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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의 손을 놓아야 할 시간
[박중언의 노후경제학]
[133호] 2021년 05월 01일 (토) 박중언 parkje@hani.co.kr
   
▲ 영화 <고령화 가족>의 한 장면.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서울과 부산에서 시장 보궐선거가 치러진 4월7일 밤 11시께 중견기업 P부장의 둘째 아들은 제법 취한 채 귀가했다. 술을 즐기는 대학생 아들의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손발을 씻고는 P부장의 방으로 들어왔다. P부장 책상 옆 침대에 걸터앉아서 투표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발단은 이날 아침 아파트 맞은편 주민센터 투표소로 가는 길에 P부장이 한 한마디였다. 정치, 특히 선거와 관련한 얘기는 가족 사이에서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P부장은 안타까운 마음에 횡단보도 앞에 잠시 멈췄을 때 아들에게 말을 건넸다. 딱히 선호하는 후보가 없으면 ‘부동산 투기를 강도 높게 규제하고 청년들 주택 걱정을 덜어줄 사람’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취지였다. 별말 없던 아들은 신속하게 찍고 나온 P부장과는 대조적으로 기표소 안에서 꽤 시간을 보냈다.
그날 밤에 P부장의 방을 찾은 아들은 취기로 했던 말을 되풀이하긴 했지만, P부장과 다른 선택을 한 이유와 근거를 또렷하게 밝혔다. 또 그런 판단의 정당성을 거듭 강조했다. 오해한 듯한 대목이 없지 않았으나 충분히 설득력 있는 얘기였다.

취중 진담
P부장의 둘째 아들은 이번 선거에서 주목받은 20대 남성 유권자인 ‘이남자’ 또는 ‘이대남’이다. 이날 술 먹고 신청한 대화에서 나타난 아들의 생각은 언론에 보도된 20대 남성의 평균 인식과 닮았다. 그러나 P부장이 확인한 것은 단지 정치 견해나 관점의 차이뿐이 아니었다. 정보를 받아들이고 공유하는 통로, 세상을 보는 눈,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자신과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어렴풋하게 느꼈던 그 차이가 선명하게 뇌리에 꽂혔다.
동시에 이미 성인이 된 자녀의 손을 붙잡고 끌어가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사회나 직장에서는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나 자녀뻘 되는 Z세대와 소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서 집에 들어오면 원위치로 돌아온다. 여전히 철없는 자녀에게 인생에 대해 가르치고 잔소리를 아끼지 않는 부모의 자리다.
P부장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두 아들의 삶에 너무 깊이 개입해온 게 아닌가 자문했다. 자녀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지금 시대에 타당한지, 설령 그렇다 한들 부모가 훈계조로 마르고 닳도록 말한다고 소용 있는지 되짚어보았다.
그의 잔소리 또한 정도만 덜할 뿐 여느 부모와 다르지 않다.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라’는 입에 발린 말 뒤로는 자녀의 안정적 돈벌이나 대기업 취업을 기대한다. 괜찮은 일자리가 사라지는 속도가 빨라지고 비정규 노동이 급속히 늘고 있는데도 내 자녀는 예외가 됐으면 한다. 자녀의 대입과 취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부모가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자녀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인 자녀 리스크
세계 그 어떤 나라보다 한국의 부모들이 자녀의 인생에 대해 더 깊이 오래 고민한다. 대체로 자녀가 고교를 마치면 독립하고, 대학 학비도 스스로 벌거나 학자금 대출을 받아 마련하는 미국이나 일본 등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심지어 군대, 직장까지 쫓아다니며 일일이 관여하는 부모도 있는 게 현실이다.
수입이 끊기는 퇴직 뒤에도 부모에겐 자녀 걱정이 늘 앞선다. 성인 자녀가 취업이나 결혼을 하지 않거나 못한 채 ‘캥거루족’으로 함께 살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넉넉하지 않은 자신의 노후자금과 성인 자녀의 몫을 놓고 끊임없이 갈등하며 어떡하든 더 남겨주려 애쓴다. 그러다보면 노후의 삶이 훨씬 팍팍해진다. 자칫 노후 빈곤을 자초할 수 있다. 바로 성인 자녀 리스크다. 5060세대가 마주하는 가장 흔한 리스크다.
성인 자녀 리스크는 부모 스스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성인이 되면 누구나 자기 앞가림을 할 책임이 있다. 그런 성인 자녀의 인생까지 본인 문제로 끌어안으려는 부모의 집착이 리스크의 뿌리다. 자녀가 안쓰럽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유독 한국 부모들은 그 끈을 좀체 놓지 못한다. 예전처럼 나이 들어 성인 자녀의 돌봄을 기대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닌데도 말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에게 두 얼굴의 야누스다. 보호자이면서 지배자다. 고맙지만 짜증스러운 존재다. 성인이 된 마당에 부모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자녀의 마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또 부모가 자신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것은 자녀의 바람과도 거리가 멀다. 부모가 본인의 노후에 더 관심을 쏟고 자신을 덜 쳐다봤으면 한다. 아니, 자신들의 인생에서 좀 나가줬으면 한다.
하지만 부모는 한 손은 ‘고생하며 키워줬다’는 심리적 채권, 다른 손은 경제력으로 무장한 채 무시로 끼어든다. 다 컸으니 물리력은 아닐지라도 언어폭력은 심심찮게 행사한다. 사랑이나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이 자녀와 대화를 겉돌게 하고 관계를 멀어지게 하며 나아가 단절시키기도 한다. 작은 회사에 다니는 30대 K씨는 결혼 때 대준 전세금을 지렛대로 삼은 아버지의 간섭을 견디다 못해 어렵게 저축한 돈을 계좌로 보내고 아버지와 연락을 끊었다.

거리두기
이번 일을 거치면서 P부장은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자녀의 인생에서 한 발짝 더 떨어지는 자극제가 됐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을 부양 시한으로 공언한 그는 사고·생활 방식이 다른 두 아들이 앞으로 뭘 하며 어떻게 먹고살지 둔감해지려 한다. 그가 신경 쓴다고 딱히 나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성인 자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개입을 줄이는 게 관계를 건강하게 하는 동시에 리스크를 예방하는 길이다. 성인 자녀의 미래까지 책임지겠다며 재산을 물려주는 데 골몰하지 않으면 노후가 한결 편안해진다. 돈 되는 일거리를 찾으려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되고 가진 돈을 축내지 않으려다 무리수를 두는 사태도 생기지 않는다.

* 한국 베이비붐세대의 막내(1963년생)인 박중언은 노년학(Gerontology)과 함께 고령사회 시스템과 서비스 전략을 연구 중이다. 나이의 구속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편안하게 늙어가기를 지향한다. 블로그 ‘에이지프리’(AgeFree)를 운영했고, 시니어사업에도 몸담았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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