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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자서전을 쓸 수 있다
[박중언의 노후경제학]
[157호] 2023년 05월 01일 (월) 박중언 parkje@hani.co.kr

 

   
▲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에서 펴낸 구술생애사 책 표지들.


정년퇴직이 몇 달 남지 않은 중견기업 P부장은 얼마 전 안식휴가를 이용해 열흘 동안 80대 후반 노모와 같이 지냈다. 지방에서 여동생 가족과 함께 사는 노모에겐 자식 특히 맏아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인 듯하다. 깊게 뿌리박힌 유교 가치관 탓일 게다. 평소 노모를 돌보는 여동생은 심심찮게 “엄마가 오빠만 쳐다본다”며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요즘 들어 P부장에게 노모와 함께하는 시간의 의미가 이전보다 한결 커졌다. 나이 먹을수록 ‘인생이란 결국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늘어서다. 그는 집이나 근처 연못 공원에서 틈틈이 노모에게 살아온 내력을 묻고 컴퓨터로 간단하게 기록해둔다. 노모의 삶을 너무 모른다는 반성에서 시작한 소소한 일이다. 귀가 거의 들리지 않아 보청기를 낀 노모가 수시로 되풀이하는 한탄도 한몫했다.

한탄 레퍼토리
‘어릴 때 엄마 젖이 아니라 분유를 먹어 지금 면역력 부족으로 고생한다’는 푸념과 한국전쟁으로 어지러운 시기 중학교 과정을 마치지 못하게 한 할머니를 향한 원망이 주요 레퍼토리다. ‘당시는 중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얼마든지 초등학교 교사가 될 수 있었는데’라는 노모의 넋두리에는 덜 고달픈 삶을 살지 못한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다.
그는 아날로그 캠코더가 한참 유행하던 시절 아이들의 이모저모와 함께 엄마의 모습도 간간이 영상에 담은 적이 있다. 노모의 삶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당시 촬영만 하고 묵혀두었던 녹화 테이프를 디지털로 전환했다. 요즘은 노모가 사라져가는 기억을 더듬어 인생 이야기의 빈자리를 조금씩 채워갈 수 있도록 이것저것 묻는다.

구술생애사
적은 글이나 찍은 영상을 정리하는 과제는 미뤄놓았다. 지금은 메모, 사진, 음성, 영상 자료를 모으는 정도다. 스마트폰 덕분에 말을 듣고 기록하는 작업이 한결 수월해졌다. 자료를 파일 하나로 보관할 수 있는 것 또한 디지털 시대의 혜택이며,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노부모가 조각조각 펼친 지난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는다면 의미가 더 클 것이다. 그 기록이 구술생애사(자서전)다.
전문 글쟁이의 글솜씨가 없어도 어렵지 않게 노부모의 구술생애사를 정리할 수 있다. 많은 분량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참고할 만한 책이 여럿 출간됐다. 한국전쟁도 비껴간 깊은 산골에 사는 할머니들의 분투기를 담은 <할매의 탄생>(글항아리)이나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사실모)이 펴낸 <모든 삶은 경이롭다> 등 구술생애사 네 권이 대표적이다.
P부장이 참여하는 ‘어르신사랑연구모임’ 회원이기도 한 사실모 구술작가 P씨는 구술생애사의 일차 기능으로 가족의 여러 일화를 담은 공통 유산이라는 점을 꼽는다.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과 영상 그리고 이야기는 손자에게 어릴 때 시간을 같이 보낸 할머니의 기억을 되살리는 좋은 실마리다. 관계는 결국 공유한 시간의 양과 질에 따라 달라진다.
노부모가 지난 삶을 돌이켜보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예전에 느꼈던 감정, 가슴에 맺힌 한을 털어놓음으로써 심리 치유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기억을 끄집어내는 행위는 기억력 감퇴를 늦춘다. 노부모의 기억과 몸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시간날 때마다 이야기를 청해 들으면 자료가 풍성해진다. 개인의 삶을 관통한 굴곡진 한국 현대사도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P부장의 노모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제주도 출신인 80대 중반의 장인은 초등학생 시절 겪은 4·3 사태의 기억이 선명하다.
P부장은 노모와 나누는 대화에 더 의미를 둔다. “밥 묵었나?” “아(애)는?” “자자!” 부인에게 하는 세 마디로 풍자되는 전통적 경상도 남성의 무뚝뚝함이 모자 사이라고 다를 리 없다. 노모와는 이전에도 공통의 얘깃거리가 드물었고 몇십 년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았다. 노모가 보청기를 껴도 듣는 게 수월하지 않아 물리적으로도 대화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노모가 하고 싶은 옛이야기를 마음껏 풀어놓는 사이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따금 맞장구치는 것으로 대화는 충분하다.

노후일지
노부모의 삶을 기록하는 것은 나를 기록하기 위한 좋은 예습이다. 어린시절 일기 숙제도 개학 직전 몰아서 지어내 하던 P부장은 얼마 전부터 ‘퇴직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정년퇴직이 가시권에 들어와 퇴직 이후 쓸 노후일지를 염두에 두고 기록하는 버릇을 들이기 위한 것이다. 지금은 그날그날 일어난 일을 컴퓨터로 짧게 메모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갈수록 기억의 휘발 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에 최소한의 사실을 갈무리해두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기 기억조차 믿기 어렵다. 인간은 자기합리화에 능숙하고 무의식 속에서 기억이 쉽게 유리한 쪽으로 왜곡된다.
내 컴퓨터에 쓰는 것은 페이스북 글쓰기보다 부담이 훨씬 적다. 굳이 꾸밀 이유가 없고, ‘좋아요’에 목매느라 시간과 감정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지금 남긴 메모, 사진, 영상이 지난 삶을 돌아보는 어느 날 진정한 빛을 낼 것이다.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나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같은 역사적 가치가 없어도 나한테는 충분한 의미를 갖는 소중한 자료다. 인간은 누구나 그 자신이 온 우주이므로.
기록하는 행위는 한 일을 더듬고 표현할 말을 찾아야 하므로 불가피하게 생각을 동반한다. 생각은 할수록 깊이가 깊어지고 폭이 넓어진다. 세월과 더불어 익어가고 발효된다. 사고의 확장과 맞물려 짧은 메모가 긴 문장으로, 사실의 조각에서 생각, 의견, 느낌, 마음챙김을 담은 글로 천천히 발전해간다. 그것이 기록하는, 나아가 글을 쓰는 행위가 주는 성찰과 성장, 치유의 효과다. 꾸준히 기록하다보면 글쓰기 근육도 붙는다. 창작이 아닌 기록을 위한 글쓰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점을 깨닫는다. 문화센터 등 가성비 높은 글쓰기 강좌를 들으면 글의 줄기를 잡고 가지를 쳐내며 디테일을 살리는 기술을 빨리 익힐 수 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어느 날 완성 단계에 이른 자서전 초고를 발견할지 모른다. 한 번에 삼사십 개가 고작이던 P부장의 제기차기 기록이 어느덧 500개를 넘긴 것처럼.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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