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

산에 사는 어떤 새가 그 숲을 지킨다고 하면 우리는 ‘그래, 그럴 수 있지’ 하고 상징적으로 받아들인다. 숲 속에 사는 것만으로도 새는 숲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새가 단순히 지키는 것을 넘어 숲을 가꾼다고 하면 의미는 조금 달라진다.
산에 가면 ‘어치’(사진)라는 새가 있다. 몸길이는 까마귀나 까치만 하고, 참나무 열매인 도토리를 즐겨 먹는다. 새의 분포 지역도 참나무와 일치한다. 도토리가 많은 우리나라는 전역에서 이 새를 볼 수 있다.
새는 대개 먹이를 저장하지 않는다. 그때그때 생기면 먹고, 없으면 또 그걸 찾아 온 산과 들을 헤맨다. 그런데 다른 새들과 달리 어치는 먹이를 저장하고 숨겨두는 습성이 있다. 떼지어 생활하면서도 자기만 아는 장소에 열심히 도토리를 모아놓는다. 그러나 사람도 가끔 자신이 물건 둔 곳을 잊을 때가 있는데, 새인 어치는 어지간하겠는가.
어치가 숨겨놓고 잊어버린 도토리가 싹을 틔우고, 그것이 다시 거대한 참나무 숲으로 변한다. 독일이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검은숲’도 처음엔 어치가 가꾼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참나무와 갈나무 숲에는 어치의 건망증으로 1년에 수만 그루의 새로운 나무들이 자라나고 있다. 새의 건망증으로 숲이 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새가 가꾼 참나무와 갈나무, 상수리나무는 또 그런 새들과 다른 생물들의 은혜에 어떻게 보답하는가. 오래전 어느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내 고향 강원도 대관령 아래에는 엄청나게 많은 참나무와 갈나무, 상수리나무 숲이 있다. 어린 시절, 가을이면 작은 자루와 밤을 따 담는 종다래끼를 들고 산에 가서 도토리를 주워온다. 그것을 잘 말려서 빻아 만든 것이 바로 도토리묵이다.
그런데 이 도토리가 어느 해는 놀랄 정도로 많이 열리고, 또 어느 해는 조금밖에 열리지 않는다. 많이 열리는 해는 참나무 숲에 저절로 생긴 작은 구덩이들이 도토리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이 참나무가 참 묘하다. 가을 흉년이 들 것 같은 해는 그걸 미리 알고 열매를 잔뜩 맺고, 풍년이 드는 해는 열매를 덜 맺는다. 내 어릴 때 할아버지는 참나무가 이름 그대로 참되고 어질어서 스스로 그렇게 세상를 살핀다고 말씀하셨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밤나무도 그렇고 참나무도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봄에 가루받이를 잘해야 하고, 그러려면 꽃이 필 때 날씨가 좋아야 한다. 참나무가 가루받이할 때 날이 가물면 그해 모내기에 필요한 물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반대로 가루받이할 때 비가 많이 오면 도토리 열매가 적게 열린다. 그래서 도토리가 많이 열리는 해는 들농사가 흉년이고, 산에 도토리 열매가 적으면 들농사가 풍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은 사람들이 규정하는 이치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산촌에서 자연과 더불어 오래 사신 할아버지의 말씀이 오히려 더 옳을 수 있다. 어치가 자기만의 먹이 저장 방식으로 참나무와 갈나무, 상수리나무 숲을 가꾸듯, 이 나무들도 흉년 들 때 산식구와 들식구를 보살피는 것이다. 때로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그런 아름다운 세상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