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한겨레> 경제부 기자

모든 것은 30달러에서 시작된다.
김태용 감독의 영화 <만추>의 첫 장면. 누군가에게 쫓겨 버스에 올라탄 훈(현빈)은 짧은 휴가를 나온 여죄수 애나(탕웨이)에게 버스요금 30달러를 빌린다. 훈은 대신 시계를 애나에게 준다. 이를 상행위로 본다면 애나가 시계를 30달러에 산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녀에게 시계는 무용지물이다. 이는 칼 폴라니가 말하는 상호성과 대칭성의 원칙에 어긋나는 교환 행위로 증여나 다름없다. 훈은 시간을 물어본다는 핑계로 애나에게 말을 걸고, 시계를 되찾기 위해 다시 만나자고 제안한다.
이들은 실체 없는 사랑을 한다. 애나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했고, 훈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성노동을 제공하는 창남이다. 전자는 폭력적 파국을 겪었고, 후자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직업의 종사자로서 폭력적 상황에 임박해 있다. 말하자면, 두 사람 모두 실존적으로 ‘허공에 걸린 존재’고, 미국의 시애틀에서 ‘유령적인 존재’다. 실체 없는 사랑을 겪는 텅 빈 존재들.
　
교환될 수 없는 유령 화폐
이들이 ‘허공에 걸린 존재’임은 안개 낀 시애틀의 날씨를 감성화하는 조건이다. 이 영화에서 날씨는 (경제) 주변적 존재들을 감싸는 외피 같은 것이다. 이들은 시애틀의 시장에서 ‘유령’으로 오인된다. 오래된 시장을 야간에 관광하는 행사가 있는데, 여기에 참여한 관광객은 낯선 이방인을 유령으로 착각하고 깜짝 놀란다. 시장에서 교환 행위를 하지 않는 이들이 유령처럼 보이는 건 당연하다.
어쩌면 <만추>의 가장 허허롭고도 긍정적 역설의 힘은 유령 같아진, 교환될 수 없는 ‘화폐’가 되어버린 존재들이 나누는 사랑의 과정에 있는지 모른다. 유령의 질감처럼 얇고 희미한 사랑, 그 질감에 밀도를 불어넣는 것은 이들이 사랑의 대사를 차곡차곡 접어넣을 때다. 멀리 떨어져 입 모양밖에 보이지 않는 백인 남녀의 사랑에 ‘더빙’ 놀이를 하면서 이들은 자신의 사랑을 펼쳐놓는다.
이때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훈이 애나에게 빌린 30달러가 실물화하는 것이다. 실물화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사랑의 순금 부분- 문학평론가 김현이 잘 썼던 표현으로서 ‘정수’의 은유- 을 ‘태환’했다는 뜻이다. 또 하나는 30달러라는 교환을 붕괴시키고 서로가 서로에게 증여하는, 대가 없는 지급을 했다는 뜻이다. 무게중심은 후자에 실려야 옳을지 모르겠다.
‘태환 지폐’는 실체 있는 돈이다. 금 1온스를 39달러에 바꿔준다는 약속은 화폐량을 금 보유량만큼 유통시키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브레턴우즈 체제 붕괴로 화폐는 신용 매체로서만 존재하게 됐다. 미국은 이제 ‘돈 만드는 공장’이 되어 경제위기 때마다 달러를 찍어내고, 그러면 전세계가 행복해지는 시스템. 그것이 지금 세계 자본주의의 실체다. 사람들은 실체 없는 화폐의 본질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2008년 금융위기처럼) 까발려질 때마다 깜짝 놀란다(놀라는 척하는 것인지 모른다). 실체 없는 화폐는 얼마나 오래 지탱할 수 있을까.
이마무라 히토시는 괴테의 <친화력>과 앙드레 지드의 <위폐범들>을 전형적인 ‘화폐 문학’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화폐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적 속성으로서 존재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소설 <친화력>에서 매개자 구실을 하는 미틀러(‘매개자’라는 뜻)라는 변호사의 경고가 무시될 때 주인공들은 지옥의 길로 빠지게 된다. ‘매개 형식 소멸’은 곧 카오스의 도래를 뜻한다. <위폐범들>에서는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 없는 혼돈 속에서 파국으로 치닫는 주인공들의 관계를 통찰한다. 이를 통해 현실의 통화(Currency)가 가짜이기도 하고 진짜이기도 한, ‘악마의 말’과 같은 사태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현대인의 불안정한 상태를 꼬집는다. 현대사회는 가짜와 진짜 사이의 결정 불가능한 상태를 은폐하면서 강대한 국가권력으로 그 불안정성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버스 정류장 앞의 훈(현빈)과 애나(탕웨이). 유감스럽게도 이만희 감독의 원조 <만추> 필름이 사라져 온전히 비교하기 어렵지만, 스타일상으로 볼 때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보다는 김수용 감독의 <만추>에 더 가깝다.

그러면서도 그는 화폐가 인간의 근본 존재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데카르트식으로 말하면, ‘나는 교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는 게오르크 지멜(죄르지 루카치의 스승)의 이론을 빌려, 만약 화폐가 폐기된다면 인격의 자유 또한 소멸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20세기 사회주의의 중심 논점은 화폐 폐기였으며, 화폐 대신 국가 관리와 계획을 앞세웠다. 하지만 화폐는 폐기되기는커녕 완고하게 존속했고, 자본도 상품도 여전히 존재했으며, 캄보디아의 화폐 폐기 실험은 잔인한 대량학살을 초래했다. 화폐는 폭력(강탈)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것이어서, 화폐 안에 폭력이 내재됐기 때문이다. 화폐를 폐기하면 그 안에 내장된 폭력이 터져나온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마무라 히토시는 화폐에 대한 생각이 고전경제학파나 마르크스주의자나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한다. 애덤 스미스는 노동이야말로 가치의 원천이고 화폐란 그 가치의 물체적 외피에 지나지 않으므로 노동이야말로 본원적 구매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화폐의 물체주의적 견해의 전형인데, 여기에서 물체 화폐를 노동 ‘화폐’로 바꾼다는 최초의 ‘화폐 폐기론’이 보인다는 거다. 주지하다시피 노동가치론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다.
　
벌거벗은 존재로 바꾸는 악마적 힘
그렇다고 이마무라 히토시가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체제순응적이다. 화폐 폐기 실험은 성급했고 실패는 당연했지만, 현실의 텅 빈 화폐를 합리화할 수는 없다. 화폐는 매개를 통한 전능한 창조력이 있는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을 벌거벗은 존재로 바꾸는 악마적 힘을 표출한다. 청년 마르크스는 이런 화폐의 이중성 앞에서 많은 고뇌를 거듭했다. 화폐라는 신용 미디어를 뛰어넘는 방법은 없을까. 잃어버린 화폐의 실체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마르크스의 화폐 폐기론을 대신해 요즘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폴라니의 ‘사회적 통제’ 이론이다. 폴라니는 화폐와 시장이 인간의 존재 조건이 아니고, 선택적이며 특수한 현상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중상주의 국가의 절대권력이 파편적으로 존재하던 시장을 전국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원래 사회에 ‘묻어들어’ 있던 경제가 사회로부터 빠져나와 사회를 지배하게 될 때의 재앙을 폴라니는 일찌감치 예견했다. 폴라니가 화폐와 시장의 폐기를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는 시장을 사회(국가가 아니라)가 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폴라니와 스티글리츠와 장하준이 논파한바, 자기조정 시장이란 애초에 없었고 국가 없는 자본주의는 존재한 적이 없다. 국가 없는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우리는 이만희 감독의 원조 <만추>의 남자 주인공이 위폐범(신성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김기영 감독의 <만추> 리메이크작 <육체의 약속>에서 남자(이정길)는 강도다. 김수용 감독의 <만추>의 남자(정동환)는 범죄조직의 일원이다. 위폐범과 강도와 조폭과 창남의 차이. 오직 김태용 감독의 남자만이 여자와의 결합에 실패한다. 자신의 존재 조건을 배반하고 교환 양식에서 벗어나려 할 때, 실패는 이미 예정됐던 걸까. 다른 남자들이 사기치고, 빼앗고, 찌를 때 훈은 배려한다. 노동과 토지와 화폐의 상품화로 시장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류를 구할 역사적 비전은 결국 인간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하는 것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에서 애나는 기어이 ‘만추’를 실현한다. 여기서 ‘만’은 ‘늦은’이 아니라 ‘불가능한’이다. 도올 김용옥은 ‘대기만성’의 뜻을 “큰 그릇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노자> 41장)라고 풀었는데, 탁견이다. 애나의 기다림에 끝이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국가주의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영원히 오지 않을 ‘만추’가 될지 알 수 없다.
미래는 꿈꾸는 자의 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아포리즘을 빌려 말하면,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며 앞으로 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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