각 판매 및 마케팅 금지 결정을 내렸다.
소송 과정에서 기상천외한 전략과 편법이 난무하고 있다. 애플이 뒤셀도르프 법원을 발굴해 ‘애용’하는 게 대표적이다. 뒤셀도르프 법원은 특허권자의 주장을 우선 존중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특허권자의 국제 평균 승소율이 35%인 데 반해, 뒤셀도르프 법원은 63%에 이른다. 갤럭시탭 7.7 판매 및 마케팅 금지 결정에서 보듯, 특허권자의 주장을 수용해 결정을 내린 뒤 상대에게 불만이 있으면 이의신청을 하라는 경우도 많다. 삼성전자는 애플이 뒤셀도르프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낸 것에 대해 ‘한방 먹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뒤셀도르프 법원은 이런 방식의 재판 진행으로 독일에서 벌어지는 특허침해 소송의 40%를 처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무리한 판결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삼성전자 갤럭시탭에 판매 및 마케팅 금지 결정을 한 것에 대해서도 “특허권자의 이익을 지나치게 옹호해 정보기술 산업의 혁신을 막는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은 “애플이 삼성전자를 법정으로 모는 것은 ‘던롭’이 둥근 모양의 타이어를 만든다는 이유로 ‘브리지스톤’을 제소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애플이 증거 사진을 조작해 제출한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이미 갤럭시탭이 아이패드의 디자인을 모방했다고 주장하며 뒤셀도르프 법원과 헤이그 법원에 각각 제출한 갤럭시탭 사진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뒤셀도르프 법원은 유럽 지역 전체에서 갤럭시탭 10.1 판매 및 마케팅을 금지한 결정을 번복해 판결 효력을 독일 내로 한정했고, 헤이그 법원은 애플의 디자인 모방 주장을 기각했다. 삼성전자 쪽은 “애플이 다른 곳에도 조작된 증거 사진을 제출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애플이 독일과 네덜란드 법원에 조작된 증거 사진을 제출한 사실을 다른 법원과 무역위원회에도 알리고 있다”고 밝혔다.
애플은 왜 이런 꼼수까지 쓰며 특허침해 소송전을 벌이는 것일까. 애플이 삼성전자에 부품단가 인하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게 이번 특허침해 소송의 발단이라는 게 유력하다. 애플이 보급형 아이폰으로 스마트폰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전략을 마련해 부품업체들에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했으나 삼성전자가 거절하자 특허침해 소송으로 압박하고, 삼성전자 역시 애플의 전략에 밀리지 않기 위해 맞소송에 나서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애플에 아이폰·아이패드·노트북 등에 들어가는 칩·액정표시장치(LCD)·메모리 등을 해마다 10조원어치씩 공급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애플 쪽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면, 애플은 지난해 아이패드2 가격을 499달러로 대폭 낮춘 데 이어 저가 아이폰으로 스마트폰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전략을 마련하고, 부품 공급업체들에 큰 폭의 단가 인하를 요구했다. 애플이 세계 최대 부품 구매자고,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장착된다는 게 회사 이미지에도 도움이 돼 대다수 부품 업체들이 애플의 요구를 수용했다. 반면 삼성전자는 애플의 요구를 거절했다. “애플에만 특혜를 줄 수 없었다”는 게 삼성 쪽 설명이다. 이로 인해 가격혁신으로 스마트폰 시장점유율을 높이려던 애플의 전략이 차질을 빚게 됐다. 그래서 애플이 삼성전자를 상대로 특허침해 소송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것이다.

소송 남발에 비판적인 IT 업계
삼성전자 쪽에서 보면, 애플의 부품단가 인하 요구를 들어주면 제 발등을 찍는 결과를 부를 수 있다. 애플에 공급하는 부품단가를 낮추면, 당장 반도체와 LCD 사업의 매출과 이익이 줄어든다. 또한 애플이 가격혁신 전략을 강화할 경우, 아이폰과 아이패드 가격이 낮아지면서 기기에 장착되는 메모리 용량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메모리 수요가 줄면서 가격 약세가 지속되는 상황도 예상할 수 있다. 이미 애플이 아이패드2 가격을 499달러로 낮추면서 태블릿PC에 장착되는 메모리 수요를 줄여 가격을 떨어뜨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나아가 삼성전자의 부품단가 인하로 아이폰과 아이패드 가격이 떨어지면, 갤럭시S와 갤럭시탭 마케팅도 어려워질 수 있다.
삼성전자는 애플의 특허침해 소송과 부품 공급업체 교체 압박에 버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애플이 스마트폰과 아이패드에 장착되는 애플리케이션칩 제조업체를 대만의 TSMC로 교체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에도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애플리케이션칩 제조업체나 메모리 공급업체를 바꾸려면 해당 제품의 품질 기준과 환경을 새로 설계해야 하는데 최소한 2년 이상 걸리고, 해당 제품의 경쟁력과 직결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쪽은 “애플이 삼성전자 부품을 사가는 것은 가격 대비 품질에서 앞서기 때문”이라며 “삼성전자가 앞선 기술력을 유지하는 한 애플도 공급업체를 바꾸기 힘들 것”이라고 자신했다.
애플과 삼성전자 모두 하이닉스반도체 매각 과정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다는 얘기도 들린다. SK가 하이닉스를 인수해 공격적 경영에 나설 경우, 삼성전자의 협상력이 크게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닉스의 반도체 공정 기술은 세계 최고로 꼽히는 삼성전자에 버금간다. 하이닉스가 주인 찾기에 성공해 공격적 투자가 이뤄지면 삼성전자의 맞경쟁 상대가 될 수도 있다. 애플 쪽에서 보면, 하이닉스를 앞세워 삼성전자를 압박할 수 있는 카드가 생기는 셈이다.
애플과 삼성전자 간 소송은 초기만 해도 적당한 지점에서 출구를 찾을 것으로 예상됐다. 뒤셀도르프 법원이 갤럭시탭 10.1의 유럽 지역 판매 및 마케팅 금지 결정을 했을 때, 애플이 뒤셀도르프 법원과 헤이그 법원에 조작된 증거 사진을 제출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 등이 출구찾기  시점으로 꼽히기도 했다. 양쪽이 협상에 나섰다는 얘기가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우리가 먼저 끝내자고 손을 내밀지는 않을 것”이라고 공공연히 밝히면서 예상은 빗나갔다. 삼성전자 쪽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애플의 특허침해 소송에 대한 삼성전자의 대응 태세가 ‘느긋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대응하자’는 쪽으로 바뀌었다. 헤이그 법원이 애플의 디자인 특허 침해 주장을 기각해 승기를 잡은데다 ‘노이즈 마케팅’ 효과도 보고 있어 서둘러 끝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애플이 법원에 조작된 증거 사진을 제출한 것으로 드러나고, 이 때문에 뒤셀도르프 법원이 받아들였던 애플의 가처분 신청을 철회한 데 이어 헤이그 법원이 애플의 디자인 모방 주장을 기각하면서 내부 분위기가 바뀌었다.” 삼성전자 관계자의 말이다. 그동안은 자칫 19곳 가운데 1곳이라도 불리한 판결을 받을 경우 회사 이미지가 실추되는데다 크리스마스 특수를 놓칠 수도 있고, 이겨봤자 반도체와 LCD 쪽은 애플이 최대 고객이라 어쩔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서둘러 출구찾기를 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의 상황을 보면 삼성전자가 출구찾기를 서두를 이유가 없어 보인다. 우선 삼성전자는 노이즈 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애플의 특허침해 소송을 계기로 ‘애플이 삼성전자를 최대 경쟁자로 인식해 디자인 특허를 무기로 견제하고 있다’는 인식이 업계와 소비자에게 퍼졌고, 덩달아 갤럭시S와 갤럭시탭의 인지도가 아이폰과 아이패드 수준으로 높아졌다. 삼성전자의 갤럭시S와 갤럭시탭이 얼마나 좋기에 애플이 저 난리를 치느냐며 구매하는 소비자도 많다고 한다.
이번 국제가전전시회에서도 갤럭시탭 7.7을 흰 천으로 덮어놓은 게 더 큰 전시 효과를 봤다는 평가가 나온다. 관람객의 궁금증을 자극한 것이다.
특허로 경쟁업체의 발목을 잡는 애플의 행위를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도 삼성전자 쪽엔 나쁘지 않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미디어랩의 창립자로 유명한 니컬러스 네그로폰테 예일대학 교수까지 애플의 행태에 우려를 표했다. 세계적인 정보기술(IT) 업체들이 ‘판매금지 가처분’을 남발하는 애플의 특허 공세 방식에 “경쟁과 기술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이면서 애플이 삼성전자를 상대로 시작한 특허 싸움이 ‘애플 대 IT 업계 전체’로 번지는 모습이다.

삼성, “이젠 우리가 반격할 차례”
삼성전자가 사업부별로 철저한 독립채산제를 하는 것도 애플과 타협할 수 없게 만든다. 삼성전자가 먼저 손을 내밀려면 애플의 부품단가 인하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데, 이 경우 수익성 악화와 성과급 삭감을 감수해야 하는 반도체와 LCD 사업부 쪽의 반발이 예상된다. 반도체와 LCD 사업부 임직원들이 ‘우리가 왜 휴대전화 사업을 위해 급여 삭감까지 당해야 하느냐’고 반발할 수 있다.
요즘 삼성전자 쪽 사람들은 “명분이 축적됐다”는 말을 자주 한다. 애플이 먼저 몇 차례 주먹을 휘둘렀으니, 이젠 삼성전자가 휘둘러도 정당방위가 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디자인이 아닌 통신기술 침해로 애플을 걸고 있다. 애플이 아이폰과 아이패드에서 통신 기능을 빼지 않는 한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쪽에선 애플이 아이폰5를 내놓을 때가 디데이란 말이 나온다.
js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