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스 헤킹 Claus Hecking <슈피겔> 기자

▲ 2021년 11월15일 런던에 있는 영국 최대 도매 육류 시장인 스미스필드시장의 정육점. 급격한 물가인상 등으로 고기를 사지 못하는 시민이 늘고 있다. REUTERS

영국 런던의 정육점 ‘P.J. 프랭클랜드앤드손’ 냉장실에는 묵직한 소고기 덩어리가 걸려 있다. 에어컨이 귀중한 상품에 끊임없이 찬 공기를 불어넣는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가득하다. 평상시라면 이 냉장실은 마틴 프랭클랜드의 보물창고지만 지금은 에너지 먹는 하마다.
좋은 부위를 여기에서 0~2℃ 온도로 3주간 숙성해야 한다. 그런 다음 짧은 머리, 반바지 차림에 손등에는 문신을 새긴 다부진 체격의 40대 후반 프랭클랜드가 일을 시작한다. 칼을 간 뒤 고깃덩어리를 티본(T-bone), 등심, 살코기 스테이크 등으로 자른다. 31년 전 아버지와 함께 정육점을 연 이래 그는 줄곧 이렇게 해왔다.
가족기업은 30여 년간 수많은 위기를 넘겼다. 광우병, 구제역, 경기침체, 코로나19 대유행…. 하지만 “이번 위기는 더 힘들고 오래갈 것”이라고 프랭클랜드는 말했다. 그는 이미 느끼고 있다. 예전엔 2400파운드(약 380만원)였던 1년 전기요금이 지금은 거의 5천파운드로 올랐다. 전기 대부분을 냉장실에서 쓴다. 그가 매입하는 육류 가격도 연초보다 평균 30% 상승했다. 이전에는 평일 약 150명이 방문했지만 지금은 60명밖에 되지 않는다. 아직은 버틸 수 있다.
프랭클랜드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은 상대적으로 요금이 저렴한 편인 그가 계약한 전기 할인 업체가 다른 10여 곳처럼 파산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전기 공급 회사를 찾아야 하고 에너지 비용은 몇 배로 늘어날 것이다. “그러면 우리 사업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영국의 많은 소규모 자영업자가 현재 프랭클랜드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 에너지 요금은 몇 배로 뛰고, 구매 비용은 증가하고, 매출은 급감하고 있다. 대부분의 영국인이 암울한 미래에 대비해 돈을 쓰지 않고 모으기 때문이다.

▲ 경기침체는 혼수 시장에도 몰아닥쳤다. 웨딩드레스를 살 돈이 없어 대여하려는 신부가 늘고 있다. 영국 북아일랜드 런던데리에 있는 웨딩드레스 가게의 쇼윈도에 웨딩드레스가 전시돼 있다. REUTERS

자영업자 아우성
2022년 9월 영국을 여행한 사람이라면 독일 상황이 나쁘게 흘러갈 경우 직면할 현실이 어떠할지 알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에서 제목을 붙인 것처럼 유럽 전역을 휩쓰는 ‘에너지 폭풍’이 도버해협 너머보다 영국에서 이미 더 많은 가시적 피해를 줬다. 영국인 수십만 명이 전기·가스 요금을 내지 못할 상황에 처했다. 익명의 주최자가 개최한 ‘지급거부운동’(Don’t Pay)에 수만 명(2022년 11월7일 현재 25만5천 명)이 참여했다. 수백만 명이 겨울에 추위에 떨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수치는 끔찍하다. 서구의 주요 7개국(G7) 중 어느 나라보다 더 나쁘다. 영국 경제는 이미 위축됐다. 영국 중앙은행은 경제가 장기적으로 침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물가상승률이 10% 이상 치솟았고,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2023년 최대 20%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심지어 보수매체 <데일리텔레그래프>마저 ‘망가진 영국’(Broken Britain)이라고 말한다.
독일 학술정치재단(Stiftung Wis
senschaft und Politik)의 영국 전문가 니콜라이 폰 온다르차는 “영국의 경제 상황이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다. 아주, 아주 힘든 겨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보다 훨씬 더 어렵다.
영국은 에너지 위기 외에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여파를 감당해야 한다. 동유럽 노동자가 무리 지어 그 섬을 떠났기 때문에 많은 경제부문에서 인력이 부족하다. 게다가 새로운 관료적 규제와 더 복잡한 통제로 식품이나 화학제품의 수입 비용이 증가했다고 온다르차는 지적했다.
마틴 프랭클랜드도 브렉시트로 고통받고 있다. 그의 나라가 관세동맹과 단일시장(EU)에서 떠난 직후 수입육류 가격이 인상됐다. 예를 들어 프랑스산 오리 가슴살 가격이 ㎏당 7.95파운드(약 1만2천원)에서 갑자기 10파운드로 올랐다. 지금은 심지어 13.60파운드다. “마진을 대폭 줄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가격이 너무 높아 우리 손님들은 아무도 구매하지 못할 것이다.” 원가상승률을 생각하면 소매가격을 75% 올려야 하지만 그는 20%만 올렸다. 그럼에도 매출이 줄었다.
늦은 오전에 목회자 셔츠를 입은 한 남성이 가게에 들어왔다.
“오리 가슴살은 얼마예요?” 그는 600g 포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9.99파운드입니다, 손님.”
“고맙습니다. 토요일에 다시 올게요.”
목사가 떠나자 프랭클랜드가 말했다. “저 손님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오리 가슴살을 마지막으로 샀을 때가 지난번 크리스마스다. 그때는 한 팩당 7파운드였다.” 특히 중산층 소비자가 육류 소비를 줄이고 있다. 가게를 방문하는 횟수가 적어지고 더 저렴한 상품을 산다.
50대 중반인 린다 퀘일도 경기침체를 실감한다. 런던 남부에 있는 퀘일의 작은 웨딩드레스 가게에는 샤넬 No.5 향기가 감돈다. 앞쪽 쇼룸에 웨딩드레스 10여 벌이 스팽글(반짝거리는 얇은 장식 조각)에 스포트라이트가 반사돼 반짝거린다. 하지만 최근 퀘일은 전시 상품과 B급 상품이 있는 뒷방으로 고객을 안내하는 일이 많아졌다. 많은 여성이 더 이상 최신 고급 모델을 살 수 없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신부들은 보통 드레스 구매에 2천파운드의 예산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1200파운드를 넘는 경우가 드물다.” 300~400파운드 드레스를 찾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이렇게 적은 돈으로는 뒷방에서조차 적당한 것을 찾기 힘들다. 가게에 와서 우는 사람을 많이 봤다고 퀘일은 말했다.
사실 퀘일은 드레스 판매 가격을 올려야 한다. 제조업체에서 구매하는 비용이 늘었고, 에너지 비용은 3배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판매 가격을 올리면 누가 오겠는가? 대신 퀘일은 사업모델 전환을 고려하고 있다. “최근 방문한 고객 20명 중 8명이 드레스 대여도 하느냐고 물었다. 어쩌면 이것이 불황을 극복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 영국은 북해 유전이 거의 고갈돼 이제 더는 산유국이라 말하기 어려운 정도다. 스코틀랜드 애버딘에서 동쪽으로 약 160㎞ 떨어진 북해의 비피(BP) 유전. REUTERS

‘퓨얼 파버티’라는 유행어
에너지 위기가 영국에 이렇게 큰 타격을 준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수도 있다. 영국은 북해에 엄청난 양의 천연가스와 석유 매장량이 있지 않은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영국은 유럽 최대 천연가스 생산국이 아니었는가?
그랬다. 그 뒤 생산량이 70% 줄었다. 많은 대형 유전이 대부분 고갈됐고, 일부는 이미 폐쇄됐다. 새 유전을 개발하려면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든다. 국가의 에너지 공급을 값싸고 수시로 사용하는 국내 연료에 의존하면서 생산량 감소에는 거의 대응하지 않았다. 그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다. 오늘날 영국은 가스의 절반 이상을 수입해야 한다. 2021년까지 영국에서 사용하는 전력의 40% 이상을 가스화력발전소에서 생산했다. 독일은 13%였다.
영국은 비축분이 거의 없다. 이것이 영국을 특히 취약하게 만들었다. 영국의 저장량은 독일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가장 큰 저장고는 가스 가격이 낮았던 2017년 테레사 메이 정부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폐쇄했다.
‘퓨얼 파버티’(Fuel Poverty), 에너지 빈곤은 영국에서 유행어가 됐다. 영국의 에너지 규제 기관 오프젬(Ofgem)이 일반 가정에 대한 에너지 요금 상한선을 대폭 올릴 것이라고 몇 차례 발표한 뒤 여론은 더욱 악화했다. (표준소비량으로 설정한) 연간 2900㎾h 전기와 1만2천㎾h 천연가스 소비는 그리 많지 않은 양이다. 이 정도 소비량에 대해 일반 가정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업체는 2022년 4월부터 최대 1971파운드까지 요구할 수 있다. 2021년 가을보다 약 700파운드 더 많은 금액이다. 오프젬은 10월1일부터 이 요금 상한선을 3549파운드(약 560만원)로 올린다고 (8월에) 발표했다.
여론조사기관 오피니엄(Opinium)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답한 영국인 중 45%가 10월1일부터 인상되는 요금을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응답자의 20% 정도가 돈이 없어 식사를 거르고 있다.
이 재앙에 직면해 보리스 존슨은 총리로서 마지막 모습을 드러냈을 때 국민에게 (에너지 절약형) 새 주전자를 사라고 요청해 조롱받았다. “(주전자 구매에) 20파운드를 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매년 전기요금을 10파운드 줄여준다”고 존슨은 말했다.
후임 영국 총리이던 리즈 트러스는 먼저 피, 땀, 눈물의 레토릭을 퍼뜨렸다. “폭풍이 아무리 거셀지라도 영국인은 더욱 강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고 발언한 뒤, 9월8일 전기와 가스의 가격 상한선을 3549파운드로 올리지 않고 2500파운드로 동결하겠다고 발표했다. 차액은 국가가 낸다.
비용이 많이 들고 효과가 의심스러운 정책이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1300억~1500억파운드의 세금이 투입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정부의 개입은 경제적·환경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상관없이 모든 가정이 지원받는다.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되는 에너지 가격은 사람들이 에너지를 덜 절약하게 한다.

저소득층, 난방 없는 겨울
레이먼드 배런울퍼드 같은 사람들은 아직 사회통합에 노력하고 있다. 수염과 빛나는 눈을 가진 60대 중반의 건장한 남자는 영국 최대의 민간 푸드뱅크 위케어(We Care)를 운영한다. 그 자신도 노숙인으로 거리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나중에 그는 시민 활동가이자 부동산 사업가가 됐다. 오늘날 배런울퍼드와 그의 직원들은 런던 남동부 루이셤구에서 매일 약 100가구에 식료품을 공급한다. 빵, 파스타, 채소. 결연한 슈퍼마켓에서 팔고 남은 것이다. 위케어는 데우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준비한다.
이런 활동을 더는 지속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배런울퍼드는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문을 닫게 될 것”이라면서 “이 위기는 우리에게 광범위한 타격을 준다”고 말했다. 푸드뱅크와 단체에서 운영하는 자선 가게에 쓰이는 전기와 가스 요금이 매달 68파운드에서 498파운드로 올랐다. “우리와 계약한 전기회사는 앞으로 1년에 최대 3만파운드를 내야 한다고 통보했다.”
동시에 푸드뱅크 자금을 지원하는 가게의 매출은 절반으로 떨어졌다. 결연 슈퍼마켓에서도 예전만큼 많은 제품을 보내지 않는다. 매출이 줄어 상품을 많이 구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런울퍼드는 푸드뱅크가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없는 상황을 우려한다. 그는 현재 크라우드펀딩으로 2만5천파운드(약 4천만원)를 모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세라 잭슨(32·가명) 같은 사람들에게는 배런울퍼드의 도움이 필요하다. 싱글맘인 잭슨은 방금 일주일치 식료품을 받아왔다. 파스타, 뮤즐리(곡물, 견과류, 말린 과일 등을 섞은 것), 생선통조림, 파프리카, 자두. 잭슨과 두 아이, 그리고 중병에 걸린 어머니를 위한 것이다.
잭슨은 가족을 돌봐야 해서 더는 청소부로 일하지 못하고 약 900파운드의 생계보조금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스·전기 공급업체의 통보는 그에게 큰 충격을 줬다. 공급업체는 기존에 내던 한 달 98파운드 대신 235파운드를 요구했다. 독일의 ‘하르츠Ⅳ’(실직에 따른 일종의 기초생활보장제도)와 달리, 영국 정부는 일반적으로 난방비를 지원하지 않는다.
“에너지 가격이 왜 이렇게 비싸졌는지 모르겠다.” 잭슨은 뉴스도 신문도 보지 않는다. 그는 이제 가족을 위해 두꺼운 스웨터, 장갑, 다운재킷을 구하려 한다. 그의 계획은 다가오는 겨울에 난방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다.

ⓒ Der Spiegel 2022년 제37호
Broken Britain
번역 황수경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