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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도 드라마도 ‘빨리빨리’가 대세
[CULTURE & BIZ] 빨리감기·시성비 시대, 변화하는 콘텐츠
[167호] 2024년 03월 01일 (금) 김윤지 yzkim@koreaexim.go.kr

 

김윤지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 최근 극장가에선 ‘신뢰할 수 있는 영화’만 골라 보는 경향이 늘어나면서 <범죄도시>처럼 전작 시리즈로 재미를 유추할 수 있는 영화가 주목받는다. 연합뉴스


최근 영상콘텐츠 시청에서 두드러진 변화를 보여주는 단어는 ‘시성비’다. 가격 대비 성능 비율을 말하는 ‘가성비’에서 나온 말로, 시간 대비 성능을 추구한다는 의미다. 일본에서도 ‘타임 퍼포먼스’의 줄임말 ‘타이파’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시간 대비 효율을 강조하는 것은 세계적 현상이다.
콘텐츠 시청에서 시성비가 특히 강조되는 이유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유튜브 등으로 콘텐츠 공급이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혹은 봐야 할 콘텐츠가 너무 많아지면서 최대한 시간을 적게 투여해 많은 콘텐츠를 보겠다는 심리가 확산된 것이다.

입소문 여파 커진 영화관
이런 심리 확산은 사람들의 콘텐츠 시청 경향에 많은 변화를 줬다. 화제가 되는 드라마나 영화가 있어도 유튜브 등에 있는 각종 요약본으로 줄거리만 확인하는 게 시성비 측면에선 효율적이다. 빨리감기 등으로 재미없는 부분은 건너뛰며 보기도 한다. 보기 시작한 16부작 드라마가 영 신통치 않으면 바로 중단하는 강단도 필요하다. 콘텐츠를 잘못 선택할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약본 동영상 등으로 미리 결론을 확인한 뒤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 보기도 한다.
이런 변화는 산업에도 여러 파장을 미치고 있다. 영화관 위기가 대표적이다. 영화관 위기는 표면적으로는 코로나19 후유증의 영향이 크다. 팬데믹 기간에 영화관은 문을 닫아야 했다. 관객은 대신 OTT로 영화와 드라마를 즐겨 보기 시작했고, 영화관 없는 세상에 익숙해졌다. 코로나19가 엔데믹(감염병의 풍토병화)으로 바뀌면서 영화관은 다시 문을 열었지만 관객은 영화관을 찾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다시 문을 연 영화관의 영화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코로나19 기간에 상영되지 못했던 영화가 뒤늦게 개봉한 것이 꽤 많았다. 영화는 트렌드를 빠르게 반영하는 탓에 몇 년 지난 영화는 낡은 느낌을 주곤 한다. 이런 영화들이 2024년 상반기까지 상영될 예정이라 영화관의 회복은 더디기만 하다.
영화관 관람료가 꾸준히 오른 탓도 있다. 2017년부터 2022년까지 5년 동안 우리나라 영화관의 평균 관람료는 28.7% 올랐다.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 10.2%의 세 배 가까이 오른 셈이다. 영화관 관람료가 OTT 한 달 구독료를 넘어서면서 많은 사람이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린다. 엇비슷한 영화라면 집에서 보고 그 비용으로 ‘방탈출 게임’을 즐기거나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 맛집을 탐방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심지어 젊은이들이 전보다 연애를 덜 해 데이트 자체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근본적 이유로는 최근 ‘시성비’가 강조되면서 영화관에 가는 것이 위험한 선택이 됐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라면 집에서 OTT로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이를 넘어 ‘굳이’ 영화관에 가려 한다면 많은 장해물을 건너야 한다. 관람료를 따로 내고, 두 시간 동안 꼼짝없이 앉아 빨리감기나 건너뛰기 없이 영화에만 집중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선택한 영화가 재미마저 없다면 보통 손실이 아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더라도 실패하기 어려운 ‘신뢰할 수 있는 영화’만 골라 보는 경향이 늘었다. 전작 시리즈로 대략의 재미를 유추할 수 있는 프랜차이즈물 영화를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다. 2023년 첫 ‘천만 관객’ 영화를 기록한 <범죄도시3>도 이 덕을 많이 봤다. 과거 <범죄도시> 시리즈를 즐겼던 팬들이 안심하고 그다음 시리즈를 선택한 것이다. 2023년 유명 일본 애니메이션 등에 상대적으로 관람객이 몰려든 것도 비슷한 이유다.
 

   
▲ 일본 칼럼니스트 이나다 도요시의 책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은 문화콘텐츠 분야에서 빨리감기가 확산한 원인을 다각도로 제시한다. 현대지성

흥행 영화 관람객 완만히 증가
흥행 영화의 관람객 수 추이도 변화했다. 과거 한국 영화 흥행작들은 개봉 첫 주에 가장 많은 관객이 든 뒤 점차 줄어드는 형태가 많았다. 2017년
8월 개봉한 <택시운전사>의 경우 첫 주 436만 명, 둘째 주 358만 명, 셋째 주 242만 명이 들어 3주차에 1천만 명을 돌파했다. 4주차엔 관람객이 3주차의 절반 이하인 102만 명으로 줄었다. 개봉 전 마케팅으로 첫 주 관람객을 얼마나 유치하는지가 흥행에 결정적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사람들의 검증을 기다려 천천히 관람을 결정하는 형태가 늘었다. 덕분에 첫 주가 아니라 둘째 주에 더 많은 관객이 드는 경우도 많다. 2023년 최대 흥행작인 <서울의 봄>은 첫 주 189만 명, 둘째 주 276만 명, 셋째 주 232만 명, 넷째 주 197만 명, 다섯째 주 137만 명이 들면서 5주차에
1천만 명을 넘어섰다. 코로나19 이전과 비교할 때 관객이 초반엔 적고 완만하게 증가하는 형태다. 볼 만한 영화라는 입소문이 날 때까지 충분히 기다린 뒤 관람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잘되는 영화일 때 이야기고, 대부분의 영화는 초반 부진이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간판을 내리는 일이 많다.
입소문 영향이 커지면서 부작용도 생겨났다. 영화 개봉 초반 소셜미디어 등에 부정적인 영화 평가가 오르면 흥행에 미치는 악영향이 과거보다 커졌다. 2022년 여름 개봉한 영화 <비상선언>은 호화 출연진 등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흥행은 200만 명을 살짝 넘는 수준에 그쳤다. 코로나19 뒤 상영 정상화 직후여서 관람객을 다시 영화관으로 불러오는 게 어려웠던 점도 있었지만, 개봉 초반 “실망스럽다”는 악평이 크게 퍼진 탓이 컸다. 영화 평가는 다양할 수 있지만, 이 영화는 초반 악평이 유독 두드러졌다. 결국 다른 영화사가 조직적으로 악평 퍼뜨리기를 했는지, 즉 ‘역바이럴’ 마케팅이 있었는지를 두고 경찰 수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입소문이 영화 흥행에 미치는 영향은 이미 많은 연구로 검증됐다. 호평보다는 악평이 더 잘 전파되고 영향력도 높다는 게 일반적인 연구 결과다. 사람들은 호의적 정보보다 비호의적 정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손실 회피 경향’도 그중 하나다. 나쁜 정보를 잘 확인해야 내 관람료를 잃지 않기 때문에 나쁜 정보에 더 민감하다는 것이다. 시성비적 측면에서는 돈과 함께 시간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기에 악평에 더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짧아지는 드라마 시리즈
드라마도 변화한다. OTT는 ‘몰아보기’를 할 수 있도록 드라마 시리즈를 한꺼번에 선보이며 성장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드라마들은 1990년대 이후 대체로 16부작이라는 긴 형태가 정착됐다. 방송사 처지에선 드라마가 어느 정도 재미있다고 소문이 나야 광고가 늘기 때문에 시리즈를 다소 길게 잡는 게 필요했다. 제작사 처지에서도 세트 제작 같은 고정비를 고려하면 시리즈가 길어야 편당 제작비를 낮출 수 있었다.
그러나 시청자와 OTT 처지에서는 16부작이 다소 비효율적이다. 넷플릭스 시청 데이터 연구에 따르면 최적의 시리즈 길이는 6부작이다. 넷플릭스 사용자의 75%가 하루 최대 4.5개의 에피소드를 시청하기 때문이다. 즉, 평균 사용자가 네댓 편을 몰아본 뒤 잠시 쉬는 것이다, 6부작으로 구성하면 두 번에 나눠 보면서 시리즈를 마칠 때 새 영화 한 편을 보기에 적당하다. 게다가 시청이 시작된 시리즈 가운데 평균 45% 정도는 끝까지 완주되지도 못한다. 넷플릭스 사용자의 절반 정도는 시리즈 시청 시작 뒤 25%가 되지 못한 지점에서 시청을 중단한다. 절반 가까운 드라마가 완주되지 않는다면 긴 시리즈일수록 OTT에는 손해다. 시청자 입장에서도 아무리 빨리감기 등을 이용해도 16부작을 완주하는 것은 시간과 감정 소모가 커서 주저하게 된다. 진입장벽을 낮춰주는 게 필요하다.
시성비 확산으로 한국 드라마 시리즈 길이도 짧아지는 추세다. 예전에는 흔치 않던 8부작, 10부작, 12부작이 늘어났다. 이보다 더 긴 시리즈라면 시즌1과 시즌2로 나눠 공개되기도 한다. OTT가 구독자의 발을 묶어놓으려 고안했지만, 시청자의 긴 호흡을 유지하는 어려움을 줄이기 위한 방안이기도 하다. 건너뛰기를 막기 위해 숨 쉴 틈 없이 빠르게 전개되는 드라마도 늘어났다.
하지만 더 어려운 경우는 30분, 1시간짜리 요약본만 보고 전체 시리즈는 아예 보지 않는 것이다. 방송에서 OTT로 건너갔던 시청자가 유튜브 요약본만 보며 아예 OTT를 켜지 않기도 한다. 이 때문에 “콘텐츠가 전부”라고 주장했던 OTT들이 예능이나 스포츠 중계를 늘려가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은 긴 시리즈에 비해 감정 소모가 적어 진입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스포츠 중계는 시즌이 이어지는 동안 구독을 해지할 위험이 적다. 모두 기존 콘텐츠보다 집중력을 덜 요구한다.
방송사나 OTT는 거꾸로 요약본을 활용하기도 한다. 야심 차게 준비한 드라마의 시청률이 오르지 않으면 유튜브에 요약본 등을 제작, 유포해 시청자를 다시 잡아끈다. 방송에서도 ‘○○○ 몰아보기’ 같은 드라마 요약 프로그램을 자주 볼 수 있다. 유명 유튜버가 만든 요약본 덕에 시리즈 후반부에 시청률이 오르거나 OTT로 신규 시청자 유입이 늘어나는 일도 많다.
이나다 도요시의 책 <영화를 빨리감기로 보는 사람들>은 이렇게 빨리감기가 확산한 원인을 다각도로 제시한다. 그 가운데에는 ‘실패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늘어난 것도 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늘 옆 사람과 비교하며 살아온 젊은 세대는 무엇에서든 ‘정답’을 빨리 찾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콘텐츠를 보더라도 쓸데없는 것을 보는 일은 지양하고, 올바른 해석을 해야 하기 때문에 빨리감기를 하거나 요약본 등을 더 찾게 된다는 이야기다. 무언가를 강요하는 사회에선 영화조차 편안히 감상하기보다는 효율적으로 소비하게끔 추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김윤지 연구원은 한겨레신문사에서 발행한 경제주간지 <Dot21> <Economy21>에서 산업부·경제부 기자를 했고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한국 중소기업의 대기업 종속성과 관련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에서 정보기술(IT) 산업, 문화콘텐츠 산업, 중소기업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연재를 통해 문화산업을 경제학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 접근해갈 계획이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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