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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미술 ‘최초’ 도입한 모작이 걸작은 아니다
[미술로 보는 자본주의] 한국 미술의 ‘세계화’ 기준 바뀌어야
[161호] 2023년 09월 01일 (금) 이코노미 shl219@hanmail.net

 

이승현 미술사학자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의 들머리 전시장. 한국 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세계화된 전시’라고 할 수 있지만 세계화의 기준을 재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겨레 노형석 기자


우리에게 ‘세계화’는 항상 좋은 가치였다. 한동안은 나라도 없었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도 세계 속에서 ‘코리아’의 존재감은 없었다. 그래서 세계 속에 한국을 알리고 존재감을 인정받기 위한 모든 노력이 그 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뒤늦은 우리에게 세계화란 앞선 선진을 따라잡으려는 서구화이자 근대화였다. 그 노력이 열매를 맺어 지금 세계는 한국 음악을 듣고,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보며, 한국을 방문한다. ‘세계를 배우기’에서 ‘세계에 한국을 알리기’로 입장이 반전되면서 이제 우리는 세계화의 의미를 재고할 필요성을 느낀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선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이 열렸다. 이는 미국 구겐하임미술관과 공동으로 기획·주최한 전시로, 2023년 9월부터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2024년에는 로스앤젤레스 해머미술관에서 순회전시가 예정됐다. 한국 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이른바 ‘세계화된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전시 내용도 세계화를 위한 우리 선배들의 고투를 보여준다. 전시의 내용과 형식이 모두 세계화와 관련 있다. 그런데 전시에서 다루는 세계화와 전시 기획과 장소의 세계화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1960~1970년은 세계미술사에서 회화나 조각이라는 전통미술의 이해를 넘어서는 작업, 즉 미니멀리즘을 시작으로 오브제·행위·개념·비디오·야외 등이 본격적으로 소개돼 퍼지던 시기다. 서구에선 1910년께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등장으로 모더니즘이 정점에 도달했고, 마침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모더니즘을 향한 반발로 아방가르드가 등장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새로운 유형의 표현적 추상미술이 등장하면서 후기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모더니즘이 다시 살아나자 1960년대 중반 이후 이에 맞서 평면회화를 향한 비판이 전면적으로 확산됐다.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반면 1960~1970년 한국은 식량 자급조차 못했고 아직 근대적 삶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 그나마 먹고살 만해진 1970년대 중반에야 한국미술은 단순 모방이 아닌 우리 독자의 해석으로 모더니즘을 소화하면서 단색화를 선보일 수 있었다. 그런데 모더니즘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시점에서 1960년대 이후 서구에서 동시다발로 등장한 새로운 미술양식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 난감한 상황에서 외국어로 된 책으로 공부해가며 서구의 동시대 미술을 시도하던 이 시기의 한국 미술 일반을 뭉뚱그려 우리는 ‘실험미술’이라고 부른다. 전시는 바로 이 미술을 다룬다.
한국미술사는 그동안 이런 선배들의 세계화를 위한 노고에 보답하듯 최초의 서양화인 고희동의 <자화상>을 필두로 최초의 야수파 작품인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이나 <여인>, 최초의 추상화인 김환기의 <론도> 등 서구의 새로운 사조를 ‘최초로’ 도입한 사례를 근대 걸작으로 선정해 전시해왔다. 서구에서의 최초는 새로운 사조를 여는 창의성을 의미하지만, 우리의 최초는 이를 배우는 과정에서의 서툰 모방일 수밖에 없어 한국의 ‘걸작’으로 분류되는 작품들 대부분은 작가의 미술학교 졸업작품이나 졸업 이후 10년 내외의 학습기 내지 모색기의 작업에 해당한다.
세계화가 시급해 서구 근대를 조속히 따라잡아야 하던 시절, 새로운 사조의 이른 도입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소수의 선별된 걸작의 역사로 기술되는 한국 근대미술사가 이들로 채워지면서 본의 아니게 서구 사조의 서투른 모작 내지 습작을 한국의 걸작이라 배우고 가르치게 됐다. 그렇게 배운 미술 지식으로 서구의 걸작과 한국의 걸작을 동시에 보면서 우리가 한국 미술에 자긍심을 가질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모작은 자연스럽게 원본에 대한 열망을 조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파리든 뉴욕이든 런던이든 서구에 갈 때마다 그들의 미술관 앞에 줄을 서게 된다.
세계화가 되기 전까지 아무도 한국미술에 관심이 없어 그나마 이런 사정은 우리 내부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런데 세계가 한국에 관심을 보이고 한국을 알려 하면서 서구의 선진을 학습하면서 시도한 작품들을 걸작으로 대외에 보여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리고 의외로 세계는 이런 한국미술사에 호의적이었다. 10여 년 전 서구 주류 미술계는 경제성장에 따라 아시아미술, 특히 일본과 한국의 미술을 주목했다.
그즈음 서구 미술관들은 일본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주요하게 다뤘고, 단색화는 1970년대 일본미술계의 공인을 거쳐 2010년대에 미니멀리즘의 중심성을 확증하는 변방의 증거로서 한국적 모더니즘 미술로 선택됐다. 그런데 1960~1970년대 서구 미술은 설치미술과 행위미술이 중심이었고, 일본도 사정은 동일해서 이 시기 한국 실험미술의 존재는 이들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단색화보다 더욱 확실한 증거다. 그래서 단색화는 서구의 메이저 갤러리에서 판매용으로 전시할 따름이지만 당시 존재감도 역사적 필연성도 없었던 한국의 실험미술은 메이저 미술관들의 전시를 통해 본격적으로 세계 미술사에 편입되는 모양새다.

독자적 성취 보여줘야
이쯤 되면 일본에서 미국과 서구로 바뀌었을 뿐 한국미술사를 쓰는 주체는 여전히 우리 자신이 아닌 셈이다. 그 이면에는 미술사 기술에서, 즉 한국의 걸작을 선별하는 데 역사적 평가와 예술적 평가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 우리 자신의 무지와 무감각이 자리한다.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선진 미술을 배운 과정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보여줘야 할 것은 한국미술의 우수성이어야 한다. 그것은 서구로부터의 도입이 아니라 우리의 독자적 성취를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다행히 김환기는 추상의 습작으로 시작해 자신만의 전면점화를 성취해서 단색화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고, 초기의 실험미술은 1980년대 나타난 자연미술과 다양한 행위·설치미술의 불쏘시개 구실을 했다. 한국 미술은 후발 주자로 불가피한 도입 역사를 안고 있지만, 한편으로 뛰어난 독자적 성취 역사를 함께 품고 있다. 한국을 알려는 세계인에게, 그리고 한국을 방문하는 세계인에게 세계를 재확인하는 동어반복이 아닌 한국의 우수성을 알리는 노력, 앞으로 세계화란 말은 이런 의미를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러기를 기대한다.

*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증권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7년을 다니다 작은 금융자문회사를 차렸다. ‘선진’ 금융을 보급한다고 했으나 그 환상이 깨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혼자 영국 런던의 내셔널갤러리와 호텔에서 2주가량 지낼 정도로 미술에 미쳐 미술사학과 대학원에 입학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다양한 전시를 기획한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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