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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시장 안에서 행복한가?
[시장 들여다보기]
[15호] 2011년 07월 01일 (금) 조계완 economyinsight@hani.co.kr

조계완 부편집장

“최근 중국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고 인기 있는 외국인’은 누굴까?”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2011년 6월16일치)에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던진 질문이다. ‘도덕철학 짱!’(Moral philosophy rocks)이란 제목을 단 프리드먼의 칼럼은 버락 오바마도, 빌 게이츠도, 워런 버핏도 아니라고 말한다. 바로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학 정치철학 교수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샌델은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록스타’다. 2011년, 록음악처럼 도덕철학이 동아시아에서 분출하고 있다.
바야흐로 우리 시대는 지금 ‘사회’를 재발견하고 있다. ‘경제성장과 풍요로운 생활수준’을 목적함수로 하는 경제·경영·정보기술(IT)이 해방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시장담론이었다면, 이제는 어떤 사회인지,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상태를 진지하게 묻고 고민하는 도덕철학과 윤리담론의 시대로 급속히 이행하고 있다. 복지와 동반성장, 대·중소기업 상생,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의 특권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울분 등 여러 논쟁과 이슈의 바탕에는 ‘(사회)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 질문이 깔려 있다. 경제성장률이 몇%냐, 어떤 기업의 가치(주가)가 얼마냐, 어떤 노동자의 연봉(노동 가치)이 얼마냐는 이야기가 그동안 국가·기업·개인의 의제였다면 이제는 우리가 과연 행복한지, 살고 있는 곳이 ‘좋은 사회’(the good society)인지 따진다.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갈구하는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에 대한 추구가 더 이상 아니다.
마이클 샌델에 견줘 대중적 인기는 낮지만 한국에서 몇 년 전부터 부쩍 많이 읽히고 있는 또 한 사람이 있다. 경제역사가 칼 폴라니다. 그는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1944)에서 근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전 지구적 확산 과정을 만물의 상품화로 시장이 자신의 영토를 끊임없이 확장하고 이 과정에서 사회가 무너지고 뽑혀가는 것으로 묘사했다. 근대 자본주의 역사는 개인주의적 효용과 이윤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적 시장’과, 공동체적이고 타인의 삶을 고려하는 ‘사회’, 이 둘의 각축장이었다. 막스 베버도 자신의 대표적인 책 제목을 <경제와 사회>라고 달지 않았던가?
   
지난 5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회의에서 허창수 전경련 회장 등 참석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경제와 사회, 그리고 거대한 전환
해방 뒤 한국 사회를 질주해온 시장은 왜 지금 불신 속에 폭발하고 있는가? 단순히 경제위기가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시장 스스로 자꾸 고장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인가. 그동안 시장이 사람들에게 제시해온 ‘약속’을 들여다보자. 경제 교과서는 “시장은,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과 자유, 공정한 분배를 보장한다”고 주창해왔다. 초급 경제 교과서에 등장하는 콥-더글러스 생산함수는 간단한 ‘생산’함수이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분배’, 나아가 ‘분배의 정의’에 대한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경제학은 ‘더 효율적인,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탐색할 뿐 사회의 분배 상태는 경제 연구의 주제가 아니라고 흔히 여겨져왔다. 개인·사회·역사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철학적·윤리적 문제는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이 다룰 분야가 아니라며 배제해왔다. 그런데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는 원천으로서의 노동’ 등 분배의 정의를 둘러싼 화해할 수 없는 계급적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고, 이 논쟁을 우파 입장에서 간명하게 일소해버리는 데 사용한 경제분석 도구가 바로 콥-더글러스 함수였다. 이 함수는 생산에 참여한 자본과 노동이 각각 분배받는 몫은 두 생산요소의 한계생산성, 즉 가치 생산에 기여한 몫에 따라 정확히 결정된다고, 오일러라는 수학자의 도움을 받아 명쾌하게 증명한다. 그러면 시장은 ‘정의롭고 공정한 분배를 보장하는’ 제도가 되며, ‘착취’라는 불온한 말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생산성에 따른 분배’는 시장에 대한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공고화하면서 확산시키는 명분이자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

달콤한 경제학, 달콤한 시장의 약속?
교양경제서는 대부분 시장의 완벽함과 효율성, 그리고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글로 가득 차 있다. 영국 주간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의 이름난 경제 에디터 그레그 입은 최근 펴낸 <달콤한 경제학>에서 “미국 경제는 자유시장과 자유기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지 않고 오래갈 것”이라고 말한다. 시장, 그리고 시장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군사력보다 더 강한, 미국의 진정한 힘이라는 얘기다.
시장에 대한 맹목적 믿음은, 시장에서의 경쟁적 교환의 결과로 나타난 불공평조차 ‘모두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다소 길지만, 시장근본주의의 정신적 지도자인 밀턴 프리드먼(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말을 들어보자.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선망의 대상인 각선미를 타고났다거나 무하마드 알리가 위대한 권투선수가 될 기술을 타고난 것을 두고 공평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수백만 명이 디트리히의 각선미를 감상하거나 알리의 권투 시합을 보고 즐길 수 있던 건 이러한 자연의 불공평 덕택이었다. 알리가 하룻밤에 수백만달러를 벌 수 있다는 건 확실히 불공평하다. 그러나 알리가 그 시합 준비를 해온 나날에 대해 미숙련 부두 노동자의 하루 보수밖에 받지 못한다면? 그 결과 우리는 알리의 시합을 관전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됐을 것이다. 그 정도 보수에 그친다면 과연 알리가 엄격한 훈련과 절제된 생활을 감내하면서 좋은 시합을 보여주겠는가?” 시장에서의 소득 불평등은 희소한 자원이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되도록 보장해주는 것이므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장의 또 다른 약속은 “시장에서 사적 재산권을 명확하게 잘 설정하기만 하면 수많은 갈등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쉽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해·오염 문제가 대표적인데, 시장거래 기능을 활용하면 놀랄 만큼 많은 최적의 해결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오염배출권거래제는 이른바 ‘비재화’인 오염에까지 사적 재산권을 부여해 시장에서 사고팔게 하면 오염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 자기 돈을 내고 ‘오염권 재산’을 구입하면 마음껏 오염을 배출해도 된다? 스티븐 레빗은 <슈퍼 괴짜경제학>에서 “기술혁신이 산업화 물결을 일으켰고 이것이 지구온난화를 초래했지만, 동시에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감축하는 기술혁신도 곧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오염감축기술 개발이 큰돈을 보장한다면 내일 아침에 갑자기 거대한 기술적 진보가 일어나 지구에서 온난화 공포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사라지게 될까? 자유기업원 등은 시장의 효율과 약속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한국의 ‘재벌’이라고 말한다. 다윈적 진화론 관점에서 볼 때, 재벌 체제는 시장에서 오랫동안 적자생존의 검증 과정을 거쳐 형성됐고, 독립적 기업 체제에 비해 훨씬 더 효율적인 기업지배구조로 진화·정착돼왔다는 논리다. 여기서 시장이 아닌, 국가에 의한 재벌 탄생은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시장만능주의는 불평등과 분배를 교정하는 일조차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정치적으로 다수결 원칙에 따라 분배 방식을 결정한다면 사람들이 자기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하면서 분배 방식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혼돈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해결보다는 시장에 의한 해결이 사회를 안정시킨다는 논리다. 그러나 현실의 시장은 안정을 보장하기는커녕 불안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노동시장을 보라. “노동세계는 같은 작업장 안에서도 원청 노동자와 하청 노동자로 확연히 분할되고 있다. 그 지위가 제도적으로 승인되고 유지되는, 즉 복지와 임금 이외의 여러 혜택을 부여받는 정규직 핵심 노동자와 그렇지 못한 비정규직 주변부 노동자를 분리하는 경계선이 그어지고 갈등도 격화되고 있다.” 금융시장이 초래하는 불안정 역시 마찬가지다. 프랑수아 셰네는 <자본의 세계화>에서 “금융적 축적에 따라 진정한 투기경제로의 이행이 시작됐다. 자산 가격이 유리한 방향으로 변동하리라는 기대가 투기의 기본 동기인데, 투기적 금융이 이윤 획득에서 성공하려면 어느 정도의 통화 및 금융 불안정이 불가피하게 필요하다. 시장이 지나치게 안정돼 있을 때 금융 운용자들은 거리낌 없이 지겹다고 고백한다”고 말했다. 역설적이게도, 한국의 투기적 주식시장은 이런 불안정에 이제 피로를 느끼고 있다.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개미든 기관투자자든 너나 할 것 없이 안전자산, 즉 ‘질로 도피’(Flight to quality)하면서 ‘저수익·안전’ 종목이던 삼성전자·현대차가 ‘고수익’ 종목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여지없이 깨진 ‘시장의 약속’
시장의 약속은 이제 ‘자유’로 이어진다. 경제 교과서는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개인’ 위에 발 딛고 서 있다. 밀턴 프리드먼은 <선택할 자유>에서 ‘시장’의 금전적·정신적 표현인 돈과 이기심에 대해 “자본주의에서 돈을 인간 행동의 가장 고상한 동기라고 볼 순 없지만, 그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깨끗한 동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기심이란 구성원의 흥미와 관심을 끄는 것이며,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고 또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들이다.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진실된 믿음을 일깨워주려는 선교사나, 헐벗은 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자선사업가 모두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그들의 이기심을 좇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돈과 이기심이 고상한 옷을 걸치면 ‘합리성’이 되고, 시장은 이제 합리성에 기초한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가 된다. 그러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은 <윤리학과 경제학>에서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우리 모두는 실수를 저지르고 종종 혼란에 빠지고, 세상에는 분명히 햄릿·맥베드·리어왕·오델로 같은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냉정하고 합리적인 인간들이 교과서를 채우고 있지만 세상은 훨씬 다양하다”고 말했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이 2010년 8월 서울 종로구 신문로 아산정책연구원에서 기자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시장의 고상한 약속과 숭고한 이상은 너무 쉽게 깨지고, 또 지켜지지 못해왔다.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노베르토 보비오가 <민주주의의 미래>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약속은 항상 깨지고 상처받기 쉽고, 또 빈번히 부패하고 타락하기 쉽다”고 말했듯이 시장의 약속 역시 냉혹한 현실에서 여지없이 깨져왔다. 사실 시장의 약속은 오직 ‘각자의 욕망 충족’에 대한 약속일 뿐이다. 개인의 욕망은 그저 충족해줘야 할 대상일 뿐, 욕망과 선호가 왜 형성됐는지, 그것이 윤리·생태·사회적으로 옳고 바람직한지는 전혀 따지지 않는다. 100만원으로 고급 모피 옷을 구입하든, 아프리카의 굶어죽는 아이들을 위해 쓰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극도의 빈곤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호화판으로 사는 사람들이 공존하더라도, 만약 부자들의 호사를 조금이라도 줄이지 않고서는 빈곤한 사람들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없다면 이른바 ‘파레토 최적’의 가장 효율적인 사회 상태다. 대부분의 경제학적 시장분석 모형은 그 모델이 파레토 최적을 보장한다는 주장을 증명하는 데 맞춰져왔다. 증명에 성공하면 그 모델은 이제 누구나, 어느 사회에서나 추구해야 할 ‘진리’의 지위로 격상된다. 최근 분출하는 사회 정의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시장에서의 개인의 욕망과 시민이 집단적으로 선호하는 사회 상태는 서로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갈파했다. 또 경제학자 오쿤은 시장에서의 ‘사회적 악수’를 강조한 바 있다. “노동시장은, 시장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 대신에 ‘보이지 않는 악수’를 필요로 한다.” 사용자와 노동자가 시장에서 맺는 고용계약은 항상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적절한 수준의 임금과 노동을 서로 제공하는 악수를 나눠야 시장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얘기다.
시장의 약속을 떠받치는 기둥은 ’보이지 않는 손’, 즉 ‘가격조정 메커니즘’이었다. 가격이라는 정보가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효율적으로 생산할지를 모두 말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 사회는 메마른 가격 정보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빈곤의 얼굴, 등록금으로 우울한 청년들의 생애, 오랫동안 타워크레인 위에서 외롭고 쓸쓸한 농성을 벌이는 어느 노동자, 이런 ‘사회적 정보’가 대중 사이에 빠르게 흡수되고 퍼진다. ‘공감의 시대’다.
역사는 두 번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칼 폴라니가 19세기 근대 자본주의를 사회에서 시장으로의 ‘대전환’으로 묘사했다면 이제 거꾸로 시장에서 사회로 대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1700년대의 애덤 스미스는 경제적 시장을 열어젖힌 정치경제학자이자 동시에 도덕철학 교수였다. 자신이 씨 뿌린 시장경제를 딛고 21세기에 그가 도덕철학자로서 재등장하고 있는 것일까?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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