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 > 시각
     
모차르트의 가난
[정혁준의 바보야, 문제는 돈이야!]
[123호] 2020년 07월 01일 (수) 정혁준 june@hani.co.kr
   
▲ 가수 김준수가 2011년 11일 서울 중구 예장동 남산창작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모차르트> 프레스콜에서 열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유’를 다룬 영화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있다면? <빠삐용>(1973), <대탈주>(1963) 같은 영화가 생각날 것이다. 이 중 많은 사람이 꼽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이 세찬 비가 내리던 날 탈출에 성공한 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번쩍 드는 장면이 인상적인 영화, <쇼생크 탈출>(1994)이다.
영화 원작은 <리타 헤이워스와 쇼생크 탈출>(1982)이라는 단편 소설이다. 원작자는 <미저리>(1987), <캐리>(1974)를 쓴 스티븐 킹이다. 영화 줄거리는 단순하다. 은행가 앤디(팀 로빈스)는 아내와 그녀의 정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쇼생크 감옥에 갇힌다. 앤디는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20년 동안 탈출을 준비하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탈출에 성공한다.
영화에는 원작에 없는 장면이 나온다. 모차르트가 쓴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1786) 가운데 ‘편지의 이중창’이 나온다. 주인공 앤디가 교도소에 설치된 스피커로 음악을 내보낸다. 이때 흘러나오는 음악이 ‘산들바람의 노래’라고도 하는 ‘편지의 이중창’이다.

자유를 그린 <쇼생크 탈출>과 <피가로의 결혼>
자유가 억압된 공간인 교도소에서 서정적인 이중창이 흘러나오자, 죄수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노래를 듣는다. 모차르트 음악에 마법이 걸린 듯 그 자리에서 얼음장처럼 서버린 죄수들. 하늘에 울려퍼지는 노래와 함께 앤디가 교도소에서 사귄 친구 레드(모건 프리먼)의 독백이 흘러나온다.
“난 지금도 이 이탈리아 여인들이 뭐라고 노래했는지 모른다. 실은 알고 싶지도 않다. 모르는 채로 있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다. 난 그것이 가슴이 아프도록 아름다워서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든 이야기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 목소리는 이 회색 공간의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마치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우리가 갇힌 새장에 날아 들어와 벽을 무너뜨린 것만 같았다. 아주 짧은 한순간 쇼생크의 모두는 자유를 느꼈다.”
감독(프랭크 다라본트)은 원작에 나오지 않는 이 노래를 왜 영화에 넣었을까?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역시 ‘자유’라는 주제를 담고 있어서다. 오페라에선 바람둥이 알마비바 백작이 시종 피가로와 하녀 수잔나가 결혼하려고 하자, 신랑보다 첫날밤을 먼저 치르는 ‘초야권’을 수잔나에게 내세우며 갈등을 빚는다.
백작의 이런 ‘갑질’에 맞서 약자인 백작 부인과 하녀 수잔나가 함께 꾀를 낸다. 백작 부인이 수잔나에게 백작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게 한다. 오늘 밤 정원에서 만나자는 내용이다. 백작은 그 편지를 받고 정원에 와서는 백작 부인과 수잔나에게 망신당하고 만다. 권력을 이용해 갑질하는 사람을 향해 계급(하녀)과 성(여성), 약자가 서로 힘을 모아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을 만든 모차르트 역시 자유로운 영혼의 음악가였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모차르트는 롤로레도 대주교의 음악 하인처럼 살았다. 당시만 해도 음악가는 귀족, 왕실, 종교 후원자가 요구하는 음악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자기만의 음악을 만들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시대를 앞선 프리랜서 모차르트
그러나 1777년 여름, 21살 모차르트는 자신의 고용주인 롤로레도 대주교에게 사표를 던진다. 궁정에서 안정적인 월급쟁이로 살기보다 자유로운 음악가로 살겠다는 의지였다. 모차르트는 그 뒤 오스트리아 대도시 빈으로 옮긴다. 프리랜서 음악가로서 모차르트의 삶이 시작됐다.
초기 자본주의가 싹틀 때였다. 왕족과 귀족에 맞서 사업으로 돈을 번 신흥 부르주아지(자본가계급)가 떠오르고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왕족과 귀족처럼 교양을 음미하고 싶었고, 그 수단이 음악이었다. 모차르트는 창작에선 억압을 벗어나 자유를 얻었지만, 생계에선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생계를 꾸리려면 밤낮없이 일해 돈을 벌어야 했다.
모차르트는 당시 계몽 군주 요제프 2세에게 후원받기도 했지만 주 수입원은 피아노 개인 지도, 작곡료, 연주회였다. 날마다 피아노를 교습하면서 레슨비를 받았고 협주곡을 써서 작곡료를 받았다. 악보가 잘 팔리고, 연주회의 인기에 따라 얼마나 돈을 벌 수 있는지 결정됐다.
인기를 얻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선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을 만들어야 했다. 모차르트 음악이 감미롭고 다채로운 이유다. 모차르트는 색다른 음악을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을 항상 느끼고 있었다. 생계를 잇기 위해 이전보다 더 작곡과 연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모차르트는 자유를 얻은 대신 엄청난 노동을 해야 했다.
1788년 오스트리아 빈에 경제불황이 닥쳤다. 경제가 어려우면 제일 먼저 문화비를 줄이는 건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였다. 모차르트 연주회에 한 사람만 예약했을 정도로 삶이 팍팍해졌다. 그는 일자리를 찾아 독일 베를린, 드레스덴, 뮌헨 등으로 여행을 떠나야 했다. 여행 경비와 연주회 준비를 위해 꾼 돈을 갚지 못하자 고발당하기도 했다.
이 무렵부터 모차르트는 친구들에게 돈을 꿔달라는 편지를 썼다. 모차르트는 푸흐베르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도움을 청해야 할 만큼 안 좋은 상황이라네. 좋은 친구, 형제인 당신마저 나를 버린다면, 나와 가련한 병든 아내 그리고 아이도 파멸해버릴 것이라네.”
대주교의 억압을 박차고 나와 음악의 자유를 찾았지만 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물론 모차르트 수입은 적지 않았다. 30살 때 수입이 하이든의 세 배가 넘었을 정도다. 하지만 아무리 버는 돈이 많아도 쓰는 돈이 더 많으면 버티기 힘들다. 당장 수입에서 쓸 수 있는 비용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수입도 고려해 돈을 써야만 했다. 비용 관리 실패, 모차르트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5일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오페라 <마술피리>(1791)가 초연되고 두 달이 막 지났을 때다. 과로로 면역력이 떨어졌지만 쉬지 못하고 일한 것이 원인이었다. <마술피리>는 200회나 공연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 몇 해 전 나온 ‘청소년 반부패인식지수’에서 중고생 18%가 “10년 감옥 사는 한이 있어도 10억원을 번다면 부패를 저지를 수 있다”고 답해 논란이 됐다. 돈을 향한 비뚤어진 가치관은 ‘물신주의’를 향해 내달리는 우리 사회의 잘못에서 비롯됐다. 매일 돈과 관련한 정보가 쏟아지지만, 정작 돈과 우리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에는 익숙지 않다. ‘바보야, 문제는 돈이야!’에서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의 주인’으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독자와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0년 7월호

 

정기구독자는 과거 기사 전체와 2016년 6월 이후 온라인 기사 전체를,
온라인 회원은 과거 기사 일부와 2016년 6월 이후 온라인 기사 전체를 보실 수 있습니다.

  

ⓒ Economy Insight(http://www.economyinsight.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 기사의견(0)  
 
   * 3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600byte)
   * 욕설이나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운영원칙]
매체소개 구독신청 구독문의기사문의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무단수집거부찾아오시는 길
한겨레신문(주) | 제호 : 이코노미 인사이트 | 등록번호 : 서울 아 01706 | 등록일자 : 2011년 07월 19일 | 발행인 : 김현대 | 편집인 : 강대성
발행주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효창목길 6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 한겨레 고객센터 1566-9595 | 청소년보호 책임자 : 백기철
Copyright 2010 Hankyore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