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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의 마지막 출구
[FINANCE] 미국의 ‘약한 달러’ 정책
[115호] 2019년 11월 01일 (금) 윤석천 maporiver@gmail.com
윤석천 경제평론가
 
   
▲ 2018년 11월 미국 위스콘신주 매디슨에서 선거운동을 하는 민주당 상원의원 태미 볼드윈. 그는 공화당 상원의원 조시 홀리와 함께 외국자본에 세금을 부과하는 권한을 연준에 주는 법안을 제출했다. REUTERS
경제사학자들은 2019년을 어떻게 기술할까. 역사상 가장 낮은 명목·실질 금리에도 글로벌 경기침체가 시작된 해로 기록할 가능성이 크다. 인류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거대한 통화 실험이 실패한 해로 쓸 수도 있다. 통화정책은 그 종착지에 다다랐다.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유산인 통화주의의 실패가 명확해지고 있다. 프리드먼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마이너스 금리와 비전통적 통화 정책에도 말이다. 
통화정책이 작동하지 않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째, 고전적 통화정책이 ‘정상적인 시대’에만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금리가 너무 높거나 낮으면, 그 상태가 오랜 기간 지속되면 표준 규칙과 모델은 깨진다. 금리정책은 일종의 충격요법이다. 하지만 경제주체가 이미 특정 상황, 즉 저금리에 길들여져 있다면 추가 금리 인하는 더 이상 충격을 주지 못한다. 마사지도 자주 받으면 그 효과가 반감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연방준비제도(연준)가 2019년 들어 두 차례나 금리를 낮췄지만 미국 경제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는 이유다. 유럽과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도 같다. 
대안으로 꼽히는 재정정책도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다. 국가마다 놓인 상황이 다르다. 재정 여력이 있는 국가도 있고, 그렇지 않은 국가도 있다. 여력이 있는 나라는 손에 꼽을 정도다. 독일처럼 재정 확대를 부담스러워하는 나라도 있다. 모든 국가가 한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할 수 없는 게 단점이다. 
 
실패 증거물
통화정책 실패를 명확히 드러내는 대표적 현상이 ‘강한 달러’다. ‘세계의 돈’인 달러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연준이 기존 달러인덱스(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 단점을 보완해 만든 무역가중달러인덱스는 사상 최고치에 이르렀다. 1997년 달러 가치를 기준(100)으로 한 이 지수는 2002년에 130 정도로 가장 높았다. 하지만 2019년 8월 중순 130을 돌파한 이후 9월 말 현재까지 130 이상에서 움직이고 있다. 미국 26개 주요 무역 대상국 통화를 상대로 한 달러 가치가 최고치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2019년 들어 연준은 7월과 9월 두 차례 금리를 내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끊임없이 달러 약세를 압박하고 있다. 그런데도 달러 가치는 계속 오른다. 미국은 전략적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미국 수출경쟁력은 떨어지고 세계의 돈으로 기능해야 할 달러도 제구실을 못하는 것이다.
사실 지금은 돈줄을 조일 때가 아니다. 글로벌 경기 둔화가 확연해지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세계의 돈이 강세를 보이는 건 트럼프와 연준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그들의 목표는 자국 경제 보호다. 하지만 글로벌 경제가 무너지는 시점에 기축통화인 달러 흐름이 역방향으로 간다는 것은 분명한 실패다. 미국은 자국 경제는 물론 글로벌 경제 방어에도 기축통화국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
시장금리와 정책금리가 몇 배 이상 벌어지는 ‘발작 증상’도 목격됐다. 9월16일부터 초단기 레포(Repo·환매조건부채권) 금리가 8.25%까지 치솟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뉴욕 연준이 개입했다. 11년 만의 개입이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시장에 530억달러(약 63조원) 정도 단기 유동성이 공급됐다. 초단기 레포란 은행과 월스트리트 딜러 등이 우량 채권을 담보로 하루 동안 쓸 달러를 빌리는 것을 말한다. 가장 활성화된 초단기 대부 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신용도가 높은 기관 사이의 신용거래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달러 흐름에 이상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달러 강세로 세계경제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성장률은 떨어지고 저물가 현상은 일반화하고 있다. 성장은 어느 정도 인플레이션의 함수다. 저물가는 저성장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저물가 원인 가운데 하나가 강한 달러다. 석유를 포함한 원자재와 상품 시장은 달러 가치에 큰 영향을 받는다. 상품 시장의 결제통화가 달러이기 때문이다. 달러 가치가 오르면 이들 상품 가격은 내려간다. 
우리는 석유 문명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류가 소비하는 제품 상당수는 석유와 그 부산물로 만들어진다. 석유 가격이 기를 펴지 못하는 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 쉽지 않은 구조다. 원자재 가격도 마찬가지다. 원자재 가격이 하락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생산가는 내려가는 게 당연하다. 이에 따라 소비자물가도 하락 압박을 받는다. 저물가로 성장 둔화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금 통화정책은 치유 방안으로 저금리에 초점을 맞췄다. 그나마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정해놓고 거기에 근접하면 다시 긴축으로 돌아서기 일쑤다. 이런 근시안적 해법으로는 생산적 자본 할당을 담보할 수 없다. 저금리만으로 돈을 돌게 할 수 없다. ‘유동성 함정’은 저금리만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유동성 함정이란 경제주체가 현금을 선호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현재 상황은 불확실성에서 비롯했다. 무역전쟁은 불확실성을 최고조로 높였다. 어떤 경제주체도 섣불리 소비나 투자에 돈을 쓰려 하지 않는다. 트럼프의 ‘판 뒤엎기’는 세계를 불확실성 속으로 몰아넣었다.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는 요원하다. 이 상황에서 통화정책이 효과를 낼 수 없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다.
 
   
▲ 2019년 9월4일 멕시코의 환전소에 내걸린 환율 표지판. 기축통화인 달러 강세로 세계 경기는 침체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REUTERS
핵심은 약한 달러
방법은 없을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세계의 돈인 달러를 푸는 것이다. 달러 약세로 그 흐름을 가속하는 것뿐이다.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세계 전체 부채는 약 240조달러로 추정된다. 글로벌 GDP의 240%에 이르는 천문학적 금액이다.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미국 달러 표시 부채다. 달러가 대외지급을 위한 준비통화이며, 미국 자본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깊고 풍부한 유동성 공급 원천이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 달러는 21세기 들어 가장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글로벌 시스템에서 달러 유동성이 점차 고갈된다는 뜻이다. 달러가 오를수록 시스템의 긴장은 고조된다. 달러 표시 부채를 안고 있는 경제주체들은 달러 구하기에 바빠진다. 자산시장 긴장도 높아진다. 자산시장 향배는 유동성에 좌우된다. 달러 가치 상승은 달러 유동성 감소를 뜻한다. 유동성이 줄면 자산시장은 하락 압박을 받게 된다. 최악은 달러 자금 의존도가 큰 신흥시장에서 발생한다. 신흥국은 유동성 위기에 빠질 수 있다. 
핵심은 달러 가치에 있다. 현재 세계경제에 자극을 주는 유일한 방법은 달러 약세를 통한 유동성 공급뿐이다. 다행히(?) 트럼프 대통령과 미 의회는 달러 약세 정책에 의견 일치를 보는 모양새다. 이런 태도는 자국 우선주의에 기초한다. 세계경제를 위한다는 대의는 아니다. 그렇지만 현재 약한 달러가 세계경제의 위험을 막아내는 수단임은 분명하다. 
연준이 금리를 내려 달러 약세를 꾀하지 않아도 미국 대통령에게는 다른 수단이 있다. 백악관은 외환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 재무부는 이 목적을 위해 950억달러 기금을 보유하고 있다. 실제 미국은 1995년 이후 세 차례 정도 시장에 개입했다. 1998년, 2000년, 2001년인데 모두 국제 유동성 공급을 위해서였다. 게다가 미국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은 양당의 지지를 어느 정도 얻었다. 
약한 달러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의회에서도 만만치 않다. 민주당 상원의원 태미 볼드윈과 공화당 상원의원 조시 홀리가 공동 발의한 볼드윈-홀리법은 미국으로 몰리는 외국자본에 세금을 부과하는 권한을 연준에 주는 내용을 담았다. 이 법안은 외국자본 유입을 억제해 달러 강세를 어느 정도 희석할 수 있다. 현재 달러 강세는 미국 주식, 채권, 기타 자산의 외국인 수요가 결정적 원인이다. 이들 자본에 과세함으로써 달러 약세를 꾀하는 것이다. 트럼프와 의회는 달러 약세로 경쟁력을 확보하는 미국 우선주의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신용 확대를 통한 자극은 점점 약해지고, 신용 전달은 구조적으로 어려워졌다. 신용의 윤활유인 미국 달러는 강해지고 공급은 감소하고 있다. 이때 미국 우선주의의 파생물인 달러 약세 정책은 의외의 효과를 낼 수 있다. 달러 약세 정책은 현시점에서 세계경제에 가장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도 완벽한 해법은 아니다. 약한 달러로 경제회복은 가능하지만 지속가능한 것은 아니다. 공급된 유동성은 언젠가는 회수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달러 가치를 입맛대로 조절할 수 있다. 문제는 국제적 합의가 아닌 미국의 자의적 결정이라는 데 있다. 미국만의 이익을 위해 조절되는 달러 가치는 세계경제의 복병이자 함정이다. 세계경제는 반세기 훨씬 넘는 기간 미국 달러에 너무 큰 영향을 받아왔다. 한 나라가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통화패권의 부작용이다. 이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한, 달러 약세를 통한 회복도 단기 처방에 불과할 수 있다. 
 
* 윤석천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금융시장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금융 관련 책들을 썼으며, 특히 외환과 관련해 많은 강의를 해왔다. <한겨레> ‘세상읽기’를 연재했으며, 현재 팍스TV <이슈포커스>에 출연하고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를 그리워한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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