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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부자의 최고 투자
[정혁준의 바보야, 문제는 돈이야!]
[128호] 2020년 12월 01일 (화) 조계완 june@hani.co.kr
   
▲ 2020년 11월14일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에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지고 있다. 록펠러 가문이 미국 대공황 시대에 고용창출을 위해 건설한 록펠러센터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매년 11월 트리를 설치한다. EPA 연합뉴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벌어질 당시 또 다른 전쟁이 벌어졌다. ‘석유전쟁’이었다. 석유는 ‘검은 황금’ 또는 ‘황금기름’이라고 불렀다.
클리블랜드에서 160㎞ 정도 떨어진 펜실베이니아 북서쪽 ‘오일 크리크’(Oil Creek·기름 냇물)라는 지역이 있었다. 그곳 강가엔 항상 검은 기름띠가 떠다녀 그렇게 불렀다. 인디언들은 그 기름을 약으로 쓰고 있었다. 돌팔이 약장사들은 만병통치약이라며 팔았다. 초기 그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그 검은 기름을 골칫거리로 여겼다.
그 무렵 깊은 땅속에서 석유를 파내는 장비가 개발되면서 오일 크리크에서 대규모 유전이 개발됐다. 유정에서 솟아나는 불길이 밤이나 낮이나 그치지 않았고, 검은 황금을 쉴 새 없이 뿜어내는 엔진에서 연기가 피어났다. 석유와 진흙이 섞인 시커먼 진흙이 말발굽과 마차바퀴에 묻어나며 덧칠을 거듭해, 도로는 거의 다닐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골드러시 때 돈 번 이는 청바지 만든 사람
골드러시에 버금가는 ‘오일러시’가 이어졌다. 석유 채굴 업자들이 몰려들면서 이 지역은 광란의 열풍에 휩싸였다. 유전지대는 흥청댔다. 이곳저곳에 술집이 생겨났다. 유전 지역 사방에서 연기가 솟아올랐고 검은 기름으로 온통 범벅이 돼갔다.
채굴업자들은 석유를 ‘배럴’이라는 나무통에 수송했다. 지금까지 석유 수송의 표준이 되는 배럴은 160ℓ에 해당한다. 당시엔 생산의 약 70%가 조명용이었다.
이런 사회현상을 차분한 시각으로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석유 채굴에 투자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 등락이 심한 유전 개발보다 유전에서 뽑아낸 석유를 정제하는 정유 사업이 더 전망 있다고 봤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진짜 돈’은 석유를 캐내는 사람이 아니라 운송과 정유를 담당하는 중간상인이 차지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예측은 들어맞았다. 골드러시 때 정작 돈을 번 이는 금을 깬 사람이 아니라 금을 깨는 사람들을 위해 잘 안 찢어지는 청바지를 만든 사람이었다.
유정을 발견하고 2년 뒤 영국인 화학자 샘 앤드루스가 ‘그’를 찾아왔다. 정유소에서 일한 적이 있는 앤드루스는 독학으로 석유를 정제하는 법을 배웠다. 앤드루스는 정유소를 설립하려는 자신을 후원해달라고 ‘그’에게 제안했다. ‘그’는 움직인다. 4천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공장은 클리블랜드 외곽 지역에 있는 창고였다. ‘그’는 석유를 수송하기 좋도록 철도와 가까운 곳에 공장을 지었다. 공장에는 몇 대의 증류기와 용광로가 전부였다. 이곳에서 앤드루스는 석유를 걸러내고 끓인 뒤 농축해 물과 가성소다, 황산으로 정화해 등유를 만들었다. 그들은 ‘더 높이’라는 뜻의 ‘엑셀시어’라는 상표로 배럴에 등유를 담아 팔았다.
그때까지 미국 대부분 가정에선 고래기름으로 램프 불을 밝혔다. 석유가 고래기름을 대체했고, 차츰 산업현장에서도 석유가 쓰였다.
‘그’는 누굴까? 세상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번 부자. 석유왕 존 D. 록펠러다. 록펠러는 1870년 ‘오하이오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세우고, 공급과잉으로 석유가격이 떨어지자 경쟁사를 무차별적으로 사들였다. 1882년엔 40여 개의 독립적인 기업을 모아 미국 정유소의 95%를 지배하는 ‘스탠더드오일 트러스트’를 만들었다. 석유사업에서 생긴 돈으로 광산, 산림, 철도, 은행 등에 투자해 거대 자본을 만들었다. 하지만 독점기업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1911년 미국연방최고재판소로부터 독점금지법 위반 판결을 받아 30개 회사로 해체됐다.

독점 자본가의 사회공헌 활동
록펠러가 성공한 사업에 안주했거나, 자신이 벌어놓은 돈으로 남은 생을 보냈다면, 그는 위대한 기업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 스탠더드오일처럼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사업이 아니었다. 바로 사회공헌 활동이다.
대표적인 게 시카고대학 설립이다. 대학을 설립할 장소도 그에겐 고민거리였다. 주변 사람들은 뉴욕에 대학을 세우자고 요청했다. 하지만 록펠러는 월스트리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대학을 세우고 싶었다. 대학을 사업에 이용하려고 설립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했다. 선택지는 서부의 시카고였다. 뉴욕과 멀리 떨어진데다 서부 개척정신과도 맞아떨어졌다.
주위 사람들은 사회공헌 활동을 비판했다. 심지어 그의 동생마저 “형이 세상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사회주의자들과 엉터리 문인들을 끌어모으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록펠러는 학교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았다. 실제 시카고대학은 전국에서 제일 먼저 독립적인 학문을 추구한 대학으로 유명했다. 처음부터 종교, 성, 인종을 구분하지 않고 신입생을 받았다. 스탠더드오일의 정유소 인수·합병보다 더 빠른 속도로 최고 교수진을 꾸렸다.
애초 시카고대학은 1857년 설립됐으나 10여 년 만에 재정난으로 폐쇄되자, 1890년 록펠러가 새롭게 세웠고 1892년 수업을 시작했다. 새로 문을 연 시카고대학은 입학생 750명을 받았다. 4분의 1이 여학생이었다. 유대인과 가톨릭 신자, 흑인 학생도 포함됐다. 시카고학파 경제학자 가운데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사람은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해 조지 스티글러, 시어도어 슐츠, 로버트 포겔, 게리 베커, 제임스 해크먼, 머튼 밀러, 로버트 루커스 주니어, 로널드 코스 등 무려 20명이 훌쩍 넘는다.
록펠러는 만년이 되어 시카고대학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건 내가 한 것 중에서 최고의 투자였소.” 1910년까지 그가 이 대학에 기부한 ‘잔돈’은 4500만달러에 이르렀다.

* 몇 해 전 나온 ‘청소년 반부패인식지수’에서 중고생 18%가 “10년 감옥 사는 한이 있어도 10억원을 번다면 부패를 저지를 수 있다”고 답해 논란이 됐다. 돈을 향한 비뚤어진 가치관은 ‘물신주의’를 향해 내달리는 우리 사회의 잘못에서 비롯됐다. 매일 돈과 관련한 정보가 쏟아지지만, 정작 돈과 우리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에는 익숙지 않다. ‘바보야, 문제는 돈이야!’에서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의 주인’으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독자와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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