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대응해 유럽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 이를 위해 2023년 여름 전에 미래 유럽 산업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유럽주권기금’ 조성을 마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최근 이 재정계획이 엎어졌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계획을 취소해 기금 조성은 없던 일이 됐다. EU는 대신 ‘유럽플랫폼전략기술’을 내세우기로 했지만 이는 지원 대상 한정 등 한계가 많다는 지적이다.

오드 마르탱 Aude Martin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 기자
 

▲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맞서 유럽연합이 역내 친환경 기술과 에너지 산업을 지원하려는 계획이 최근 관련 기금 조성 무산 등으로 흔들리고 있다. 2023년 1월 독일 베를린의 한 수소충전소에서 BMW 차량이 충전하고 있다. REUTERS

유럽연합(EU)이 급선회했다. 2023년 초부터 고심해서 준비한 산업 전략이 완전히 엎어질 위기다. EU는 경쟁국인 미국의 기세에 마음이 급하다. 기억나는가. 2022년 여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자국 그린산업을 지원하는 내용의 대규모 투자계획을 밝혔다. 이른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다. 이 법은 전기자동차 등 친환경 제품을 사는 미국 소비자와 친환경 기술과 에너지 기업에 10년간 최소 3천억유로(약 427조4천억원) 상당의 지원금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담대한 전략이다. 그래도 쏟아지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다비드 코르망 녹색그룹 소속 유럽의회의원은 “이 투자계획에 친환경 행동을 향한 의지가 담겼다. 문제는 미국인의 생활습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절약에 대한 고민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물론 IRA가 추구하는 목표와 예산 규모는 대단하다. IRA 제정 이후 유럽은 유럽 말고 미국에 투자하라는 미국의 요청에 기업들이 넘어갈까 두렵다.
2023년 2월 EU 집행위원회는 유럽 산업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그때까지 발표는 몇 차례 미뤄졌다. 집행위 계획은 두 축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EU 단일시장에서 정부지원금 지급 규정을 완화하는 것이다. 목표는 분명하다. 회원국이 국내 산업을 지금보다 쉽게 지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 정책으로 EU가 분열하고 양극화할 수 있다. 다른 나라에 견줘 재정 여유가 있는 일부 지역에 기업이 몰릴 수 있다. 2022년 3월부터 EU 역내에서 승인한 정부지원금 가운데 48.5%는 독일, 22.6%는 프랑스에서 준 것이다. 다른 회원국이 나머지 29%를 나눠 가진다.
게다가 “재정 여유가 있는 나라는 EU가 개발하려는 중요 원자재가 없는 경우가 많다”고 파올라 몽테뤼스 베로니 크레디 아그리콜 소속 유로존 전문이코노미스트는 말했다. “EU는 중요 원자재 개발로 중국 등 국외 의존도를 낮추려 한다.” 역으로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지역은 중요 원자재가 많이 묻혀 있다. 그런 까닭에 어느 산업 분야든 나라별로 정부지원금을 지급하는 방안은 최선이 아니다. 자크들로르연구소에 따르면 수소 개발은 남유럽 국가 여럿이 참여해야 한다. 풍력발전기 생산에 필요한 자재를 생산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포르투갈이 협력해야 한다.
첫 번째 유럽 산업전략은 정부지원금 규정에 치중됐다는 한계가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집행위가 내세운 ‘유럽주권기금’(European Sovereignty Fund)이 두 번째 전략이다. EU 공동기금 조성으로 회원국 간 재정 격차를 줄이고 투자 방향을 조정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2023년 여름 전에 유럽주권기금 조성을 마쳐야 했다. 그런데 2023년 6월 말 갑자기 계획이 엎어졌다. 모두의 관심이 쏠린 EU 예산안 중간점검 결과보고에서 집행위가 계획을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공동기금은 없던 일이 됐다. EU는 그 대신 ‘유럽플랫폼전략기술’(STEP·스텝)에 만족하기로 했다.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3년 8월16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인플레이션감축법(IRA) 1주년 행사에서 연설 중 청중에게 주먹을 쥐어 보이고 있다. REUTERS

유럽주권기금 조성 물거품 돼
스텝은 한계가 많다. 첫째는 적용 범위다. 발레리 아이에 유럽개혁(Renew Europe)그룹 소속 유럽의회의원은 “스텝의 목적이 바이오·친환경 기술을 비롯해 딥테크(Deep Tech·선행 기술), 디지털 등 와해성 기술(기존 기술을 일순간에 엎어버리는 기술)을 지원하는 것이다. 대표적 예가 인공지능(AI) 산업”이라며 “지원 대상이 너무 한정됐다”고 아쉬워했다. 아이에 의원은 스텝이 “그저 마케팅 정책에 불과하다”고 본다. 예산 계획을 보면 “집행위가 기존 기금의 활용 범위를 조금 늘리자고 제안”한 게 전부다.
EU 집행위는 “새 정책 수단을 마련하는 데 적어도 12~18개월 걸린다”며 “기존 정책 수단을 통합하면 지원금을 효율적으로 지급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닐스 레드클레르 자크들로르연구소장은 “유럽의 새 정책 수단이 지금 있는 기금 다섯 개를 통합하고 새 누리집을 개설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고 비꼬았다.
 

▲ 풍력발전기 생산에 필요한 자재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포르투갈이 협력해야 한다. 2023년 6월 프랑스 베빌러스의 윈드파크에서 풍력발전기가 움직이고 있다. REUTERS

낡은 것을 새것처럼
집행위가 EU 회원국에 분담금 추가 납입을 제안하지 않은 건 아니다. 문제는 추가 재정수입 100억유로가 금방 바닥날 수 있다는 점이다. 유럽 경제정책전문가인 외랄리아 뤼비오 자크들로르연구소 연구원은 말했다. “100억유로는 독일 정부가 인텔(Intel)에 한번에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한 금액이다. 독일 중동부 지역에 초대형 반도체 공장을 세우는 것이 지원 조건이었다.” 게다가 “추가 분담금 100억유로가 모인다고 보장할 수 없다”고 아이에 의원은 말했다. 그는 “EU 산업정책과 우선순위를 다투는 정책이 많다. 우크라이나 원조 같은 사안은 회원국 사이에서 더 시급한 문제로 통한다. 우크라이나를 도와야 하는 건 맞는다. 하지만 산업부흥 투쟁 역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EU가 고작 몇 달 만에 정책 방향을 바꾼 배경이 무엇일까. 아이에 의원은 “정부지원금 규정 완화가 일단 결정되면 독일이 유럽주권기금을 거부할 우려가 있었다. 유럽주권기금 조성 여부는 차기 문제였다”고 설명했다. 아이에 의원에 따르면 최근 몇 달 새 여러 회원국이 유럽주권기금을 만들 필요성에 회의감을 나타냈다.
유럽개편연구소 이코노미스트인 잔더 토르도이르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유럽통합기금 예산의 일부를 스텝 플랫폼에서 정한 우선순위로 옮기는 방안에 만족감을 표했다”고 말했다. 뤼비오 연구원은 “두 나라가 포스트 코로나 경제회복기금의 일부를 우선순위 산업에 쓸 수 있다. 이 기금의 지원금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가 이탈리아와 스페인”이라고 말했다.
뤼비오 연구원은 통합기금을 재활용하는 방안 역시 일부 동유럽 나라에서 반길 만한 정책이라고 분석한다. 유럽통합기금은 EU 전체 예산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지출액 순위를 따지면 EU공동농업정책(CAP) 다음으로 두 번째다. 유럽통합기금의 본래 목적은 회원국 간 부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집행위는 이 기금을 만능 정책 수단으로 활용한다. 낡은 것을 새것으로 포장하는 식이다. 뤼비오 연구원은 “코로나19 위기 이후 긴급하게 돈이 필요해질 때마다 유럽통합기금 활용 대상을 확대했다”며 “코로나19 대유행, 우크라이나 난민 유입,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 위기 등 문제가 터질 때마다 그랬다. 유럽연합 통합정책의 장기 목표를 그렇게 서서히 희생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19 때 EU 회원국은 각각 유럽통합기금의 10%를 재편했다. 지금 집행위는 산업정책 예산으로 유럽통합기금의 5~10%인 190억유로를 쓰자고 한다. 이는 도박”이라고 말했다.
집행위는 여기에 더해 포스트 코로나 경제회복기금 일부(300억유로)와 기존 정책 수단(1100억유로)을 재활용해 스텝 예산으로 총 1600억유로를 모으겠다고 밝혔다.
 

바닥난 선택지
니콜라 르롱 파리정치대학 연구원은 “EU가 고유 예산을 필요한 만큼 갖추지 않으면 전략 산업을 비롯한 공공재를 제공하는 데 한계가 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EU가 역내 산업을 지원하는 데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회원국이 분담금을 늘리거나 △다른 정책의 예산을 빼서 쓰거나 △‘유럽 고유의 예산’을 마련하는 것이다. 앞의 두 선택지는 실행이 쉽지 않다. 세 번째 선택지는 코로나19를 겪고 나서 그 이점이 증명됐다. 다비드 코르망 유럽의회의원은 지금까지 거론된 방안을 보면 “포스트 코로나 경제회복기금도 갚지 못할 수준이다. 이 기금의 상환은 2026년 시작한다”고 말했다. EU의 고유 예산이 산업정책에 빨리 편성될 가능성은 그만큼 희박하다. 더욱이 그러한 예산은 회원국의 만장일치가 선결 조건이다. (미국의 IRA에 맞선) 유럽의 산업정책이 결국 개별 회원국의 각자도생 전략에 기대고 말 가능성이 크다.
 

산업정책 예산을 어디서 구하나

2023년 6월 말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EU 예산 확대에 필요한 고유 재원으로 세 가지 방안을 제안했다. “첫째는 회원국이 자국 기업이 낸 이익의 0.5%에 해당하는 금액을 분담금으로 더 내는 방안”이라고 파올라 몽테뤼스 베로니 크레디 아그리콜 소속 유로존 전문이코노미스트는 설명했다. 그에 따른 추가 수입은 1년에 160억유로(약 22조9천억원)로 예상한다. 분담금 증액은 엄밀한 의미에서 ‘고유 재원’이 아니다. 분담금을 추가로 부과할 때 새 기준을 적용해서 금액을 책정하는 것뿐이다. 현행 기준은 국민총소득(GNI)이다.
니콜라 르롱 파리정치대학 연구원은 “나라 단위로 갹출하는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니면 각 회원국은 받은 것보다 낸 것이 많지 않은지 늘 확인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랄리아 뤼비오 자크들로르연구소 연구원은 “새 재원의 목적은 동유럽 나라가 낼 몫의 분담금을 보전하는 것”이며 “유럽 탄소시장의 목적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집행위가 제시한 두 번째 방안은 탄소시장(탄소배출권 거래제도) 수입의 일부를 EU 예산으로 쓰는 것이다. 오늘날 탄소시장 수입은 모두 회원국 몫으로 나눠진다. 만약 두 번째 방안을 실행하면 탄소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잃는 게 많을 것이다.
유럽 탄소시장의 수입은 최근 2년 새 두 배로 늘어 2022년 약 300억유로를 기록했다. 탄소가격이 2021년 톤(t)당 55유로에서 2022년 80유로로 인상된 영향이 크다. 집행위는 2027년 제2탄소배출권 거래제도를 시행하면 수입이 더 늘어날 거라고 기대한다. 새 거래제도는 가계용 난방과 개인 교통수단에도 탄소배출 비용을 부과한다. 2028년부터는 탄소국경세의 세수도 늘어날 전망이다.
다비드 코르망 녹색그룹 소속 유럽의회의원은 “유럽연합이 조세제도를 설계할 때 국가 차원에서 적용하기 어려운 것에 집중해야 한다. 탈세 가능성이 있어서다. 그런데 제2탄소배출권 거래제도는 집에 난방하고 차를 타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이 없는 가계를 희생양으로 삼는다”고 말했다.
집행위 태도가 유럽의회와 유럽의회 좌파그룹에 견줘 소극적이다. 몇 달 전 유럽의회는 금융거래나 주식매입에 세금을 징수하는 방안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유럽의회 좌파그룹은 소득 최상위 가구와 슈퍼이익(Super Profit)을 낸 기업에서 걷는 세금을 신설하자고 제안했다.

ⓒ Alternatives Economiques 2023년 8월호(제437호)
Comment l’Europe a renoncé à sa stratégie industrielle
번역 최혜민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