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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 못할 경제학적 사랑이여
[Economic Thoughts]- 경제사 산책
[1호] 2010년 05월 03일 (월)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conomyinsight@hani.co.kr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은 그것이 옳을 때에나 틀릴 때에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준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것 말고는 별로 없다. 자신은 그 어떤 지적인 영향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믿는 실무정책자들도 대개는 이미 어떤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다…일찍 드러나든 늦게 드러나든, 좋은 것에 대해서든 나쁜 것에 대해서든, 위험한 것은 기득이권이 아니라 사상이다”고 말했다. 본 고정물은 경제학의 살아 있는 고전들을 읽으면서 이를 통해 현재 인류의 삶과 경제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경제사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경제사상사 산책’ 코너다.-편집자 주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김훈, <바다의 기별>)
메이저 언론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지만, 고려대생 김예슬의 자퇴 선언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화제가 되었고 어쩌면 상당한 역사적 의미조차 가질 만한 ‘사건’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이 학벌로 상징되는 문화자본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이 자본에 의해 포획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 옛날 소 팔아서 어렵게 다닌 대학(‘우골탑’) 정도의 표현은 오늘의 현실에 비춰보면 그야말로 애교 수준이다. 실정법상 범죄를 저지른 재벌그룹의 회장에게 다른 것도 아닌 명예‘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곳, “문화센터 같은 강의”는 집어치우고 기 업이 원하는 인재를 만들어야 한다는 재벌 오너 출신 이사장의 기염이 ‘개혁’으로 포장되는 곳이 오늘날 우리 대학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도 동참해 학원으로 내모는 우리 아이들은 대학에서 자본으로 이어지는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끝없이 앞으로만 나갈 수밖에 없는 상품이 돼버렸다. 문제는 나 스스로, 아니 내 아이를 그 컨베이어 벨트에서 내려오도록 할 용기는 누구에게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서태지처럼 뭔가 뛰어난 능력을 지녔거나, 법정 스님처럼 오랜 시간 수양의 결과로 일정한 경지에 이른 철학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예슬의 자퇴는 단기적으로는 교육 소비자로서 소비를 거부하면서, 장기적으로는 잠재적 노동력, 그것도 매우 높은 품질을 갖춘 것으로 받아들일 노동력의 판매를 거부한 것과 다름없다.
 
‘김예슬 자퇴’에서 고진을 보다

거창하게 자본주의 체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모든 것이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능력, 이른바 교환가치로만 평가되는 상품교환 경제에 관한 저항과 비판은 오랜 역사가 있다. 이미 오래 전  칼 폴라니가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근대사회의 성립과 그에 따른 만물의 상품화 경향에 맞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는 저항의 흐름이기도 하다. 가장 어려운 저항 형태는 바로 자신이 가진 상품(즉, 노동력)의 판매를 거부하는 것, 그리고 자신을 유혹하는 상품의 구입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비평가인 가라타니 고진이 “가능한 코뮤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주목하는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투쟁 형태이기도 하다.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비평가로 출발했으나 스스로 문학의 죽음을 선언하는 독특한 지적 위치를 지닌 인물이다. 최근 번역 출간된 대담집 <정치를 말하다>에서 고진은 자신의 사상 편력을 설명한다. 1960년 이른바 ‘안보투쟁’ 당시 도쿄대 경제학부에 다닌 그는 사회주의학생동맹활동에 참가한 열혈 운동권 학생이었다. 사실 일본의 1960년대는 안보투쟁에서 1968년 도쿄대 점거 사건으로 유명한 전공투 세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1980년대에 비견될 만한 시기였다(비록 고진 자신은 양자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지만). 일본 여배우 사와지리 에리카가 ‘조선어’를 말하는 흰 저고리 검정 치마의 민족학교 학생으로 등장하는 영화 <박치기>(2005)는 그 시대를 다루고 있다. 대학에 진학해 급진적 의식의 세례를 받은 베이비붐 세대(이른바 ‘단카이’ 세대)가 과격한 투쟁 끝에 좌절하는 경험은 ‘혁명적 사회주의자’, 심지어는 ‘사람 중심 사상’의 신봉자에서 출발해 좌절과 ‘변절’을 거듭하다가 때로는 군사정권의 맥을 잇는 정당의 정치인으로, 때로는 사교육에 기생하는 학원 강사로, 때로는 냉소주의자로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한국의 386세대를 떠올리게 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압도적으로 마르크스의 지적 영향 아래에 놓인 사상가지만, 생산과정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자와는 달리 노동력 판매와 소비 거부에 중점을 두는 투쟁 전략을 제시한다.
“근대 자본주의는 노동력 상품이 만든 상품을 노동자 자신이 사게 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생기는 차액(잉여가치)에 의해 자본은 자기증식합니다. 산업자본의 획기성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생산한 상품을 노동자가 그들의 노동력 상품을 재생산하기 위해 다시 산다는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적인 시스템을 형성했다는 점에 있습니다”.(<정치를 말하다>, 89쪽)

노동자는 상품을 생산하는 상품

이를테면 생산과정이야말로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을 ‘착취’하는 비밀의 장소이고 그곳을 장악할 때 비로소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고, 그 장악은 국가권력의 탈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마르크스주의자의 테제는 부정된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경제적 토대에 의해 결정되는 상부구조가 아니다. 오히려 자본, 그리고 네이션(민족 혹은 국민)과 더불어 각각 하나의 교환 양식에 대응되는 일종의 ‘토대’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약탈과 재분배, 자본은 상품 교환, 그리고 네이션은 호수성(호혜의 원칙)에 기초하는 것이다. 근대사회에서 자본과 국가, 그리고 네이션은 한 덩어리로 접합돼 있기 때문에, 그중에서 일부만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소련식 국가사회주의가 국가권력을 획득함으로써 자본을 제거하는 전략이었다면, 파시즘은 네이션(공격적 민족주의)을 통해 나머지를 제거하려는 전략이었던 셈이다. 한편 인구에 회자되는 신자유주의란 “네이션을 희생한 자본과 국가의 운동”(<정치를 말하다>, 148쪽)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자본제 경제를 폐기하면, 네이션이나 국가도 폐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국가나 네이션이 항상 마르크스주의의 걸림돌이 되어왔습니다. 네이션과 국가는 상품 교환과는 다른 교환 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정치를 말하다>, 101쪽)
그러므로 진정한 대안은 자본과 국가, 네이션의 한 덩어리를 함께 공격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상품 교환이라는 위상에서 생겨난 자유로운 개인 위에서 호수적 교환을 회복하려는” 운동
(<세계공화국으로>, 49쪽)이 필요하다. 가라타니 고진은 그것을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이라 부른다. 어소시에이션은 자본이나 국가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적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노동자가 자본에 대해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공간에서 이뤄진다. 즉 자본의 생산물을 ‘사는 입장’에 설 때 자본의 유혹에서 벗어나 ‘사지 않기’, 그리고 자본이 이윤 생산을 위해 반드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기’인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세상을 장악한 자본에서 벗어나 제대로 숨 쉬며 사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협동조합적 형태의 생산과 소비를 제시하던 가라타니 고진은 최근 들어 부쩍 ‘세계공화국’의 꿈을 말한다. “궁극적으로 각국이 주권을 방기함으로써 형성되는 세계공화국”은 바로 철학자 칸트의 꿈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각국에서 군사적 주권을 서서히 국제연합에 양도하도록 하여, 그것을 통해 국제연합을 강화·재편성하는 것입니다. …각국에서 이와 같이 주권의 방기가 이루어지는 것 외에 국가를 지양하는 방법은 없습니다”(<세계공화국으로>, 225쪽)
도대체 미국의 이라크 침공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하는 국제연합(UN)이 세계공화국의 흉내라도 낼 수 있는 날이 올까. 물론 가라타니 고진 자신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역사 발전의 목적은 있는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거나 1980년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처럼 인류 역사가 필연적으로 수렴해들어갈 어떤 상태를 믿지 않는 한, 그런 것은 없다. 그러나 칸트가 말하는 초월론적 가상과 규제적 이념은 있다. 가라타니 고진에게 세계공화국이란 바로 초월론적 가상이자 규제적 이념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더 이상 같지 않지만 거울을 보면서 또는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내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초월론적 가상이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으나 끊임없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태, 그것이 바로 규제적 이념이다. 이를테면 영원한 사랑은 일종의 초월론적 가상이고 규제적 이념이다. 사랑이 초월론적 가상 또는 규제적 이념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글의 맨 앞에 인용한 ‘보수적인’ 시인(김훈)과 급진적 비평가(가라타니 고진)의 꿈은 결국 같은 특성을 지닌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랑은 결국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과 같은 의미이리라.
 
현대경제학이 보지 않는 빈틈을 응시

나는 가라타니 고진에게서 오히려 현실이 “규제적 이념”에 다가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요소를 읽어내려 한다. 김예슬 학생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내 딸에게는 그렇게 권하지 못하는 이율배반. 자본의 지양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덜 자본스러운 삶을 꿈꾸다가 소비자로서 자본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이율배반. 이를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즉 현대경제학이 거론조차 하지 않는 빈틈을 지시한다는 점만으로도, 가라타니 고진은 충분히 “경제학자”가 된다. 아울러 그의 대안은 이성적으로는 극히 비관적이지만, 의지적으로는 더없이 낙관적이다. “적어도 그 루트만큼은 분명하기 때문에” 결코 “절망적이지 않은” 것이다(<세계공화국으로>,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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