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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회 전면 개혁 천명, 개헌 맞물려 ‘절호의 기회’
[GLOBAL ] 칠레 좌파 정부의 집권
[144호] 2022년 04월 01일 (금) 오드 마르탱 economyinsight@hani.co.kr

오드 마르탱 Aude Martin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 기자

   
▲ 2022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시민들이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의 문화 행사 참석을 기다리고 있다. 한 어린이가 든 손팻말에 “나의 대통령 보리치, 긍정적 에너지를 안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고 적혀 있다. REUTERS

최악은 면했다. 2021년 12월 중순 칠레 대통령선거 결선에서 극우 성향의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와 좌파 후보 가브리엘 보리치가 맞붙었다. 결과는 1차 투표에서 카스트에게 뒤졌던 보리치의 승리로 끝났다(득표율 55% 대 44%). 우파 성향의 현직 대통령 세바스티안 피녜라는 2022년 3월11일 두 번째 임기(2018~2022년)를 마치고 35살 젊은 대통령 당선자에게 자리를 내줬다. 피녜라는 첫 임기(2010~2014년)를 마친 뒤 치른 대선에서 사회당 후보인 미첼 바첼레트에게 패배해 연임에 실패한 바 있다.
비싼 등록금에 반대하며 2010년대 초 학생운동을 이끈 보리치는 공산당을 포함한 거대 좌파연합(‘존엄성을 지지한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당선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정권(1973~1990년)이 물러난 뒤 20년 동안 칠레를 이끈 중도좌파연합 콘세르타시온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서슴없이 드러내온 인물이다.
보리치 대통령의 포부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더 큰 사회정의를 보장하되 재정 측면에서 신중하게 행동하겠다.” 당선이 확정되고 산티아고 연설에서 한 말이다. 신자유주의 요람이자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불평등이 극심한 나라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칠레에서 밝힌 당찬 포부다. 보리치가 첫 개혁 대상으로 지목한 것은 연금제도다. 민간자본처럼 운용되는 현행 연금을 소득재분배 원칙을 적용한 공적연금으로 서서히 바꾸는 것이 그의 목표다.

연금·의료보험·최저임금
다른 개혁 대상은 의료보험이다. 현행 의료보험은 부자들을 위한 민영보험과 재정 부족에 시달리는 공영보험으로 나뉘었다. 분쟁·사회통합연구소(COES)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는 에마뉘엘 바로제 칠레대학 교수(사회학)는 “노동 관련 공약을 지키기 위해 보리치가 임기 말까지 최저임금을 지금보다 30% 인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재 칠레 최저임금은 월 355유로(약 48만원) 수준이다.
보리치는 부자 증세를 뼈대로 한 조세개혁으로 그가 공약한 복지 확대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려 한다. 남아메리카 전문가인 크리스토프 방튀라 국제관계전략연구소장은 “4년간 칠레 국내총생산(GDP)의 5%에 해당하는 부유세를 걷어 복지예산을 충당하는 것이 보리치의 목표”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보리치는 재산세를 신설하고 소득 상위 1.5%를 대상으로 소득세를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칠레 GDP에서 칠레 국민이 내는 소득세의 비율은 2%밖에 되지 않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8%다. 칠레 정부의 전체 세입(부가가치세가 주를 이룬다)은 GDP의 20%로 OECD 평균(33%)에 한참 못 미친다. 이는 칠레 정부의 소득재분배 노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계획은 대담하다. 문제는 보리치가 공약을 실천하려 해도 그의 손이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데 있다. 대통령선거와 같은 날 치른 하원의원 선거에서 과반 의석을 얻지 못한데다 상원에서도 지지 세력의 의석수가 부족하다. 약속한 공약을 지키려면 사회당 지지가 필요한데 중도좌파인 사회당은 새 대통령의 열의를 억누르려 할 것이다. 일단 보리치는 공산당과 사회당의 인물로 반반씩 구성한 내각을 발표하며 대비에 나섰다. 정부 총무장관과 재무장관으로 카밀라 바예호 전 하원의원(공산당)과 마리오 마르셀 현 중앙은행 총재를 각각 지명했다. 장관 지명자 24명 가운데 14명이 여성이라는 점이 이례적이다.

   
▲ 2022년 3월14일 칠레 산티아고 대통령 관저 모데나 궁전에서 좌파 성향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이 외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REUTERS

코로나19 충격
보리치의 통합 정부는 칠레를 사회경제적 위기에서 구할 수 있을까. 에마뉘엘 바로제 교수는 말했다. “2019년 가을 칠레 국민이 사회정의를 요구하며 벌인 대규모 시위는 폭력적으로 진압됐다. 코로나19로 시위는 완전히 끝이 났고, 칠레 국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불만을 해소하지 못한 칠레 국민이 여전히 많다.”
빈곤율이 2017년 8.6%에서 2020년 10.8%로 뛰었다. 해묵은 문제인 불평등 역시 같은 기간 더 심해졌다. 2021년 칠레 경제성장률이 12%를 기록해 코로나19가 칠레 경제에 남긴 여파가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개개인의 불안정한 삶은 거시지표로 잡히지 않는다. 칠레 국민은 감염병 재난 극복을 위한 정부 지원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2020년 7월과 12월, 2021년 4월 세 차례 연금에서 돈을 뽑아 쓸 수 있게 허락한 것이 정부가 국민에게 제시한 유일한 지원책이었다. 국민이 부분 수령한 연금 500억달러(약 62조원)는 대부분 가계 빚을 갚는 데 쓰였다.
500억달러면 칠레 GDP의 20%에 이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칠레 정부가 형편이 어려운 국민을 돕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유엔은 남아메리카 국가의 불평등에 관한 보고서에서 “칠레 정부의 연금 부분 수령 허가는 코로나19 충격을 어느 정도 완화했다. 하지만 칠레 사회보장제가 앞으로 그 위험을 부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금에서 꺼내 쓴 만큼 칠레 국민의 노후는 불안해졌다. IMF는 이번 조치로 그렇지 않아도 낮은 연금 소득대체율이 평균 3%포인트(40%에서 37%로) 떨어졌다고 전했다. 그 충격은 “연금을 다시 모을 시간이 없는 노인 세대”가 더 크게 받을 것이다.

국가적 자원 관리
그나마 칠레 경제에 좋은 소식은 코로나19가 터진 직후 구리 가격이 올랐다는 것이다. 칠레는 세계에서 구리를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다. 구리 1톤(t)당 평균 가격은 2020년보다 50% 상승해 2021년 9300달러(약 1150만원)를 넘었다. 칠레는 리튬 매장량도 풍부하다. 리튬은 전기차 배터리 생산에 쓰이는 등 최근 세계경제 탈탄소화의 필수 자원으로 주목받는 광물이다.
보리치는 아타카마사막에서 나는 하얀 금덩이인 리튬을 지속가능하게 관리하겠다고 약속했다. “리튬 관리를 국영기업에 맡기고 새 국가 산업으로 키우겠다.” 나라에서 나는 광물로 얻은 이익은 채굴권을 가진 몇몇 기업이 아닌 모두에게 돌아가게 하겠다는 것이다. “채굴 활동을 하는 기업에 이용료를 내게 할 것이다. 구리에서 올린 수익을 상당 부분 회수하는 것이 목표다.”
칠레 경제의 채굴 산업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기후위기 대응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새 정부는 이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바로제 교수는 말했다. “오늘날 칠레에서 돈이 되는 경제활동은 지구환경에 해롭다. 물론 몇 년 만에 한 나라의 생산 기반을 바꾸기 어렵다. 새 정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채굴·벌목·농업 활동이 환경에 끼치는 나쁜 영향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새 칠레 대통령이 지목한 또 다른 환경 의제는 수자원 관리다. 칠레 콘셉시온대학과 프랑스 몽펠리에대학에 소속된 세 연구원은 공동집필한 보고서에서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칠레에서도 물은 공공재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의 일부 주는 수자원 관리를 ‘수자원권’을 가진 이들의 손에 맡기고 정부 당국의 개입을 최소한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리치는 “지금의 물 부족 문제는 수자원 관리 탓이 크다”고 주장했다. “칠레의 수자원 관리 체제는 독재정권 때 시장 논리에 따라 만들어졌다. 정부가 필수 자원인 물을 소비 목적에 따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단이 빠져 있다.”

   
 

헌법 개정
수자원 관리 체제 개편은 다른 여러 의제와 함께 제헌의회 논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2021년 7월 출범한 칠레 제헌의회는 늦어도 2022년 여름까지 새 헌법안을 발표해야 한다. 제헌의회 헌법안은 그 뒤 국민투표에 부쳐진다. 새 헌법 제정은 2019년 가을 벌어진 대규모 시위에서 칠레 국민이 외친 구호였다. 칠레 하원은 ‘사회 평화와 새 헌법 제정을 위한 협의안’을 채택해 개헌 요구에 응답했다. 현행 칠레 헌법은 1980년 피노체트 독재정권 시절에 제정돼, 칠레 정치와 경제 체제의 개혁을 막는 장애물로 여겨진다.
카롤리나 세르다구스만 프랑스 보르도대학 교수(공법)는 “현행 칠레 헌법이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명시하거나 정부의 사회정책을 금지하지 않지만, 장애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며 “장애물은 행간을 읽어야 보인다”고 말했다. 칠레 국민의 기본권을 나열한 헌법 제19조가 대표적 예다. “이 조항에는 정부를 포함해 누구나 경제활동을 할 권리가 있다고 돼 있다. 정부도 보통법을 적용하는 개인으로 규정한 것이다. 칠레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려고 할 때마다 불공정 경쟁과 기존 기업에 대한 권리침해로 처벌받을 수 있다. 의료·에너지 등 핵심 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방튀라 소장은 “제헌의회는 사회운동가, 서민, 전통 좌파 출신이 대다수인 연합체”라며 “그런 제헌의회가 제안하는 헌법안은 새 칠레 대통령이 바라는 것과 분명 비슷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제 국민투표 결과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2021년 대선에서도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 칠레 국민이 현행 헌법을 유지하겠다고 하면 보리치는 공약을 실천하기 어려워진다. 개헌과 새 대통령의 집권이라는 중요한 변화를 동시에 맞은 칠레는 지금 모험적인 항해를 하고 있다. 어떤 희망을 품어도 좋다. 하지만 바람은 언제든 방향을 틀 수 있다. 새로 키를 잡을 선장과 선원들에게 유리하게 혹은 불리하게.

ⓒ Alternatives Economiques 2022년 3월호(제421호)
Les défis d’une politique de gauche au Chili
번역 최혜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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