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HERI) 소장

애플II, 처음 그 하얀 컴퓨터를 만났을 때의 흥분을 잊지 못한다. 본체와 붙어 있는 키보드는 그 또각거리는 소리조차 투명하게 들렸다. 케이블로 연결해둔 카세트테이프에서 간단한 프로그램 하나를 로드하려면 10분이 걸렸지만, 연인을 기다리는 대학생처럼 설레는 시간일 뿐이었다. 전원을 켜면 바로 뜨는 깜박이는 커서, 그 강렬한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애플이라는 기업은 그렇게, 무엇을 만들든 가장 먼저, 가장 새롭게 내놓는 곳이다. 그 선봉에는 늘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가 서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세상에 없는 것을 처음 만들어 내놓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는 경영자였다.
존 스컬리는 스티브 잡스가 스카우트해왔고, 한동안 애플의 CEO 역할을 맡았다. 그는 원래 펩시 소속이었다. 펩시는 미국 최대 음료 기업이며, 지리적으로 미국 동부 해안에 있다. 보수적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기업이라는 이야기다. 스컬리는 펩시의 부사장과 사장을 지냈다.
자신보다 16살이나 많은 스컬리를 만난 28살의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실현하려는 것은 전세계 사람들의 컴퓨터 사용법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쏘아붙이기까지 한다. “남은 인생을 설탕물을 팔면서 보낼 것입니까, 아니면 세계를 바꿀 기회를 얻겠습니까?”
이 한 장면에서 스티브 잡스의 성향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세계를 바꾸는 일’이 그가 생각하는 기업 경영의 성과다. 사람들이 개인용 컴퓨터, 휴대용 디지털 재생기, 그리고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사용하게 되는 일이 잡스가 꿈꾸던 세상의 변화다.
그래서 잡스는 세상에 없는 제품을 만드는 데 인생을 걸어왔다. 그리고 완벽주의적으로 그 성과에 집착한다. 또 ‘버전 1.0 중독증’을 보인다. 최초 버전에 모든 것을 걸다시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 제품의 완성도는 늘 높다. 그러나 그 뒤 버전을 높이는 데는 상대적으로 서툴고 관심이 떨어진다. 완벽주의적으로 버전 1.0에 집착하는 이런 행태는, 그 위험도 크다. 크게 성공할 수도 있지만, 실패하면 피해도 크고 상처도 크다.

서로 다른 경영 스타일을 보여주는 스티브 잡스(왼쪽)와 빌 게이츠.

‘해적단’의 대장, 스티브 잡스
애플이 애플II 이후 내놓은 컴퓨터 매킨토시는 잡스의 이런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매킨토시 개발팀의 방에는 해적기가 휘날렸다. 개발자들은 자신을 ‘해적단’이라고 불렀다. 스티브 잡스는 이 팀을 직접 지휘했다. 해적단의 대장인 셈이다. 세상을 바꾼다는 의지로 충만한 그들은, 동료라기보다 동지 같았다.
그리고 매킨토시를 발표하던 1984년. 그해 슈퍼볼 결승전의 광고를 아직 기억하는 미국인이 많다. 내용은 이랬다. 머리를 박박 민 죄수복 차림의 남자들이 ‘빅 브러더’의 연설이 나오는 스크린을 멍하니 보고 있다. 이때 금발의 미녀가 억압자들에게서 도망쳐 이 자리로 뛰어 들어온다. 그녀는 커다란 망치를 돌려 스크린 한가운데로 던지고, 스크린은 폭발해 산산조각이 난다. 그리고 간단한 멘트. “◯월24일은 애플컴퓨터가 매킨토시를 소개하는 날입니다. 그때 당신은 왜 우리의 1984년이 조지 오웰의 <1984년>과 다른지 알게 됩니다.”
컴퓨터를 내놓는 게 아니라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혁명을 일으킨다는 콘셉트의 이 광고는, 당시 각 방송사 뉴스에 나올 만큼 파격적이었다.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고 세상을 바꾸는 게 경영이라는, 스티브 잡스의 성향에 꼭 맞는 광고였다.
이런 개척자 성향은 역시나 위험을 맞게 된다. 초반에 잘나가던 매킨토시는 금세 위기를 맞는다. 해적 같아 보이던 매킨토시 개발팀은 곧 지나치게 낮은 연봉에 불만을 갖게 되고 핵심 인력이 회사를 떠나게 된다. 소비자는 디자인은 그럴듯하지만 확장 슬롯이 없고, 스크린이 작고, 내장 하드 드라이브가 시원찮던 초기 매킨토시를 곧 외면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창업한 애플에서 1985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애플을 떠난 뒤에도 픽사를 경영하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만들어내 아카데미상을 받으며 부를 거머쥔 뒤, 다시 애플로 복귀한다. 그러고는 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 등 세상에 없던 제품을 속속 내놓고 지금 세상을 바꾸고 있다.

경리사원 닮은 현실주의자, 빌 게이츠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비슷한 시기에 창업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은 잡스와 비교하면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내 미국 유학 시절, 학교에 당시 마이크로소프트 CEO이던 스티븐 발머가 찾아와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발머는 게이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빌은 창업 초기부터 늘 직원들의 월급날을 걱정하며 그 약속을 어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억만장자가 된 뒤에도 그게 몸에 배어 있었다. 창업 초기에는 무조건 몇 달치 월급을 통장에 쌓아두고 경영해야 한다는 철칙이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일에 투자할 때 매우 조심스러워했고, 보수적 경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게이츠의 경영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수확자’에 가깝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개척자’인 잡스와는 다른 모습이다. 게이츠는 또한 매우 현실주의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상주의자였던 잡스와 대조적이다.
1980년 IBM이 게이츠를 찾아와 자사의 컴퓨터용 운영체제를 개발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운영체제 개발 경험이 없으면서도 하겠다고 했다. 현금흐름을 확보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상주의자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때는 이미 프로그램 언어인 베이식(BASIC) 매출이 있는 상황이었다. 운영체제 개발에서 문제가 생겨도, 경영 전체가 어려움에 빠질 가능성은 낮다는 판단에서 신규 사업에 진출한 것이다. 계단을 올라가듯, 하나씩 현금흐름 창출 사업을 만들어가며 안전하게 경영한 것이다.
버전 1.0에 온힘을 기울여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잡스와 달리, 게이츠는 비즈니스 기회가 생기면 일단 잡은 뒤 불완전하더라도 첫발을 내딛는다. 그러고는 다음 버전을 자꾸 만들어내면서 시장에 차차 안착한다.
기술 개발의 경우에도, 마이크로소프트는 웬만해서 신기술과 새로운 서비스를 먼저 내놓지 않는다. 주로 소규모 창업 기업들이 내놓는 기술과 서비스를 계속 지켜보다가, 잘나가는 곳을 사들여 자신의 운영체제와 응용 프로그램 안에 심어넣는 방식으로 연구·개발을 진행한다.
실적에서도 이런 차이는 드러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985년 이후 2008년까지 한 번도 매출이 감소하지 않았다. 또한 같은 기간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고 이익을 관리했다. 대단한 안정성이다. 그러나 애플은 매출이 1995년 이후 부침을 거듭하다가,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이익에도, 애플은 종종 적자를 냈고 2000년대 중반부터 이익을 안정적으로 내고 있다.
꿈을 찾아 미지의 세계에 계속 도전하는 것이 더 좋은 기업일까, 아니면 남의 기술을 사든 남의 실책을 이용하든 안정적으로 매출을 늘리고 이익을 관리하는 것이 더 좋은 기업일까? 해적단 대장 같은 이가 더 좋은 경영자인가, 아니면 경리사원 같은 이가 더 좋은 경영자인가? 당신은 어느 경영자를 따르며 일하고 싶은가? 또는 어느 기업에 투자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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