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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플렉스 대기업, 충무로와 손잡은 이유
[CULTURE & BIZ]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재편
[153호] 2023년 01월 01일 (일) 김윤지 yzkim@koreaexim.go.kr

김윤지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 2018년 7월 20주년을 맞아 ‘힐링’을 주제로 재개관한 CGV강변. CGV강변은 CJ엔터테인먼트가 외국 기업과 합작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멀티플렉스 극장이다. 연합뉴스

2000년대 들어 영화와 케이(K)팝을 비롯한 한국 대중문화는 본격적인 ‘산업화’의 틀을 갖춰나갔다. 특히 급격한 변화를 보인 분야 중 하나가 영화계였다. 1988년부터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직접 배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1993년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충무로 자본의 변동이 일어나면서 삼성·대우·SKC 같은 대기업들이 영상산업에 진출했다. 하지만 이들은 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로 시작된 구조조정으로 일제히 영상산업에서 철수했다. 이후 시장에는 대기업과 호흡을 맞추던 영화 제작 사와 기획사가 남았고, 영화 제작의 새로운 자금원이 될 벤처투자자가 진입했다.
충무로 제작사·기획사에는 이때가 기회로 보였다. 이들은 영화산업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업계를 좌지우지하는 대기업이 못마땅했다. 특히 IMF 외환위기 때처럼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쉽게 자본을 빼갈 수 있다는 점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들은 이 기회에 대기업 자본에 종속돼 불안정하던 영화 제작 환경을 개선하고 싶었다. 새로운 배급망과 투자 시스템을 도입해 안정적인 한국 영화 제작 구조를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새로 시장에 진입한 벤처투자자도 영화산업 경험이 부족한 터라 충무로에 오래 있었던 이들이 주도권을 쥐고 새판을 짤 기회였다.

코스닥 열풍
이런 배경으로 충무로에선 다양한 합종연횡이 펼쳐졌다. 대표 제작사들은 자금조달과 제작, 배급 등을 함께 하는 협의체를 구성했다. 강우석프로덕션에서 발전한 시네마서비스는 투자·배급사로 확장해 규모를 키워나갔다. 명필름, 강제규필름, 우노필름, 시네마서비스 등 흥행성 높은 영화를 만든 실력 있는 제작사들은 벤처투자사와 짝지어 영화전문투자펀드를 결성했다. 금융권 투자자는 충무로의 경험이 필요했고, 충무로 제작사는 안정적으로 영화에 투자할 자본을 확보하기 원했다. 이들의 만남은 자연스러웠다.
새로운 세기에 나타난 두 흐름, 한국 영화의 수준 향상과 코스닥 열풍이라는 거대한 바람 덕분에 충무로와 벤처투자자의 결합은 가속됐다. 1999년 영화 <쉬리>가 전국 관객 582만 명을 동원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한국 영화 관객 수는 1998년에 견줘 2배 이상 늘었다. 1990년대 내내 외화에 밀려 10% 수준이던 한국 영화의 시장점유율이 40%에 이르러 한국 영화의 수익성이 새롭게 조명받았다.
당시는 코스닥 열기가 엄청나 단순한 아이디어 하나로 어마어마한 자금을 모으는 회사가 날마다 신문을 장식했다. 호시탐탐 투자 대상을 찾던 벤처투자자에게 흥행력이 커지는 한국 영화는 좋은 ‘재료’였다. 벤처투자자는 똘똘한 충무로 제작사를 골라 투자하거나 합병을 유도해 코스닥으로 인도했다. 강제규필름은 브랜드 가치 2천억원을 평가받으며 KTB네트워크에서 투자받았다. 우노필름(이후 싸이더스)은 시네마서비스와 함께 로커스홀딩스에 인수돼 코스닥에 진입했다.
충무로 제작사와 벤처투자자의 짝짓기 행렬이 이어지던 때, 조금 다른 성격의 회사도 나타났다. IMF로 영상산업에서 퇴각한 대기업들과는 결이 다른 대기업이었다. CJ엔터테인먼트가 대표적이다. 식품업에서 출발한 대기업 CJ엔터테인먼트는 제일제당이 1995년 스티븐 스필버그 등이 설립한 드림웍스SKG에 투자하면서 탄생한 회사였다. 1998년 4월에는 외국기업과 합작한 제일골든빌리지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멀티플렉스 극장 ‘CGV강변11’ 등을 세웠다. CJ엔터테인먼트는 영화산업의 투자, 배급, 상영 등을 수직통합했다.
당시 CJ엔터테인먼트는 당분간 영화 투자와 배급에서 수익을 내지 못할 것이란 전망을 공유하면서도 일단 사업을 더 밀어붙이기로 결정한 터였다. 영상산업에서는 크게 영상물 투자→ 제작→ 배급→ 상영 차례로 가치가 창출된다. CJ엔터테인먼트는 멀티플렉스 덕에 상영 쪽에선 가능성을 확인했지만 투자와 제작에서는 실패를 거듭했다. 그럼에도 극장 수입과 배급에서 수익을 내어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처럼 효율화된 방식으로 영화를 계속 생산한다면 수직통합의 과실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림웍스SKG에 어렵게 투자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부족한 제작·배급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명필름과도 손잡았다.

   
▲ 2022년 7월 서울 송파구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에서 열린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시사간담회에 참석한 김한민 감독(가운데)과 주연배우 변요한(왼쪽), 박해일. 롯데그룹도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중심으로 영화산업에 진입했다. 연합뉴스

재벌그룹의 2차 진입
비슷한 시기 동양그룹도 영화 투자와 배급에 진출하며 엔터테인먼트사업을 확장했다. 제일제당처럼 식품기업에서 출발한 동양은 제과산업의 성장 정체를 극복하기 위해 1994년 오리온카툰네트워크를 설립해 케이블방송사업에 진출했다. 이후 바둑TV, OCN, 캐치온 등을 인수해 케이블채널을 늘렸다. 1999년에는 미디어플렉스를 세워 극장사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2000년 우리나라의 두 번째 멀티플렉스 영화관인 서울 삼성동 메가박스 코엑스점을 개관했다. 마침내 2002년에는 영화 투자·수입·배급을 맡는 쇼박스를 세워 영화산업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한 종합 엔터테인먼트 그룹으로 도약했다.
동양이 극장사업에 진출한 데는 운도 작용했다. 영상산업에 진출한 대우그룹은 IMF 외환위기로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이때 대우가 내놓은 매각 자산 가운데 하나가 케이블 영화채널인 DCN이었다. 케이블채널을 늘리던 동양은 대우와 DCN 인수 협상에 들어갔다. 자금 사정이 어려웠던 대우는 DCN뿐 아니라 서울 강남의 씨네하우스 극장과 삼성동 아셈컨벤션센터에 짓던 멀티플렉스 17개관까지 동시에 인수할 것을 요구했다.
영화관사업을 생각하지 못한 동양에 대우의 제안은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준비된 인수 작업이 아닌 터라 자금이 부족했다. 영화관 인수를 위해 동양은 세계 최대 영화관 체인인 미국 LCE에서 2100만달러(약 250억원)를 유치해 합작투자를 설립했다. LCE한테서 자금뿐 아니라 극장 운영 노하우도 전수해 영화관사업의 리스크도 낮출 수 있었다. 이렇게 문을 연 극장이 동양 최대 규모의 멀티플렉스인 메가박스 코엑스점이다.
롯데그룹도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중심으로 영화산업에 진입했다. 1999년 9월 롯데쇼핑의 시네마사업본부는 경기도 롯데백화점 일산점에 롯데시네마를 개관하면서 극장사업을 시작했다. 2003년부터 영화 투자·배급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했고, 2005년 롯데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해 영화산업을 본격화했다. 롯데는 멀티플렉스인 롯데시네마 전국 체인을 빠르게 늘려 업계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들은 1990년대 중반 1차로 영상산업에 진입한 대기업들과 달리 IMF 외환위기 이후 영화산업에 뛰어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로 텔레비전(TV), 비디오 등을 생산하는 전자산업을 기반으로 한 1차 진입 대기업들은 영상기기를 활용하기 위한 소프트웨어인 영상물에 관심을 가졌다. 반면 식품·유통업에서 출발한 2차 진입 대기업들은 기존 사업의 성장 정체를 타개할 새로운 분야로 엔터테인먼트에 주목했다. 소비재 판매 기업으로서 비슷한 고객 기반을 확장할 영역으로 엔터테인먼트산업을 바라본 것이다.

충무로와 연대
이들은 영상산업 경험이 부족했지만 국외 자본 유치나 투자 과정에서 노하우를 전수하는 형태로 리스크를 줄였다. 과거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신산업에 진출할 때마다 자주 택한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서구의 앞선 엔터테인먼트산업 운영법을 압축적으로 배워 체화했다. 그런 한편 충무로 제작자와 연대하거나 제휴해 영화산업 이해도를 높여나갔다.
특정 산업 분야에 뛰어든 대기업은 으레 기존 사업자들을 완전히 몰아냈다. 하지만 영화산업에 진입한 대기업은 소프트웨어 능력을 갖춘 작은 제작자와 기획자의 손을 끝까지 잡아야 했다. 영화 제작이라는 소프트웨어 능력은 대기업이 자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재화이자 핵심 기술이고, 숙련노동의 집약체이며, 창의성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세 대기업(CJ엔터테인먼트·동양그룹·롯데그룹)은 당시 도시의 성장 과정에서 확산되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상영 분야에서 안정적 수익을 내며 산업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해갔다. 1차 진입 대기업들이 수익 기반이 불안정해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빠르게 퇴각한 것과 달랐다. 극장사업이라는 든든한 캐시카우(현금창출원)를 쥐어 이들보다 영화산업에 더 깊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 깊게 내린 뿌리는 더 넓게 퍼져나갔다. 수직계열화한 이 세 기업 중심으로 한국 영화산업은 재편됐다. 한국 영화의 수요와 공급도 늘어나 산업화가 완성돼갔다.

* 김윤지 연구원은 한겨레신문사에서 발행한 경제주간지 <Dot21> <Economy21>에서 산업부·경제부 기자를 했고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한국 중소기업의 대기업 종속성과 관련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에서 정보기술(IT) 산업, 문화콘텐츠 산업, 중소기업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연재를 통해 문화산업을 경제학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 접근해갈 계획이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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