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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흥망’ 어디서 갈렸나
[In-depth]
[11호] 2011년 03월 01일 (화) 최정표 economyinsight@hani.co.kr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재벌은 한국 경제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 1997년의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30대 재벌은 자산과 매출액 중 어느 변수를 기준으로 하든 한국 경제에서 50% 비중을 차지했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그 비중이 다소 줄어들었으나, 위기 수습 뒤에 다시 상승하는 추세를 보인다. 재벌이 한국 경제에서 수행하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반 분야에서의 역할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질적 측면에서의 비중은 이를 훨씬 초과한다. 30대 재벌의 각 행위는 국민 생활의 거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재벌의 흥망은 국가 및 국민 생활과 직결된 문제다. 재벌이 망하면 국가 경제 전체가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재벌은 그동안 흥한 재벌도 있었고, 망한 재벌도 있었다. 성공적으로 재벌 서열에 올라서서 계속 그 순위를 앞당기면서 승승장구한 재벌이 있었는가 하면, ‘설마 그 재벌이’ 할 정도로 탄탄했던 곳이 하루아침에 해체의 길로 들어선 재벌도 있었다. 왜 어떤 재벌은 흥하고, 어떤 재벌은 망하는지 그 원인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재벌에 따라 각기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재벌 흥망의 원인을 간단하게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1980년 30대 재벌의 흥망성쇠 양상은 <표1>과 같다. 재벌의 흥망은 크게 3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흥한 재벌이고, 둘째는 망한 재벌이고, 셋째는 이도저도 아닌 재벌이다. 1980년 ‘30대 재벌’ 명단에 올랐던 재벌들을 이 범주로 나눠보면 흥한 재벌로는 삼성(3→1), SK(4→4), 한화(11→7), 롯데(13→6), 금호아시아나(15→8), 두산(18→12), 동양(25→25), 태광(29→23), 동부(30→14) 등 9개를 꼽을 수 있다. 망한 재벌은 대우, 쌍용, 국제, 동아건설, 삼미, 한일합섬, 기아, 한양, 해태, 대농 등 10개다. 이 재벌들은 그룹이 해체되면서 경영권이 넘어가버렸다. 더 이상 재벌 면모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망하지 않았지만 흥했다고도 볼 수 없고, 흥하지 않았지만 망했다고 볼 수도 없는 재벌이 나머지 11개 재벌이다. 이 중 7개 재벌은 2007년에도 30대 재벌 명단에 들어 있긴 하지만 순위가 밀려버렸고, 4개 재벌은 아예 30대 재벌 밖으로 밀려나버렸다.

27년 사이 30대 재벌 중 10개 망해
27년 사이에 흥한 재벌 9개, 망한 재벌 10개이니 이 기간의 흥망 확률은 각기 2분의 1이라고 볼 수 있다. 두 그룹 모두 기업조직이나 경영 스타일은 한국 재벌이 가진 전형적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가족 중심의 황제경영, 문어발식 다각화 경영, 무리한 그룹 확장, 과도한 차입경영, 수출 의존형 업종 등 한국 재벌의 고유한 특성을 모두 가졌다. 그러나 정도에는 차이가 있었다. 흥한 재벌과 망한 재벌(해체 재벌)로 구분해 자료 수집이 가능한 몇 개 항목을 중심으로 경영구조의 차이를 정리해보면 <표2>와 같다. 내부지분율은 가족 지분과 계열사 지분의 비중을, 상장비율은 모든 계열사의 자본금 중 상장 계열사의 자본금이 차지하는 비중, 부채비율은 부채총액과 자기자본의 비중, 출자비율은 순자산 중 타 회사 출자분이 차지하는 비중, 매출수익률은 매출액 대비 당기순이익을 나타낸다. <표2>의 수치는 재벌별 평균값이다.
 
   
전경련 회장 시절의 김우중 전 대우 회장(사진 가운데).

망한 재벌은 10개 중 8개가 1997년 외환위기 전후에 그룹이 해체됐기 때문에 망하기 직전인 1995년의 자료를 기준으로 두 집단을 비교해보았다. 내부지분율은 주로 경영권 안정을 위해 활용되는 지분이다. 1980년에는 두 집단 사이의 지분율에 큰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망한 재벌 쪽이 다소 높은 편이다. 그러나 해체되는 시기인 1995년에는 망한 재벌의 지분이 현격히 낮아지고 있다. 이 시기에는 이미 내부지분율을 높게 유지할 정도의 여유가 없어졌다.
상장비율은 예상과는 다른 수치를 보인다. 망한 재벌 쪽이 더 높을 뿐만 아니라, 흥한 재벌 쪽은 점점 감소하는 데 비해 망한 재벌 쪽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기업을 상장한다는 것은, 경영투명성을 높인다는 뜻이다. 따라서 상장비율이 높다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다. 한국의 경영 풍토에서는 기업을 투명하게 경영하는 것이 위기 대응력을 오히려 약화한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무리한 영업 확장이 패망 초래
부채비율은 흥미로운 현상을 보인다. 1980년에는 망한 재벌 쪽이 부채비율이 훨씬 낮았다. 그러나 해체 직전인 1995년에는 망한 재벌의 부채비율이 급속히 증가했다. 반대로 흥한 재벌들은 부채비율이 현저히 낮아졌다. 망한 재벌도 재벌 초창기인 1980년에는 상장비율이 높으면서 부채비율이 낮은 건실한 기업 모습을 보였으나, 외환위기 직전에는 부채비율이 너무 높은 상황으로 가고 있다.
출자비율은 계열사 자금을 이용한 그룹 확장을 나타낸다. ‘재벌들이 계열사 자금으로 과도하게 그룹 확장을 추구한다’고 해서 공정거래위원회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도입해 이를 억제시키고 있었다. 1980년에는 두 집단 모두 이 비율이 높았는데, 망한 재벌 쪽이 조금 더 높았다. 1995년에는 양쪽 모두 대폭 감소하는데, 흥한 재벌 쪽이 더 많이 감소했다. 이 비율이 감소하는 것은 정부 규제 때문이기도 했다. 망한 재벌 쪽은 이 비율을 많이 줄이지 못하고 있다.
매출이익률도 매우 흥미로운 수치를 보인다. 1980년에는 망한 재벌 쪽이 훨씬 높았다. 1995년에는 흥한 재벌 쪽은 오히려 높아지는데, 망한 재벌 쪽은 큰 결손을 보일 정도로 낮아졌다.
이런 분석 결과를 종합하면, 재벌 도산의 원인이 과도한 차입에 의한 무리한 영업 확장이라는 그동안의 지적이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인다. 재벌 초창기인 1980년에는 망한 재벌 쪽이 오히려 더 건실한 모습이었다. 부채비율은 낮고, 매출이익률은 높았다. 그러나 외환위기 직전인 1995년에 오면, 과도한 부채로(높은 부채비율) 무리하게 계열기업을 늘리면서(높은 출자비율) 수익성도 확보하지 못하고(낮은 매출수익률) 경영권 안정화도 도모하지 못해(낮은 내부지분율) 외환위기라는 미증유의 경제위기에 직면해 주저앉고 말았다. 상장비율이 높은 것은 위기 때는 오히려 불리할 수 있었다. 경영 투명성이 높아 신속한 위기 대응에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재벌 도산은 경제위기와도 크게 관련 있었다. 도산한 10개 재벌 중 8개가 1997년의 외환위기와 관련 있었고, 이 시기에 도산했다. 대부분의 재벌 도산이 외환위기 때 발생했는데, 경제위기 같은 외부 충격에 적절히 대응할 능력이 없는 재벌은 도산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재벌 흥망의 세부적 원인은 재벌별로 각기 다를 수밖에 없지만 무리하게 그룹을 확장한 재벌, 그것도 과도한 차입을 통해 그룹을 확장해온 재벌들은 경제위기 때 특히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외환위기 전후로 해체된 재벌들이 전형적으로 이에 해당했다.
경영권 세습이 재벌 흥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으나, 본 연구에서는 입증하지 못했다. 해체된 10개 재벌 중 4개는 창업 당대에서 해체됐고, 6개는 세습 뒤에 해체됐기 때문이다. 세습경영은 망한 원인으로 볼 수 없고, 흥한 원인으로도 볼 수 없다. 순위가 상승한 9개 재벌 중 7개는 세습 이후 오히려 순위가 올랐기 때문이다.
재벌 개혁 정책이 진행된 뒤인 2007년에는 재벌의 경영구조가 완전히 달라졌다. <표2>에 따르면 이 기간에 살아남은 재벌들은 내부지분율을 높여 경영권을 한층 더 공고히 하면서 부채비율은 혁신적으로 낮추었다. 수익성은 괄목할 정도로 개선됐다. 재벌이 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경제 발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기업 발전사적으로 볼 때, 망하는 재벌이 나오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경제가 발전하는 길은 망하는 재벌을 막는 것이 아니라, 흥하는 재벌이 더 많아지도록, 또는 더 좋은 재벌이 망한 재벌을 대체해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표3>은 망한 재벌과 이들을 대체한 신규 재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했다. 1980년에서 2007년까지 14개 재벌이 30대 재벌에서 탈락하고 다른 14개 재벌이 이들의 자리를 대체했는데, 30대 재벌에서 이들의 비중은 30% 정도인 것으로 나타났다(매출액 또는 자산액 기준). 이들의 비중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1980년도 이후에 탈락한 14개 재벌이 30대 재벌에서 차지한 비중이나, 2007년에 새로 진입한 14개 재벌이 30대 재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비슷하다. 따라서 탈락한 기존 재벌이나 이들을 대체한 신규 재벌이나 상대적 크기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경영 세습은 흥망 원인 입증 안 돼
경제력 집중 완화 차원에서는 신규 진입 재벌의 비중이 커지는 것이 더 바람직한 현상이다. 소수의 대재벌 비중이 너무 높은 것이 경제력 집중 심화 문제로 지적되기 때문이다. 만약 신규 진입 재벌 비중이 높아지면 경제력 집중이 완화되는 징후로 볼 수 있는데, <표3>에서는 이런 징후를 관찰하기 어렵다. 매출액 비중으로는 다소 높아졌지만, 자산액 비중으로는 오히려 감소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 발전에 유리한 방향으로 신흥 재벌이 기존 재벌을 대체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내부지분율과 매출이익률은 탈락한 기존 재벌보다 이들을 대체한 신규 재벌들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신규 재벌들은 수익성이 더 높고 경영권 안정화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상장비율, 부채비율, 출자비율 등은 신규 재벌들이 훨씬 낮다. 신규 재벌들은 부채비율과 출자비율이 개선됐다.
이 기간에는 다른 재벌들도 경영구조가 전반적으로 변해왔기 때문에 상대적인 추세에서 신규 재벌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비교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망한 재벌과 신규 재벌의 각 변숫값을 동일 시기에 흥한 재벌의 변숫값으로 나눠 그 변화 모습을 살펴보았다. <표3>의 괄호 안은 이렇게 계산한 값이다. 우선 내부지분율은 흥한 재벌과 비교한 상대적인 값에서도 신규 재벌이 기존 재벌보다 더 높아졌다. 상장비율은 상대적인 값에서도 더 낮아졌다. 부채비율은 높아지고, 출자비율과 매출이익률은 낮아졌다. 이렇게 볼 때 신규 재벌이 망한 재벌에 비해 개선된 경영구조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출자비율이 약간 낮아진 긍정적 측면은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변했다.
망한 재벌을 대체한 신규 재벌이 더 건실하고 발전된 기업 모습을 보여야 재벌 흥망과 더불어 한국 경제가 더욱 발전해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표3>의 자료로는 이런 방향으로의 재벌 흥망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재벌 흥망이 경제를 더 건강한 구조로 이끌어가지도 못하고, 재벌의 경제위기 대처력이 더 강하지도 못하다면, 한국 같은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는 새로운 방향의 모색이 불가피하다. 재벌도 선진화를 모색해야 한다.
jpchoi@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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