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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온전한 동안 마무리해둬야 할 것
[박중언의 노후경제학]
[160호] 2023년 08월 01일 (화) 박중언 parkje@hani.co.kr

 

   
▲ ‘내 뜻 전달서’ 스마트폰 홍보 화면. 온전함 누리집


중견기업 P부장은 8월 말 정년퇴직한다. 그는 대략 5년 전부터 재무·건강·관계·권태의 네 범주로 나눠 이런저런 준비를 했으니 퇴직 이후가 그다지 불안하지 않다. 그런데도 은퇴부터 죽음에 이르는 노후의 삶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충분히 고민해보지 못한 큰 ‘구멍’이 남아 있다. 의식이 온전하지 않은 상황이 상당 기간 이어질 때의 대비책이다.
중장년에게 죽음 준비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비교적 널리 퍼져 있다. 좋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하기 위한 웰다잉 운동도 벌어지고, 일본의 ‘종활’(終活)처럼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필요한 일을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회복할 수 없는데도 공격적 치료를 받거나 병원 중환자실에서 고통만 키우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연명의료 대신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연명의료결정법)도 마련했다. P부장은 ‘사전연명의료의향’과 ‘장기기증의사’를 담은 등록증을 지갑에 넣어 다닌다.

사전케어계획(ACP)
고민되는 지점은 바로 그 앞 단계다. 사고나 뇌졸중, 치매 등으로 의식이 온전하지 않을 때다. 곧바로 세상을 떠나는 것은 아니니 중대한 판단과 결정이 적잖이 필요하다. 이럴 때 누가 자신을 대신해 의사결정을 하고, 어떻게 자신이 바라는 돌봄과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니라면 이런 상황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치매에 걸리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하고 생각해보면 느낌이 금방 올 것이다.
지금까지는 통상 나이 든 부모의 돌봄 책임을 맡은 자녀 등 가족이 모든 의사결정을 대신했다. 설령 부모가 의식이 또렷하다 해도 어지간해서는 자녀의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가족 중심의 부양 체계에서 이런 일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다른 대안도 없었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 속도는 매우 빠르다. 요즘 중장년 부모와 자녀 관계는 이전과 사뭇 다르다. 부모 세대는 자녀의 부양을 별로 기대하지 않거니와 함께 살려고 하지도 않는다. 부모 돌봄에 관한 가족 간 대화가 드문데다 의사결정을 대신해야 하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기회가 없으니 부모의 바람이 어떤지 자녀는 알 도리가 없다. 요양원·요양병원 입소와 같은 돌봄의 방식, 치료 형태, 비용 등을 둘러싼 부모와 자녀의 기대치 격차도 크다.
게다가 독거노인으로 불리는 1인 고령 가구가 크게 늘고 있다. 나이 들어 아무런 준비 없이 혼자 살다가 ‘만일의 상황’이 벌어지면 자신의 운명을 자녀나 가까운 이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수밖에 없다. 갑자기 그런 짐을 떠안는 쪽의 부담과 고민도 만만치 않다. 급증하는 비혼과 자녀 없는 가정에서 이런 상황은 더욱 막막하다.
고령화가 우리보다 앞선 일본에서는 5년 전부터 본격 대응에 나섰다. 일본 정부는 2018년 ‘인생 최종 단계의 의료·케어 결정 과정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개정하면서 ‘사전케어계획’(ACP·Advance Care Planning) 제도를 도입했다. ACP는 미리 자신의 의사를 밝혀 의식이 온전하지 않을 때의 돌봄과 의료 계획을 세워두는 것이다. 가장 흔한 게 치매여서 치매 환자를 위한 의사결정 지원 제도로도 불린다.
일본 도쿄도의 ACP 양식을 보면 세 가지 범주(지금까지 삶에 대해, 생활에 관해, 서비스에 관해)로 나눠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어디서 어떻게 돌봄을 받고 싶은지, 누가 의사결정을 대신해주기를 원하는지 등을 자세하게 적게 돼 있다. ‘입으로 식사할 수 없을 때의 대응’과 같이 중증치매 때 생사를 가름할 중대 결정사항도 담겼다. 이 양식이 법적 효력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당사자의 의사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근거는 된다. ‘종활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강조하는 일본 후생노동성은 이 제도에 ‘인생회의’라는 애칭을 붙이고, ACP 양식을 작성하면서 가족은 물론 의료·돌봄 관계자들과 충분히 대화할 것을 권장한다.

‘내 뜻 전달서’
개인 결정권을 더욱 존중하는 미국에서는 ACP 제도가 훨씬 일찍 발전했다. 법적 효력이 있는 ‘사전지시서’(Advance Directives)도 여기에 포함된다. 미국 국립보건원 국립노화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Aging)에 따르면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해 의료진에게 원하거나 원치 않는 의료 행위를 밝혀두는 ‘생전 유언장’(Living Will)과 자신을 대신해 돌봄·의료에 관한 의사결정권을 행사할 ‘케어 대리인’(Health Care Proxy)을 지정하는 서류가 가장 보편적인 사전지시서다. 미국 사전케어계획 양식에는 돌봄·의료에 관한 훨씬 세밀한 사항이 담겨 있다.
아직 이런 제도의 필요성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국내에서는 사회적기업이 먼저 깃발을 들었다. 온전하게 뜻을 전하고 삶을 보호해준다는 의미를 담아 ‘내 뜻 전달서’라는 서비스를 만든 ‘온전함’이라는 이름의 법률테크회사다. 이 서비스는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논의를 거친 여섯 범주(건강·의료·경제·생활·죽음·보호자), 100개 세부 항목으로 사전에 밝혀둔 자신의 뜻을 가족에게 전달해준다. 이들 항목은 돌봄·의료를 넘어 재산 관리와 대리인 선정 등 만일의 사태가 생긴 뒤 삶의 전반을 포괄한다.
스마트폰 등으로 회원 가입해 디지털로 된 ‘내 뜻 전달서’를 무료로 작성할 수 있다. 중대 사안을 깊게 고민해야 하므로 시간을 두고 기록하고 갱신하는 게 좋다. 작성을 마친 뒤 소액을 내면 회사에서 이 문서를 필요한 시점에 지정해둔 사람에게 보낸다. 디지털 문서가 법적 효력까지 갖추기를 원하는 사람은 공증, 후견 등의 법률 계약을 추가로 하면 된다. 디지털에 익숙지 않은 고령자는 종이 문서로 작성할 수 있다. 일반 변호 업무를 하다 ‘카이스트 사회적기업가 MBA’를 거치면서 방향을 튼 온전함 대표 차형진 변호사는 이 서비스의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며 “치매에 걸리더라도 자신의 삶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고 자녀의 심리적 부담과 부양 갈등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 한국 베이비붐세대의 막내(1963년생)인 박중언은 노년학(Gerontology)과 함께 고령사회 시스템과 서비스 전략을 연구 중이다. 나이의 구속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편안하게 늙어가기를 지향한다. 블로그 ‘에이지프리’(AgeFree)를 운영했고, 시니어사업에도 몸담았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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