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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죄가 없다
[박상인의 경제직설]
[131호] 2021년 03월 01일 (월) 박상인 sanpark@snu.ac.kr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경제학)

   
▲ 경제민주화119가 2020년 12월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경제민주화 5법 처리 못하는 국회 규탄 및 입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시장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경제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럼에도 시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어떤 이는 ‘시장만능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하고, 또 다른 이는 ‘시장을 이기려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 양극단의 주장은 시장을 마치 자존자(自存子), 즉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처럼 여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시장이 잘 작동하는지는 이에 필요한 법과 제도를 갖췄는지에 달렸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존 맥밀런 교수는 저서 <시장의 탄생>(Reinventing the Bazaar: A Natural History of Markets)에서, 시장을 시장거래가 이뤄지는 물리적 공간이나 사이버공간으로 정의하고, 고대부터 시장이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되고 진화해왔음을 풍부한 예시로 설명하고 있다.
자연발생적 시장들은 중세시대 영국에서 유행한 마을축구(Folk Football)에 비유할 수 있다. 당시 마을축구에는 제도화한 규칙이 거의 없었다. 마을마다 시합마다 규칙이 달랐다. 그러나 1863년 축구협회와 1871년 럭비조합이 결성돼 경기 규칙이 성문화함에 따라, 마을축구는 오늘날 세계인의 스포츠인 축구와 럭비로 도약할 수 있었다.
축구 비유처럼, 시장경제의 제도화란 시장거래가 제도화하고 법적 보호를 받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에서는 거래가 사적 자치에 따른 계약으로 이뤄졌고, 평판과 관습에 따라 보호받았다. 그러나 20세기부터 기업의 대규모화와 경제의 복잡화로 사적 자치만으로는 시장거래를 제대로 보호하고 장려하기 어려워졌다.

시장경제의 기본은 재산권 보호
그렇다면 시장거래란 무엇인가? 시장거래란 거래 당사자가 거래 자체를 거부(veto)할 수 있고, 비록 관습이나 법규의 제약을 받으나 자유롭게 거래 조건에 동의할 수 있는 자발적 교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재산권의 정립과 보호야말로 시장경제의 가장 기본이다. 하지만 사유재산권 보호는 단지 실체법에 명문화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재산권과 관련한 분쟁이 생길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공정한 사법 절차와 재산권 침해에 적정한 손해배상제도가 확립돼야 실질적으로 재산권이 보호된다.
특히 재산권 보호에서 중요한 것이 엘리트로부터 사회적 약자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수직적 재산권 보호’인데, 이는 근로·사업 의욕을 증진하고 혁신의 유인을 제공한다. 약자의 재산권을 실질적으로 보호하려면 법의 지배를 확립해야 한다.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지위와 무관하게 만인에게 평등하게 법 적용과 집행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약자의 재산권은 보호될 수 없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과 우드로 윌슨 등의 민주당 지도자들과 시어도어 루스벨트 같은 공화당의 개혁 세력은 경제력 집중에 따라 특정인이 사회의 게이트키퍼(Gatekeeper)가 되면 결국 다원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도 시장경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우려를 제기하며, 이를 해소하기 위한 진보적 운동(Progressive Movement)을 전개했다.
결국 미국 대법원은 1911년 스탠더드오일을 90개 독립기업으로 분할했고, 대공황기에 뉴딜정책으로 미국의 대규모 기업집단이 사실상 해체됐다. 이처럼 뉴딜정책의 중요한 함의 중 하나는 제도화된 시장경제 정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금융계의 거대화와 플랫폼 사업자의 등장으로 또다시 시장경제 오작동 경고가 미국의 진보와 보수 진영 모두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진보적 경제학자인 로버트 라이시는 저서 <자본주의를 구하라>에서 오늘날 새로운 경제환경에서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함을 지적했다.
보수 경제학의 본산인 미국 시카고대학의 스티글러센터(Stigler Center)도 경제력 집중 문제를 다시 본격적으로 제기하며, 경제·정치 권력이 소수에 집중되는 문제를 막기 위해 “경제력 집중 규제”(fighting ‘bigness’)는 반독점 규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미국 대법원 판사 루이스 브랜다이스의 주장을 재조명했다.
지금 한국의 경제 현실은, 20세기 초 미국의 진보적 운동이 우려했던 경제력 집중의 폐해가 극심한 상황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으로 일어난 공정 경쟁 기회 상실, 기술 탈취와 단가 후려치기에 따른 사회적 약자의 재산권 침해, 소수주주의 재산권 침해, 위험의 외주화를 통한 노동착취 등 반시장경제적 일탈이 난무하고 있다.
이런 일탈을 시장 탓으로 돌리는 것도, 반대로 이런 일탈이 시장경제 원리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도 잘못됐다.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 요건
문제는 이런 일탈이 일어나도 정치적으로 또 정책적으로 바로잡을 수 없을 만큼, 재벌에 의한 정치·관·언론·법조 포획이 심각하다는 점이다. 물론 재산권 보호가 잘 확립되더라도, 시장경제라는 유인 체계가 항상 의도대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경제체제가 원활히 작동하려면, 공정거래 정책과 노동삼권을 보장하는 정책, 시장 실패를 보정하는 정책 등 정부 역할이 여전히 필요하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기득권자가 약자의 재산권을 침탈하고 정치와 정책이 이들 기득권에 포획되는 것을 바로잡는 일이 우선이다. 진정한 시장주의자라면 재벌 개혁을 주장해야 한다.

* 박상인 서울대 교수가 한국 경제의 핵심 이슈를 심층 분석해 직격하는 논설형 칼럼으로, 재벌 개혁 등 여러 경제 현안을 제기하며 대안 또한 제시한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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