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 > 이슈
     
엔진 연구하다 시장개척 “이토록 성공할지 몰랐다”
[INTERVIEW] 원포 리 폴크스바겐 전 중국지사장
[161호] 2023년 09월 01일 (금) 게오르크 파리온 economyinsight@hani.co.kr

 

원포 리(Wenpo Lee)는 폴크스바겐의 첫 번째 중국인 직원이었고, 폴크스바겐이 중국 사업을 구축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폴크스바겐이 어떻게 우연한 기회에 중국이 가장 선호하는 파트너가 됐는지 설명했다. 그리고 현재 독일 기업이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하는지 조언했다.

게오르크 파리온 Georg Fahrion <슈피겔> 기자
 

   
▲ 폴크스바겐의 중국 진출에 물꼬를 튼 원포 리는 엔지니어로 취직한 뒤 중국지사장까지 올랐다. 슈피겔

원포 리(87)는 1936년 당시 중국 수도이던 난징에서 곡물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국의 국공 내전이 끝나기 얼마 전인 1948년, 12살이던 그는 부모 뜻에 따라 대만으로 피란을 갔다. 거기서 그는 거리에서 고생하며 지내다 한 교사 부부 덕에 학교에 다니게 된다. 후일 그는 독일 아헨공과대학에서 엔진공학을 공부했고, 폴크스바겐에 엔지니어로 취직했다. 이 회사에서 그는 중국 지사장까지 올랐다. 이후 스위스 시계회사 스와치그룹의 중국·홍콩·대만 지사를 맡기도 했다. 현재 원포 리는 독일 베를린에 살고 있다.
폴크스바겐을 중국에 의존하게 했는데, 책임감을 느끼는가.
폴크스바겐이 중국에서 이토록 성공을 거둘지 꿈에도 몰랐다. 특히 중국 언론은 우리가 계획적으로 시장을 점유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기회는 주어졌지만, 어쩌다 성공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시작된 날짜와 장소는 1978년 4월17일 볼프스부르크(폴크스바겐 본사가 있는 니더작센주의 도시)다. 그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
나는 볼프스부르크 엔진 연구부서의 책임자였다. 당시 폴크스바겐 고위직에 외국인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나는 회사 전체에서 유일한 중국인이었다.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은 날씨가 참 좋았는데 사무실에 있었다. 그때 홍보부서의 아는 사람이 전화를 걸었다. 공장 정문에 중국 대표단이 와 있는데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모국어를 아직 할 수 있나요?”라고 그가 물었다. 그래서 재빨리 달려갔다.
 

   
▲ 1978년 4월 독일 볼프스부르크의 폴크스바겐 본사를 방문한 양컹 중국 농업·기계공업부 장관(맨 오른쪽)이 원포 리(가운데) 등 직원들과 함께 공장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펠릭스 리 가족 아카이브

무작정 찾아온 중국 대표단
누가 정문에 서 있었나.
내가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이미 중앙 건물의 전시장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한 번도 그 전시장에 가본 적이 없었다. 알고 보니 양컹 중국 농업·기계공업부 장관이 이끄는 중국 대표단이 온 것이었다. 폴크스바겐 생산 책임자도 합류한 상태였다. 당시 폴크스바겐은 매우 위계적인 조직이어서 나는 이 생산 책임자와 악수한 적도 없었다. 당연히 긴장했다.
중국 대표단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고, 무엇을 하기 원했나.
그들은 상용차를 보기 원했다. 이미 슈투트가르트에서 다임러를 방문한 상태였다. 슈투트가르트에서 대표단은 폴크스바겐 로고를 단 차와 소형버스들을 봤고, 무작정 볼프스부르크행 기차표를 끊었다고 했다. 폴크스바겐의 상용차 공장이 볼프스부르크가 아니라 하노버에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볼프스부르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저녁에 같이 식사하고 난롯가에 함께 앉았다. 수줍어하던 그들이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대표단은 무슨 말을 했는가.
장관은 “중국에서 개인 승용차를 생산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은 가난하고 도로도 좁다. 기름도 나지 않고 원자재도 없다. 그리고 승용차 수요도 없다. 우리는 상용차와 버스가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 쪽 대표 귄터 하르트비히는 독일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가난을 겪었지만 자동차산업을 발전시켰다고 대답했다.
당신은 평범한 엔지니어였는데,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도 앉아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처음으로 통역을 맡았지만, 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장관은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업계 표현도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통역뿐만 아니라 설명도 해야 했다. 나는 장관에게 개인적 이야기를 들려줬다. 바로 직전 해인 1977년 나는 거의 30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당시 독일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1976년 문화혁명이 끝난 뒤, 나는 곧장 비자를 신청했다. 난징의 부모님을 보기 위해서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 개인 승용차도, 택시도 없었다. 오직 크고 낡은 버스만 있었다. 그 버스는 비행기를 타고 온 승객만 탈 수 있었다. 나를 데리러 온 매형은 탈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매형의 자전거에 몸을 싣고 공항에서 시내로 향했다. 둘째 매형은 내 커다란 트렁크를 자전거 짐받이에 싣고 왔다. 나는 장관에게 말했다. 중국은 이제 점점 더 많은 국외 손님을 맞을 것인데 이대로는 안 된다. 중국에도 승용차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장관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그는 귀 기울여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 과정에서 첫 번째 거래가 이뤄졌나.
하노버에서 우리는 엘티(LT) 시리즈의 미니버스를 보여줬다. 장관은 중국에는 옴니버스(Omnibus)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다임러로 돌아갔다. 나는 일이 거기서 끝났다고 생각했다.
중국인들은 폴크스바겐을 잊지 않고 다시 찾았다.
가을에 두 번째 대표단이 왔다. 이번에는 공식적으로 방문 신청을 했고 중국대사도 함께 왔다. 이번에도 장관이 이끄는 대표단이었다. 그는 이렇게 제안했다. “자동차를 생산할 파트너를 찾고 있다. 우리는 외화를 벌어들이고 싶다. 자동차 조립 공장을 함께 지을 수 있겠는가? 부품을 보내주면 우리가 조립하겠다. 생산량의 일부는 수출하고 나머지는 중국에 남기는 방식이다.” 당시 폴크스바겐의 최고경영자인 토니 슈뮈커는 “우리에게 잘 맞는 제안이다. 사실 아시아에서 생산 장소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조립만 하지 말고 생산공정 전체를 진행하자”고 말했다. 이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아들인 펠릭스 리(저널리스트)가 당신 이야기를 책으로 출판했다. 책에 1980년대 상황이 묘사됐다. 중국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직전, 폴크스바겐 이사회가 이 프로젝트를 없애버리려 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당신이 이사회 결정에 반대하면서 프로젝트가 계속 진행됐다고 했다.
1980년 ‘비틀’의 판매가 부진했고 시장도 침체했다. ‘골프’ 모델은 아직 자리잡지 못했다. 나중에 나는 폴크스바겐이 현금흐름에 큰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이사회는 진행 중인 모든 새 프로젝트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프로젝트를 말이다. 이사회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가 계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는 내용으로 정중한 편지를 써서 중국 장관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그때 나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가 아무리 정중하게 편지를 써도 체면을 잃을 것이고, 중국인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면 중국인들은 다른 파트너를 찾을 것이다.’ 나는 중국 쪽이 벌써 르노 쪽과 연락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고 나면 중국인들은 다시는 우리에게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 1995년 12월6일 상하이폴크스바겐 공장에서 자동차를 용접하는 중국인 직원들. 상하이 공장은 폴크스바겐이 중국에 진출하는 교두보였다. REUTERS

이사회 결정 번복시켜
그래서 어떻게 했나.
협상을 계속 진행하면서 시간을 벌어야 했다. 논의해야 할 사안이 너무 많았고, 폴크스바겐의 실적이 다시 좋아질 때까지 주요 프로젝트가 약간 축소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중국 프로젝트 책임자에게 이사회의 이사들과 개별적으로 이야기해 설득하자고 제안했다.
부서 책임자 정도의 위치에서 웬만큼 자신 있지 않고서는 이런 일을 하기 어려웠을 텐데.
폴크스바겐에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이사회의 결정은 건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내 의견은 이 프로젝트가 장기적으로 중국에도, 폴크스바겐에도 이득이 된다는 것이었다. 프로젝트 책임자도 이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서 그가 이사 두 명을 설득했고, 나는 다른 두 명을 맡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 뒤 이사들은 프로젝트를 계속하자고 결정을 내렸다.
1985년 당신은 가족과 함께 베이징으로 이사했다. 그런데 폴크스바겐의 첫 번째 합작사가 있는 상하이가 아니었다. 당신이 맡은 일은 무엇이었나.
1984년 10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헬무트 콜 총리와 중국 총리(자오쯔양)가 참석한 가운데 첫 번째 합작투자가 공식적으로 체결됐다. 그런데 계약서에 서명하기 직전에 문제가 좀 있었다. 양쪽 대표 중 몇 명이 계약서에 서명할지 합의되지 않았다. 며칠 이 문제를 논의하면서 협약식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그때 리펑 부총리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볼프스부르크를 방문했을 때 친분을 쌓았다. 중국 쪽 파트너는 부총리에게 전화하는 것이 가능하겠냐고 반문했다. 리펑 부총리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요직에 있는 사람의 전화번호는 당연히 비밀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마침내 전화번호를 손에 넣어 리 부총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알겠다, 동지. 의전 실장과 얘기해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문제가 해결됐다. 서명 뒤 모두가 만족했다.
여기서 어떤 교훈을 얻었나.
나는 당시 최고경영자인 카를 한에게 글을 썼다. 베이징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기회가 상하이 공장이 아니라 베이징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카를 한은 “좋다, 그럼 당신이 그 자리를 맡으라”고 했다.
폴크스바겐의 중국 이름도 고안했다. 어떻게 ‘다종’(Dazhong)이란 이름을 생각하게 됐나.
중국 장관이 두 번째로 볼프스부르크를 방문했을 때 이미 나는 ‘중국어로 폴크스바겐을 어떻게 부르지?’라는 고민을 했다. 폴크(Volk)라는 말은 직역하면 ‘인민’이다. 중국에서 인민이란 단어는 여기저기 많이 쓰였다. 나라 이름에도, 국가 통화에도, 대학 이름에도, 주요 일간지 이름에도 들어가 있다. 이 단어는 너무 정치적 색깔을 띠었다. 중립적 이름이 필요했다. 불현듯 ‘다중’(大衆)이 떠올랐다. 이는 사람들의 무리를 의미한다. 대중을 위한 차, 바로 이거다 싶었다. 그리고 우연히도, 다종 글자를 뒤집으면 폴크스바겐 로고와 닮았다.
그 해결책을 볼프스부르크에서 발표했나.
흠, 아니다. 중국 쪽과 상의해 혼자 결정했다. 아무도 이런 일을 하지 않았고, 독일 쪽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당신은 결정권을 가진 수많은 중국 고위층과 친분을 쌓았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그들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당시 중국은 지식과 진보에 굶주려 있었다. 문화혁명 이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모든 이가 독일에 와서 자본주의 시스템과 조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주식회사가 어떻게 성공하는지 등을 보고 싶어 했다. 볼프스부르크에서 중국 고위층과 함께 다닐 때, 항상 대화를 나누고, 문제점을 설명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줬다. 그렇게 서서히 신뢰를 쌓았다.
 

   
▲ 2016년 4월26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오토 차이나’에 상하이폴크스바겐의 로고가 걸려 있다. 폴크스바겐의 중국식 이름인 ‘다중’(大衆)은 ‘대중’이란 뜻으로 원포리가 지었다. REUTERS

리펑과 친분 두터워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을까.
나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리펑 총리와의 관계를 예로 들어보자. 폴크스바겐을 방문했을 때 그는 부총리였다. 나는 테스트 현장에서 여러 대의 차량을 보여줬다. 그는 작지만 성능이 뛰어난 한 차량 모델에 관심을 보였고 자세히 살펴봤다. 나는 그에게 한번 타보라고 권유했다. 그는 대형면허밖에 없다고 했다. 나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이 차의 운전이 쉽다고 알려줬다. 리펑 부총리는 정말 기뻐했고, 그 폴크스바겐 모델은 리펑 부총리가 처음으로 운전한 승용차가 됐다. 리펑 부총리는 중국에 돌아가 당장 상하이 공장으로 왔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냐 물어보고 개인적으로 하나하나 해결해줬다. 이는 단 한 번의 운전 덕분이었다. 정치가도 사람이다.
1989년 6월4일 이후 총리가 된 리펑은 천안문 시위 진압에서 한 역할 때문에 평판이 나빠졌다. 다른 서구 기업들과 달리 폴크스바겐은 중국에 계속 남아 있었기에 비판받았다. 오늘날 폴크스바겐은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에 공장이 있어 많은 비판을 받는다. 서구 기업이 중국에서 사업하려면 도덕적 타협을 해야 할까.
1989년 6월4일, 나는 독일에 있었다. 그사이 나는 중국 사업의 총책임자가 됐다. 천안문 시위를 텔레비전으로 봤다. 머릿속에 든 생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우리 직원들의 안전이었고, 둘째는 사업이 위험에 처하지 않을까였다. 우리는 볼프스부르크에 위기관리팀을 만들었고 내가 그 팀을 이끌었다.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상하이와 창춘의 책임자들과 매일 통화했다. 당시 창춘에선 두 번째 합작투자를 협상 중이었다. 대피 계획을 세우고 직원의 가족은 일본 도쿄나 홍콩으로 보냈다. 매일 이사회에 보고해야 했다. 공장을 폐쇄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은 베이징에서 일어났고, 상하이에서는 비교적 평온했다. 나는 이것이 혁명이나 내전의 전조가 아니라 일시적이고 국지적인 소요라고 판단했다. 당시에는 인권도, 뒤따를 제재도 생각하지 못했다.
당신은 회사가 ‘중국에 남아 있어야 하나’를 고민한 게 아니라 ‘계속 남을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그때는 누구도 제재 가능성을 논의하지 않았다. 나는 상하이의 다른 외국 기업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중국에 남아 있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중국을 떠났다. 그들은 불안정한 상황이 장기화하는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정치적 고려는 당신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중국 시스템은 어떻게 평가하는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시절 ‘무역을 통한 변화’는 훌륭했다. 당시 폴크스바겐의 사업은 번창했고, 중국이 점점 더 개방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2013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등장했다. 시진핑 통치하에 중국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서 우리도 전략을 바꿔야 한다. 중국을 파트너이자 경쟁자로 보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유연해야 하고 더 빨리 결정해야 한다. 위원회나 토론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긴다. 그러는 동안 빨리 결정을 내리는 중국인들은 다른 곳과 협상을 끝내버린다.
 

   
 

협력할 때의 장점 기억해야
중국과의 ‘디커플링’(탈동조화)이란 구상은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급진적 경제 단절은 절대 불가능하다. 디커플링과 다른 극단, 즉 이전처럼 계속하는 것 사이에는 스펙트럼이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움직이고 사례별로 결정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우리가 항상 중국을 손가락질하며 경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협력했을 때의 장점을 기억해야 한다.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이는 가치가 있었다. 독일인은 중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독일에서 중국 관련 논쟁이 벌어지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경제적으로 너무 의존적이라는 점이다. 중국은 독일 대기업을 자기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다. 폴크스바겐도 그중 하나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경쟁자와 맞서려면 강해져야 한다. 이런 면에서 독일인은 과거에 사정이 더 나았다. 우리는 많은 분야를 포기해버렸다. 많은 기업이 중국에만 100% 투자하고 여기에는 아무것도 투자하지 않았다. 그건 잘못이었다. 중국과 성공적으로 협상하려면 덩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Der Spiegel 2023년 제27호
Am Werkstor stand eine Delegation Chinesen, man verstand nicht, was die wollten
번역 이상익 위원

정기구독자는 과거 기사 전체와 2016년 6월 이후 온라인 기사 전체를,
온라인 회원은 과거 기사 일부와 2016년 6월 이후 온라인 기사 전체를 보실 수 있습니다.

  

게오르크 파리온의 다른기사 보기  
ⓒ Economy Insight(http://www.economyinsight.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 기사의견(0)  
 
   * 3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600byte)
   * 욕설이나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운영원칙]
매체소개 구독신청 구독문의기사문의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무단수집거부찾아오시는 길
한겨레신문(주) | 제호 : 이코노미 인사이트 | 등록번호 : 서울 아 01706 | 등록일자 : 2011년 07월 19일 | 발행일 : 2011년 07월 19일 | 발행인 : 최우성 | 편집인 : 박종생
발행주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효창목길 6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 한겨레 고객센터 1566-9595 | 대표전화번호 : 02-710-0201 | 청소년보호 책임자 : 박종생
Copyright 2010 Hankyore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