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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맥주 뜨고 제주소주 지는 이유
[재무제표로 읽는 회사 이야기] 제주소주 한라산, 제주맥주
[133호] 2021년 05월 01일 (토) 박종오 ppjjoo22@naver.com

박종오 <한겨레> 기자

   
▲ 대기업 소주의 지역 상권 공습으로 제주소주를 비롯한 지역 소주 업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 주류 판매대. 연합뉴스
“제주도 왔으면 이거 한 잔은 마셔줘야 하는데.”
시한부 인생을 사는 재연은 서울에서 사고를 치고 제주도에 온 태구에게 말했다. 제주 해안가 식당에서 마주 앉은 둘 사이엔 물회 두 그릇과 제주도의 대표 향토 소주 ‘한라산’이 놓여 있다. 영화 <신세계>를 감독한 박훈정이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영화 <낙원의 밤>의 한 장면이다. 
“한번 맛만 봐봐요.” 태구는 재연의 계속된 권유에 못 이겨 소주 한 잔을 목에 털어 넣는다. 이 장면을 보고 제주도의 푸른 밤 습습한 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한라산 소주 생각이 절로 난다는 사람이 제법 많다. 
그런데 재연 말처럼 제주도에 가면 꼭 마셔야 한다는 한라산 소주는 과연 얼마나 잘 팔릴까? 이 술을 만드는 주식회사 한라산의 재무제표를 보면 그의 말이 무색하다. 지금이 위기여서다. 
 
땅 팔아 적자 면한 한라산
주식회사 한라산은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에 본사와 공장이 있는 소주 제조업체다. 1950년 호남양조장으로 출발해 1970년 정부 방침에 따라 제주도 내 영세 소주 업체 6개를 하나로 합쳐 지금의 회사가 됐다. 창업자 일가가 지분 100%를 가진 가족기업이다. 대표 제품인 한라산 소주는 1993년 출시했다. 
최근 경영 사정은 썩 좋지 않다. 한라산의 매출액은 2020년 약 190억원으로 1년 전보다 12% 줄었다. 소주 판매가 부진해서다. 
한라산은 창사 이후 처음으로 2018년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소주 팔아 번 돈에서 제조비·인건비 등 각종 비용을 빼고 회사에 남은 돈이 마이너스(-)였다는 얘기다. 2020년 영업이익은 7천만원으로 간신히 전년 대비 흑자 전환했다. 
본업 이외의 비용과 수입 등을 반영한 당기순이익은 4억원이다. 원래는 적자가 불가피했으나 보유한 땅을 팔며 자산 처분 이익 11억원이 일회성으로 반영됐다. 
주식회사 한라산의 부채비율은 2020년 말 기준 1천%에 육박한다. 회사 부채가 주주 몫의 자기자본 10배에 이른다는 뜻이다. 
사실 지역 소주 중 판매 부진을 겪는 곳은 한라산뿐만이 아니다. 2016년 제주소주를 인수하며 소주 시장에 뛰어든 신세계그룹도 2021년 초 사업 철수를 결정했다. 
무학(좋은데이), 대선주조(C1), 금복주(참소주), 맥키스컴퍼니(이제우린), 충북소주(시원소주) 등 각 지역의 대표 소주 업체들도 2020년 매출이 줄줄이 둔화했다. 잎새주를 주력으로 생산하는 광주·전남 지역 주류 기업인 보해양조 정도만 매출액과 영업이익 성장세를 보이며 자존심을 지켰다. 
이처럼 지역 소주 판매가 떨어진 배경에는 코로나19 여파로 유흥업소 영업이 제한된데다, 대기업 소주의 지역 상권 공습이 있었다. 실제 국내 주류 업계 ‘빅3’인 하이트진로의 2020년 소주 매출액은 1조3400억원으로 2019년보다 13% 늘었다. 소주 출고가격이 같다고 가정하면, 한라산 등 지역 소주 업체 7개사를 합친 것보다 3배나 많은 물량을 판매한 것이다. 
한라산 관계자는 “주류 대기업의 영업 공세로 제주 시내 먹자골목마다 이 기업들의 소주를 홍보하는 에어풍선(커다란 막대풍선 모양의 홍보 도구)으로 도배돼 있을 정도”라고 전했다. 제주 현지 주민도 판촉행사를 많이 하는 참이슬과 진로 소주에 길들어졌다는 이야기다. 
같은 제주도에서 만드는 술이어도 맥주는 사정이 다르다. 제주소주와 같은 제주시 한림읍에 본사와 양조장을 둔 주식회사 제주맥주는 2021년 5월 코스닥 시장에 상장할 예정이다. 
제주맥주는 미국에서 맥주 공부를 한 30대 청년이 2015년 창업한 수제맥주 제조업체다. 2017년 첫선을 보인 제주위트에일과 뒤이어 내놓은 제주펠롱에일, 아워에일 등이 대표 생산품이다. 국내에서 수제맥주를 만드는 중소기업이 증시에 상장하는 것은 최초다. 
제주맥주는 아직 적자 기업이지만 성장성을 인정받아 코스닥 특례 상장 대상이 됐다. 2020년 매출액은 216억원으로, 전년 대비 3배나 불어났다. 창업 5년 만에 한라산, 충북소주 같은 유명 소주 업체의 매출 규모를 넘어선 것이다. 
제주맥주의 성장과 증시 입성이 가능해진 것은 정부 제도 덕분이다. 소규모 맥주 제조 면허 부여, 제조시설 규제 완화에 더해 2020년부터 국내에서 생산하는 캔맥주에 붙은 세금이 줄어들었다. 소량생산을 하는 탓에 원가가 비싼 수제맥주의 가격경쟁력이 생긴 셈이다. 
 
맛의 차별화가 원천 불가한 소주
소주는 다르다. 규모가 작은 업체가 시장에서 맛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제도적 기반 자체가 마련돼 있지 않다. 소주의 원재료인 주정(발효와 증류를 거친 알코올 도수 85도 이상인 액체)을 대한주정판매가 각 소주 제조업체에 독점 공급하기 때문이다. 주정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효하는 곡물의 맛과 향을 완전히 없애는 만큼, 애당초 소주 맛을 차별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소주 업체들이 지역 특성을 반영해 고유의 맛을 개발하지 못하고 광고모델, 판촉행사 등 마케팅에만 의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라산과 참이슬, 처음처럼이 모두 고만고만하다보니 소비자도 싸고 행사 많이 하는 술에 손이 가기 마련이다. 
중국 주식시장의 시가총액 1위 기업은 중국의 최고급 백주인 마오타이를 생산하는 구이저우마오타이다. 한국의 소주 시장에서 고유의 품질이 아닌 마케팅과 영업에만 돈을 듬뿍 푸는 기업이 승기를 잡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입맛이 참 쓰다. 
 
* 국내 기업 약 3만2천 곳은 외부 회계감사를 받는다. 회계장부에는 우리가 몰랐던 회사의 속살이 숫자로 드러나 있다. 최근 경제계에서 주목받는 회사부터 우리가 자주 가는 카페, 빵집 같은 일상 속 작은 가게까지 그들의 속사정이 담긴 회계장부를 읽어본다. 글쓴이는 경제신문사 <이데일리>에 근무하는 9년차 기자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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