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완 국내편집장

최근 서울시립대에서 정년퇴임한 강철규 교수(경제학)가 <소셜 테크노믹스: 사회적 기술이 역사를 바꾼다>는 책을 펴냈다. 강 교수는 이 책에서 자본과 노동 등 물리적 생산요소 투입에 의한 전통적 경제발전 모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제성장 모델을 제시한다. 이른바 ‘사회적 기술’(ST·Social Technology)이 인류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며, 이것이 정보기술(IT)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창했다. <이코노미 인사이트>와의 인터뷰에서 강 교수는 “진정한 발전은 경제성장만이 아니라 생명존중, 인권·자유 확대, 신뢰사회 구축, 사유재산권 보호 같은 기본적 가치가 실현되는 것”이라며 “우리 반세기 역사는 박정희식 성장지상주의와 김대중식 평화·인권 가치 간의 싸움이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대표적인 재벌개혁론자로, 김대중 정부 시절에 규제개혁위원회위원장과 초대 부패방지위원회위원장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 때는 공정거래위원장으로 3년간 일했다. 인터뷰는 3월14일에 이뤄졌다. 　

정운찬 동반성장위원회위원장이 ‘초과이익공유제’를 제시했는데, 공정거래위원장을 지낸 분으로서 어떻게 보는지?
그런 말들이 나와 사회적 논쟁이 되는 것 자체는 좋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불공정이 심각하고 대-중소기업 간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초과이익공유제는 자유시장경제제도를 지향하는 경제에서는 강제하기 어렵다. 기업의 목적은 곧 이윤 추구이고, 이것이 유인(Incentive)으로 작용해 기업이 열심히 일하고 창의력을 발휘하면서 부를 증대시키는데, 그 결과로 나온 (초과)이윤을 나누자고 하는 건 시장경제제도의 유인체계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도입하긴 어렵다고 본다. 기업이 열심히 부를 축적하지 않고 빼돌리려 할 것이고, 그러면 득보다 실이 더 클 수 있다. 다만 초과이윤을 얻은 기업이 자발적으로 이윤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건 있을 수 있고, 그것을 막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기 전에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할 일이 많다. 공정한 경쟁과 반칙 없는 자유경쟁을 확립하는 것이다. 예컨대 부당한 납품단가 인하, 대기업이 중소기업 기술을 탈취하는 것, 불공정 하도급 거래를 막아야 한다. 이런 것들이 초과이익 공유보다 더 중요하다. 물론 공정경쟁을 한 이후 탈락자와 패배자가 생길 것이다. 이들의 인권과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 이들은 복지제도를 확충해 세금으로 커버할 수 있다.
최근 경제학공동학술대회에서도 ‘공정사회’가 큰 주제로 다뤄졌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관계에서 볼 때 우리 사회의 ‘공정’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
공정은 ‘공평하고 정의로운 것’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케이크를 공정하게 잘라 배분하는 방법이 있다. 한 사람이 칼을 쥐고 케이크를 자르게 하고, 기다렸던 사람이 먼저 선택하게 하면 제도적으로 공정이 실현될 수 있다. 부(富)와 관련해 심리적으로 마음이 평안하면 사람들은 공정하다고 느낀다. 즉 ‘이 정도면 마음이 편하다’는 어떤 공정의 기준이 있다. 일종의 도덕적 회계로 파악한 ‘정의’라고 할 수 있는데 ‘도덕장부’의 수지 균형을 맞추는 것이 정의가 된다. 보수주의자들은 공정을 ‘기회 균등’ ‘계약에 의한 공정’으로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그런 것이 이뤄졌다 해도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경쟁의 초기 조건에서 차이가 있고, 자유경쟁 이후에 발생한 결과의 불평등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대-중소기업 간 관계에서처럼 자유계약이더라도 교섭 능력 차이로 인한 불공정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죄수의 딜레마’에서처럼 나쁜 계약에 의한 분배는 공정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 공정이나 정의를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인류가 지향하는 기본적 가치가 충족됐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정의를 판단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내가 ‘마음의 평안 상태’를 기초로 주장하는 대표적인 네 가지 가치가 있다. 첫째, 생명 존중이다. 생명이 존속하고 번영할 수 있는 기본적 수요가 충족돼야 한다. 둘째, 자유의 보장과 신장이다. 남을 해치지 않는 한 인간의 신체·재산·사상 등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심리적으로 평안해진다. 셋째, 신뢰사회 구축이다. 거래관계에서 서로 신뢰해야 평안하다. 신뢰를 파괴하는 거래와 관계는 정의롭지 못하다. 넷째, 재산권 보호다. 재산권이란 자신의 노동과 아이디어에 대해 보상받고 보유·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다. 이것을 침해받으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게 된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대-중소기업 간 거래에서 계약이 합법적으로 이뤄졌다 해도 협상력 차이 등으로 중소기업 쪽이 심리적으로 편하지 못하면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최근 펴낸 책 <소셜 테크노믹스>에서 제도나 조직 및 그 운영처럼 사회를 변화시키는 이른바 ‘사회적 기술’을 주창했다. 왜 지금 ‘사회적 기술’인가?
법과 제도, 이를 집행하기 위한 행정조직과 리더십 등이 대표적인 사회적 기술이다. 물적 자본에 기초한 물리적 기술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기술이 더 중요하다. 우리 사회는 특히 사회적 기술이 물리적 기술보다 더 뒤떨어져 있고 부족하다. ‘발전’이란 우리가 좀더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인데, 이를 위해 사회적 기술이 꼭 필요하다. 리처드 넬슨 교수가 이미 물리적 기술과 사회적 기술을 구분해 제시한 적이 있다. 물리적 기술이나 인적 자본 말고 생산성을 높여주는 또 다른 중요한 것들(제도, 운영 능력, 조직 등)을 사회적 기술이라고 불렀다. 매킨지연구소가 1995년부터 2000년대 초까지 미국 경제의 성장 요인을 실증 분석한 적이 있다. IT 못지않게 기업 운영 방식이나 영업조직 개편 등 사회적 기술 혁신에 의한 경제성장 부분이 크다는 게 결론이었다. 내가 세계 80여 개국 경제를 실증 분석해보니 사회적 기술 지표(반부패, 기업지배구조, 기업공시, 공공 및 기업 윤리, 투명성, 기업규제 완화, 법치, 재산권 보호 등)가 IT 기술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 인류 역사에서 크고 작은 수많은 사회적 기술이 출현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교환과 교역의 시작, 분배 규칙 확립, 사유재산 보호제도 확립, 노동분업을 통한 생산성 증가, 삼권분립과 민주주의 제도, 신뢰와 협력을 가능하게 한 법률, 효율적 기업조직 등이다.
새 책에서 “진정한 발전은 경제성장만이 아니라 생명 존중, 인권 자유 확대, 신뢰사회 구축, 사유재산권 보호 같은 기본적 가치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 경제는 진정한 발전을 이루지 못한 것인가?
우리 경제에서 물리적 기술은 세계 첨단을 달리는데 생명이 천시되고 자유가 억압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도시와 농촌 등 수많은 부문에서 양극화돼 갈가리 찢기고 대립하고 있다. 한쪽 사람들은 세계 최고의 부를 누리면서 살고 있는데, 다른 쪽 사람들은 한 달 월급 80만원으로 연명하고 있다. 이는 사회적 기술 부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2009년 용산 참사가 대표적이다. 사회의 가치 서열이 뒤바뀌어 수단적 가치가 목표가 되고 기본적 가치가 푸대접받는 게 현실이다. 즉 성장지상주의가 인간 생명과 인권을 우습게 알고, 신뢰의 토대를 무너뜨리며, 경쟁주의가 협력을 몰아내고 있다. 　
사회적 기술 관점에서 한국 경제를 실증 분석해보니 “사회적 기술이 물리적 기술의 하나인 IT보다 경제성장에 더욱 탄력적으로 나타났다”고 강조했는데.
우리 경제는 그동안 자꾸 IT 쪽 기술혁신만 해왔다. 그래서 다른 부문과 괴리가 커지고 향후 발전에도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것이 갈등을 낳고 양극화의 뿌리로 작용하고 있다. 이제 사회적 기술에 눈을 돌려야 한다. 물론 IT나 물리적 기술도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사회적 기술이 중요하다. 사실 자동차를 만드는 물리적 기술은 없어도 된다. 외국에서 사오면 된다. 그러나 사회적 기술은 내부에서 꼭 만들어내야 골고루 사람답게 사는 발전이 가능해진다. 특히 실증 분석을 해보니 우리 경제에서 사회적 기술 중 반부패 기술이 매우 비중 있는 지표로 등장했다. IT 발전에 비해 반부패 사회적 기술이 낮기 때문에 반부패 개선에 역점을 두면 경제적 성과가 더 나아질 수 있다. 외국 경제를 분석해봐도 선진국 진입 전후일수록 사회적 기술이 경제성장에 미치는 민감도, 즉 탄력성이 가장 높게 나온다.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반부패 등 일정한 수준의 사회적 기술이 갖춰져야 한다.
사회적 기술 중 하나로 사유재산권 보호를 이야기하는데 다소 뜻밖이다.
일해서 벌면 내 것이 된다는 재산권 보호 제도가 공고할수록 이것이 인센티브로 작용해 경제가 발전하게 된다.  노동이란 투입 요소를 생각해보면 내 의지와 이성이 노동 과정에 투입되므로 노동에 ‘인권’ 요소가 들어가 있다. 이른바 ‘인권론적 재산권’인데, 노동자가 자신이 만들어낸 부가가치에 대해 정당한 임금 몫을 못 받게 되면 자신의 재산권을 침해받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아직 재산권 문제가 많은 편이다. 공정한 분배도 확립돼 있지 않다. 남의 아이디어와 기술을 마구 훔쳐가고 도용하는 일이 흔하다. 영국은 국민의 재산을 왕이 세금으로 맘대로 빼앗아가는 것을 명예혁명을 통해 의회가 견제하면서 초기 재산권 보호가 명확하게 확립됐다. 이에 따라 은행 대출이나 발명 등 경제활동이 왕성하게 일어났고, 이것이 산업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재산권 보호라는 사회적 기술은 단지 부자들의 재산권을 보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기술의 선택과 도입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명예혁명이나 6·10 민주화 항쟁 등을 사례로 들고 있다. 사회적 기술은 혁명적 계기를 통해 도입되는 것인가?
사회적 기술을 잘 선택해 운용해야 생산성도 향상되고 인권도 신장되고 자유도 확대된다. 좋은 사회적 기술은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전통과 맥락을 끊는 혁명적 계기가 있어야 한다. 한국 현대사를 발전으로 이끈 주요 사회적 기술로 농지개혁, 건국헌법, 시장경제제도 선택, 개방경제 정책 선택, 독점 규제 및 공정거래법, 금융실명제 도입, 정치개혁 등이 있다. 역사적으로 변혁기에 혁명이 새로운 사회적 기술을 강요하기도 했다. 예컨대 서구는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농노와 같은 신분제를 철폐했고, 우리나라에서도 4·19나 6·10 항쟁을 통해 정치적 자유와 자유선거권 보장, 생명권 존중 등 기본권이 강화됐다. 혁명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금융실명제나 부패방지법 등 의미 있는 사회적 기술이 여론과 시민운동 등을 통해 들어온다. 　
요즘 개혁 성향의 경제학자들이 ‘공정·상생·협력·분배’를 ‘경쟁·생산성·효율·경제성장’과 결합하면서 함께 달성할 수 있다는 가치로 자주 얘기하고 있다. 상충되는 두 가치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자원이 한정된 세계에서는 치열한 ‘경쟁 속 협력’이라는 압력이 존재한다. 협력을 위한 경쟁이 끊임없이 진행되면서 사회적 기술이 진화하고 사회적 혁신이 일어난다. 인류 역사는 ‘경쟁’과 ‘협력’이라는 두 기둥 위에 만들어져왔다. 어느 하나만으로 설 수 없다. 원시 씨족사회의 협력 사냥이나 오늘날 기업 내 협력 작업이 대표적이다. 경쟁하지만 협력도 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둘은 항상 같이 가는 것이다. 사냥할 때도 경쟁과 협력을 같이 해야 한다. 물론 활을 더 많이 쏘아 사냥을 더 많이 한 사람은 더 많이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사냥한 것을 나누는 데도 협력의 룰이 존재하며, 그래야 불평불만이 없다. 성과물 분배 규칙은 사회적 기술이다. 오늘날에는 경쟁만 강조되고 협력은 실종된 듯하다. 경쟁의 승리자가 과실을 독차지하고 권력을 잡고 지배한다. ‘효율’과 ‘상생’은 서로 조화를 이룬다기보다는 인과관계가 있다는 편이 더 정확하다. 예컨대 생산성이 높아지면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기본적 가치인 생명 존속과 번영, 경제적 자유가 확대된다. 그러면 협력이 가능해진다. 문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인데, 이때는 가치의 우선순위를 따져야 한다. 경제성장은 최종 목표가 아니다. 경제성장은 생명, 자유 등 기본적 가치를 높이면서 동시에 신뢰를 파괴할 수 있다. 즉 생명을 파괴하고, 재산권을 탈취하고, 불공정거래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룰 수도 있다. 이때에는 가치의 전도를 막고 생명·인권·자유·신뢰가 우선시되도록 바로잡아야 한다.
‘경쟁 원칙’도 강조했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시장경쟁 원칙이 부족한 것인가?
한국 사회는 구조적으로 힘의 불균형이 크고 힘센 자의 반칙을 규제할 힘이 약하다. 그래서 경쟁 원칙이 잘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경쟁에서 승리는 동료들의 협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서로 협력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경쟁에서 이긴 뒤에도 협력을 계속해야 한다. 협력을 얻기 위한 토대는 분배 기준 확립, 반부패·투명성 확보, 견제와 균형 시스템 구축 등 사회적 기술을 발달시켜야 마련된다. 협력을 위해 정교한 사회적 기술이 고안되고 실행돼야 한다.
사회적 기술을 얘기하면서 생명 존중과 인권을 강조했다. 경제학자로서 ‘인간 자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생명, 자유 확대, 신뢰 구축은 경제성장률이란 가치보다 앞선다. 물론 가난해서 사람이 죽고 생명이 파괴될 때는 경제적 자유를 위한 의식주 해결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경제성장에 올인하자는 말은 용납될 수 있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 일부가 죽어나가더라도 성장률을 높이자는 건 안 된다. 발전이란 개념에는 생명, 신뢰, 재산권이 모두 포함된다. 성장률은 높아도 동반성장이 안 되고 기본적 가치가 후퇴할 수도 있다. 성장률을 조금 떨어뜨리더라도 기본적 가치를 실현하는 게 중요하다. 용산 참사를 보면서 가슴 아픈 건 도대체 재개발이 뭔데 사람 생명을 죽이냐는 것이다. 성장률을 높이려고 또 재개발을 통해 이익을 보려고 하다가 가치가 전도된 것이다.

강철규 교수의 새 책 <소셜테크노믹스>.

“지나친 정부 규제가 기업 경영을 어렵게 하는 환경이다. 기업 규제 완화를 진짜로 해야 한다”고 했다. 규제 완화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창하는 슬로건인데.
규제는 완화해야 할 것도 있고 강화해야 할 것도 있다. 일방적으로 완화만 이야기하면 안 된다. 경쟁을 저해하는 규제나 불필요한 인허가 규제, 진입 규제 등은 전경련이 주장하든 누가 주장하든 풀어야 한다. 반면 보건, 안전, 환경, 금융감독 등에 관한 규제는 오히려 더 강화해야 한다. 특히 경제 규제 가운데 카르텔, 시장지배적 사업자의 불공정거래 행위 등 시장경쟁을 제약하는 반칙에 대한 규제는 강화해야 한다.
‘박정희주의’와 ‘김대중주의’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 반세기 역사는 박정희식 성장지상주의와 김대중식 평화·인권 가치 간의 싸움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물론 생산성과 인권 모두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경제적 필요가 충족돼야 인권도 보장될 수 있다. 서로 자기가 더 중요하다고 싸우는데, 나는 인권·생명의 가치가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노예노동이나 노동착취에 의한 경제성장은 인권과 상충될 수밖에 없다. 그동안 경제학자들이 경제성장이 곧 발전이라고 단순히 생각했는데, 내가 여러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가다듬어보니 서구 근세사상에서 생명 존중이 아주 중요한 가치였다. 유럽연합의 리스본 헌법조약을 보면 엄청나게 많은 생명 존중 항목이 자세히 들어 있다. 제러미 벤담이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면서 행복을 느낀다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했는데, 그러면 소수는 죽어도 된다는 말인가? 마이클 샌델이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열차가 달리고 있는 정상궤도 한쪽 철로에 4명이 서 있고, 다른 쪽 철로에 1명이 서 있다고 할 때 1명이 있는 쪽으로 진행 방향을 틀어 사망자 수를 줄이는 것이 정의인가’라고 묻고 있다. 벤덤의 철학에서는 4명을 피하고 열차 방향을 트는 게 최대 다수를 위한 정의로운 선택이겠지만, 나는 달리 생각한다. 개인의 가치는 4명이든 1명이든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이 중요하다.
재벌체제 옹호자들은 우리나라 재벌이 적자생존 원리에 의해 살아남아 진화해왔고, 따라서 지금의 재벌체제가 최적의 상태라고 주장한다. 재벌개혁을 주창해온 대표적인 경제학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출 등 경제적 성과가 나쁜 재벌은 정부가 시장에서 과감하게 퇴출시켰고, 이런 철저한 성과주의 기반 아래 재벌들이 지금껏 성장했고, 경쟁력이 좋은 기업만 살아남았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망해야 할 곳인데도 국가로부터 금융, 조세 감면, 환율 등에서 자꾸 지원을 받아 살아남은 기업이 많다. 망할 기업이 살아남아 그 기업의 잘못을 국민과 채권자가 전부 부담으로 떠안아야 했다. 결정적 순간에 더 나은 기업이 성장할 수 있었음에도 오히려 더 나쁜 기업이 정부로부터 흠뻑 지원을 받아 성장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재벌 기업은 사회와 국민에게 갚을 게 많다. 우리나라 재벌체제는 국민경제 자원 배분의 효율성 면에서 문제가 많다. 개별 기업의 효율성이 높을 수도 있지만 이것이 국민경제 효율성과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다. 개별 기업에 자원이 집중돼 시장이 파괴되고 균형발전이 저해되면 국민경제 효율을 저해하게 된다.　
삼성그룹의 바람직한 지배구조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보는가?
재벌 총수 1인이 1∼3%의 매우 적은 지분을 갖고 있으면서도 순환출자 방식의 계열사 지분으로 가공자본을 만들어 거대 그룹을 지배하는 것이 정의라는 측면에서 문제다. 삼성은 그룹 1인 지배가 큰 문제다. 지주회사로 가는 것이 하나의 방법인데, 내가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있을 때 삼성에 대해 이런저런 기회에 ‘할 수 있으면 지주회사로 가라’고 했다. 그런데 대표적인 기업들의 덩치가 너무 커서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어렵다고 하더라. 그러면 ‘가령 전자그룹, 물산그룹, 금융그룹 등으로 나눠 별도의 지주회사를 만들면 되지 않은가’ 하고 말했는데 그래도 주가가 너무 올라서 돈이 많이 들어 어렵다고 하더라. 사실 오너 경영 방식이 기업 이윤에 도움이 될 것인지가 관건이다. 미국도 1960년대에 대규모 기업집단이 많았는데, 그룹으로 경영하다 보니 구조조정본부가 정보 경쟁에서 뒤처지고 개별 기업의 최고경영자와 구조본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등 비효율적인 것으로 드러나자 1980년대 들어 대다수가 그룹 분리로 나아갔다. 앞으로 우리 재벌기업들도 이처럼 경영 효율을 위해 해체로 나아가게 될지 모른다.
남북 분단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 사회가 갖춰야 할 사회적 기술이 있다면?
통합의 사회적 기술이 시급하다. 내가 유럽연합(EU) 통합을 새 책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쟁과 파괴를 피할 수 있는 모든 제도적 장치가 강구돼야 하는데, EU는 애초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로부터 시작됐다. 역사적으로 항상 유럽의 분쟁 지역이던 루르-자르의 대규모 철강 생산지를 공동 관리함으로써 전쟁을 피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단일시장으로, 유럽헌법에 기초한 경제정치의 통합으로 이어졌다. 내가 보기에 EU 통합은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엄청난 사회적 기술의 실험이다. 이는 자유무역협정(FTA)보다 훨씬 진화된 통합 기술이고, 사회적 기술의 종합 드라마다. 우리도 여기서 교훈을 얻어 남북 간 충돌이 잦은 지역을 평화 지역으로 공동 관리하는 사회적 기술을 모색해야 한다. 이것이 점차 확대되면서 자유 왕래가 이뤄지고 남북 통합에까지 진화할 수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로서, 지난 20여 년간 경실련이 외쳐온 경제정의 운동을 사회적 기술 형성이란 측면에서 어떻게 보는가?
1989년 출범한 이래 경실련이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제, 한국은행 독립, 기업지배구조 개선, 아파트값 공개 등을 요구하고 제도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제 공정성과 분배 문제 등에서 사회적 기술을 더 발전시키는 데 노력해야 한다.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생명 존중, 개인 자유, 신뢰 구축 등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기본적 가치는 오히려 후퇴했다. 내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신뢰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며, 신뢰 구축은 정의를 위해서도 중요한 가치다. ‘안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보다 못하고, 좋아한다는 것은 즐거워한다는 것만 못하다’는 얘기가 <논어>에 나온다. 즐겁게 사는 것이 가장 좋다는 말인데, 아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은 혼자서도 할 수 있으나 즐거움(樂)은 대상과 더불어 혼연일체가 될 때 가능하다. 신뢰 속에서 공동체를 이뤄 살아갈 때 즐거움을 누리며 살 수 있다. 
kye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