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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의 ‘심인’
[박상인의 경제직설]
[139호] 2021년 11월 01일 (월) 박상인 sanpark@snu.ac.kr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경제학

   
▲ 지속가능한 사회로 전환하느냐, 침체와 위기라는 퇴행의 길을 걷느냐. 한국 사회의 미래는 공중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재벌 등 파워엘리트를 어떻게 교체하느냐에 달렸다. ‘경제민주화·양극화해소를 위한 99% 상생연대’ 관계자들이 2021년 6월1일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문재인 정부의 재벌개혁 후퇴와 민생 외면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거시경제학의 대가 로버트 루카스 교수는 1960년 이후 한국의 경제발전을 기적이라고 칭송했다. ‘기적 만들기’(Making a Miracle)라는 그의 1993년 논문은 1960년 한국과 필리핀의 비교로 시작한다. 1960년 한국과 필리핀은 1인당 소득, 인구 규모와 분포, 취학률, 수출 품목, 농업 중심 사회 등의 측면에서 유사했다. 경제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초기 조건이나 인적자본과 산업구조로 대리 측정된 물적자본과 기술수준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1960년부터 1988년까지 필리핀의 1인당 실질소득은 연 1.8%씩 성장에 그쳤으나, 한국은 약 연 6.2%씩 성장했다. 그 결과 1988년 한국의 1인당 소득은 필리핀의 약 3배가 됐다.

한강의 기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런 한국의 경제발전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경제발전을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부른 것에 빗대어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 가운데 한국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한 예외적인 국가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많은 경제학자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린 경제성장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경제학에서는 경제성장 요인으로 물적자본 축적, 인적자본 축적, 생산기술과 제도 향상 등을 꼽는데 이런 자본·노동·기술 등의 요인을 경제성장의 ‘근인’(Proximate Cause)이라고 한다. 경제성장이 이런 요인에 따라 이뤄지기는 하지만 물적·인적 자본축적과 기술혁신이 왜 특정 국가에서, 또 특정 시기에만 일어나는지 근본적인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발전이 물적·인적 자본축적으로 이뤄졌다면 왜 필리핀은 동일한 자본축적을 달성하지 못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발전론에서는 이런 근인의 변화를 가져오는 근본 원인을 ‘심인’(Fundamental Cause)이라고 한다.
2000년대에 이르러 경제발전론과 정치경제학의 중흥기를 이끄는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대런 애쓰모글루 교수와 동료 학자들은 경제발전의 심인으로 경제적 제도(Economic Institutions)가 결정적으로 중요함을 실증한 바 있다. 이때 경제적 제도란 경제주체들의 투자와 소비 등에 유인을 제공하는 정책·규칙·법률 등을 가리키며, 문화와 달리 사회적 의사결정에 따라 즉시 변경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경제적 제도의 핵심은 사유재산권 보호 제도, 특히 사회적 약자가 착취당하지 않게 보장받는 수직적 의미의 재산권 보호라고 할 수 있다. 애쓰모글루와 동료 학자들은 서유럽의 식민지배를 경험했던 국가들의 통계자료를 이용해, 수직적 재산권 보호가 잘된 국가들이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는 실증을 제시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의 사유재산권 보호 정도를 측정하는 ‘행정부의 권한남용 억제 정도’(Constraint on executive) 지수를 보면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의 재산권 보호 수준은 오히려 필리핀보다 더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한국을 비롯해 중국 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달성한 국가들은 재산권 보호 제도 확립으로 시민사회와 시장 중심의 성장을 이룩한 것이 아니다.
애쓰모글루와 동료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은 사례들에서는 영국에서 발달한 수직적 재산권 보호 제도가 주로 유럽 이민자들로 구성된 정주형 식민지에 더 발전된 형태로 이식됐고, 이런 신유럽(neo Europe)이라고 불린 국가들에서 경제가 발전했다. 이에 비해 착취형 식민지에는 착취에 더 적합한 제도가 도입됐고, 착취형 식민지에서 형성된 기득권 세력이 현재까지 기득권을 지키는 구조가 지속되고 있다.
따라서 애쓰모글루와 동료 연구자들의 결과를 좀더 일반화해 이해하자면, 실질적으로 사회적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집단인 파워엘리트(Power Elite)의 이해관계에 적합한 제도가 형성되고, 이런 제도가 결국 경제발전을 촉진하거나 저해한다는 것이다. 정주형 식민지에서 공중(Public)이 파워엘리트였다면, 착취형 식민지에서는 소수의 식민지 관료가 파워엘리트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경제발전 초기 단계에서 한국의 파워엘리트를 형성한 군 출신 정치인의 이해관계가 경제발전과 일치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부존자원과 해외 원조가 충분하지 않고 경제적 기득권층도 공고하지 않았던 상태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던 파워엘리트가 수출주도적 경제발전 전략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한 결과, 경제개발기의 성공 공식인 ‘정부 주도-재벌 중심’의 발전 전략이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됐다. 이제는 ‘친환경·혁신성장·포용사회’에 적합한 제도와 구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1970년대 이후 가격경쟁력과 공정(Process) 혁신에 의존하는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거대한 기업집단인 재벌체제가 형성됐고 하도급 전속계약과 단가 후려치기, 기술 탈취가 만연한 중간재 산업에서는 공정한 경쟁 기회와 혁신의 유인이 사라지고 말았다.

정치가 재벌 파워엘리트 교체해야
1987년 정치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새로운 파워엘리트로 부상한 재벌은 여전히 총수 일가의 세습과 기업집단 유지와 확대라는 이해관계에 매몰돼 있다. 이런 재벌의 이해는 친환경·혁신성장·포용사회로의 전환과 상충한다. 결국 지속가능한 경제와 사회로 전환하느냐, 침체와 위기라는 퇴행의 길을 걷느냐는 공중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파워엘리트를 교체할 수 있는지에 달렸다. 정치가 바로 서지 않고는 한국 사회와 경제의 미래도 없으며, 정치를 바로 세우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

* 박상인 서울대 교수가 한국 경제의 핵심 이슈를 심층 분석해 직격하는 논설형 칼럼으로, 재벌 개혁 등 여러 경제 현안을 제기하며 대안 또한 제시한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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