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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로 40kg 감량한 독서광
[People] 샤넬의 전설, 카를 라거펠
[108호] 2019년 04월 01일 (월) 토비아스 베커 등 economyinsight@hani.co.kr

카를 라거펠트는 독일 함부르크의 연유 제조업자 오토 라거펠트의 아들로 성장했다. 아버지 공장은 발트해 연안 노이슈타트에 있었지만, 가족은 함부르크 근교 부촌 블랑케네제의 바우르스파크에 살았다. 

토비아스 베커 Tobias Becker 울리히 피히트너 Ullrich Fichtner 로타르 고리스 Lothar Gorris 알렉산더 퀸 Alexander Kühn 브리타 잔트베르크 Britta Sandberg 클라우디아 포크트 Claudia Voigt <슈피겔> 기자

 
▲ 2000년 즈음 40㎏ 이상 감량한 뒤, 라거펠트는 자기 모습의 특징적인 성격을 한층 더 강화했다.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것은 그에게 자기 절제의 표현이었다. 다른 사람의 비만을 혹독하게 비난했는데, 가수 아델도 “너무 뚱뚱하다”는 소리를 공개적으로 들었다. REUTERS

 

 
수년 전 <차이트>는 블랑케네제에서 찍은 라거펠트의 흑백사진을 공개했다. 그는 이곳 어린 시절에 살던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빌만스파크에 저택을 구입했다. 사진에는 커튼이 드리워진 열린 창문 사이로 엘베강이 보였다. 그는 “내가 태어난 바우르스파크 No.3 어린이 방 창문을 통해 본 풍경이 나의 첫 기억이다. 안개, 바람, 얇은 커튼을 통해 희미하게 보이는 엘베강 풍경과 뱃고동 소리. 반백 년이 지난 뒤 바우르스파크와 가까운 빌만스파크에 있는 내 집에서 그때와 비슷한 인상과 기분을 느꼈다”고 썼다. 이 수백만유로짜리 대저택을 구입한 것은 라거펠트가 자신의 기원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말해준다. 하지만 그는 불과 몇 년도 안 돼 저택을 다시 팔았다. 이것으로 보아 한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언젠가는 그에게 아무 상관 없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 라거펠트가 블랑케네제에서 살았던 시절은 그리 길지 않다. 1934년 가족은 함부르크 북부에 있는 농장으로 이사했다. 그는 1949년에야 전쟁으로 파괴된 함부르크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함부르크 시민’(부르주아 계층을 의미)의 상업 정신은 라거펠트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인생에 영향 미친 어머니
어린 시절 이후 오랫동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어머니 엘리자베스였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무관심에 가까울 정도로 관용적으로 그를 키웠다. “나는 이 점에 대해 어머니께 대단히 감사드린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와 똑같이 행동한다.” 어머니는 그에게 매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헛소리하려면 빨리 말해라. 나는 시간이 없어.” 차가운 어투로 말한 뒤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곤 했다.
 
14살이 되자 그는 담배를 피우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도 골초였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너는 손이 별로 예쁘지 않으니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질문하면 아들은 되도록 신속하게 유쾌한 대답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상류층 가족이라면 으레 그랬던 것처럼 일찍부터 아들에게 독립심을 기대했다. 결혼하기 전 베를린에서 판매원으로 일했던 어머니는 다른 상류 계급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회적 위치, 신분에 자부심과 이를 지키려는 의지가 강했다. 라거펠트 가족의 준거집단은 귀족 계급이었다. 하인들이 아이들을 돌봤고, 가족 간에도 서로 거리를 두면서 진지하고 관대하게 대했다. 미학적 요구도 높았다.
 
1953년 라거펠트는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어머니는 “함부르크는 세계의 관문이지만, 결국 문에 불과하다. 그러니 너는 여기에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라거펠트의 명언이 됐다. 학생 시절 이미 그는 그림과 패션 스타일로 주목받았다. 1954년 파리에서 국제양모사무국이 주최한 신인 디자이너 경연대회에 참여해, 울코트 부문 1등을 했다. 같은 대회에서 이브 생로랑은 이브닝드레스 부문에서 1등을 했다. 두 디자이너는 이곳에서 처음 만났다. 하지만 친분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21살에 생로랑은 이미 크리스티안 디오르의 후계자가 돼 재능이 있는 자에게 어떤 길이 열려 있는지를 과시했다. 라거펠트도 성공했지만 이브 생로랑만큼은 아니었다. 
 
 
▲ 로즈우드호텔 체인의 프랑스 파리 호텔 드크리옹 내에 있는 카를 라거펠트가 디자인한 슈페트 룸. 슈페트는 생의 마지막 파트너였던 반려 고양이의 이름이다. REUTERS
이브 생로랑과의 악연
1960년대 클로에 수석디자이너였던 라거펠트는 생제르맹 거리에 있는 카페 드플로르를 자주 방문했다. 이곳에서 그는 외눈 안경을 쓰고 거리 풍경을 관찰하며, 종이에 패션 스케치와 드로잉을 했다. 라거펠트가 디자인한 치마는 길이가 점점 더 짧아졌고, 그는 로맨틱한 블라우스를 만들었다. 거기에 다량의 체인과 술 장식이 더해졌다. 브리지트 바르도, 마리아 칼라스, 그레이스 켈리, 미아 패로가 그의 고객이었다. 
 
그는 앤디 워홀의 <사랑>(L’Amour)이라는 영화에서 ‘칼’이라는 이름의 제비족 역할로 출연해 모델 도나 조던과 딥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찍었다. 이 시기에 파리의 패션 디자이너 팔로마 피카소(파블로 피카소의 딸)도 지인 중 한 사람이었다. 어느 여름 라거펠트는 그녀와 함께 바다에 가서 검은색 수영복을 입고 바닷가에 앉아 있는 모습을 사진 찍기도 했다. 당시 사진은 헬무트 뉴턴이 찍었다. 라거펠트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큰일로 여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으면 그는 어머니 말을 빌려 대답했다. “어떤 사람은 금발이고, 너는 게이다.”(머리색이나 성적 성향이 각자 다르고, 당연한 일이라는 의미 -편집자)
 
라거펠트 연인은 자크 드바셰어라는 이름의 잘생긴 멋쟁이 신사였다. 그는 1989년 에이즈로 사망했다. 라거펠트가 일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드바셰어는 라거펠트와 생로랑 사이에 불화의 원인이기도 했다. 드바셰어가 생로랑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이후 두 패션 디자이너는 서로에게 악의적인 발언을 남겼다. 2008년 생로랑이 죽은 뒤 그의 반려자였던 피에르 베르제는 이렇게 말했다. “이브 생로랑은 카를 라거펠트를 단 한순간도 라이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생로랑의 라이벌이 아니었다. 하지만 라거펠트가 샤넬에서 한 일, 샤넬 전통을 계승하면서 현대적인 감각을 더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라이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창조자이자 마케팅 전문가, 그리고 패션이 재단·소재·색상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으로서 라거펠트는 항상 생로랑의 라이벌이었다. 1988년 라거펠트는 클라우디아 시퍼를 발탁해 ‘샤넬걸’로 만들었다. 금발과 살짝 위로 들린 코를 가진 시퍼는 샤넬을 젊은 세대에게 어필하는 이미지의 모델이었다. 트위드 코르사주와 체인은 시퍼에게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렸다. 당시 그녀는 슈퍼모델 중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 라거펠트 패션의 기이한 독일적인 요소, 독일 전통과 동화적인 스타일이 반영된 디자인을 돋보이게 해줬다. 라거펠트 사망 후 시퍼는 자신에게 라거펠트는 수줍은 독일 소녀를 슈퍼모델로 변신시켜준 ‘요정 가루’였다고 말했다. 
 
▲ 라거펠트는 1976년부터 공개 석상에서 항상 뒤로 묶은 머리를 하고, 맹인 가수 레이 찰스에게 영감받아 선글라스를 썼다. 부채 역시 오랫동안 그를 상징하는 물건 중 하나인데, 부채를 사용해 담배 연기와 파파라치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 REUTERS
뒤로 묶은 머리, 선글라스
라거펠트는 빛나는 존재감에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투명 망토를 만들어냈다. 이 가면은 그가 원하는 대로 후퇴와 휴식, 집중과 삶의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 “나는 내가 잘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었다. 나는 나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는 사치를 즐긴다.”
 
무수한 부고에서 위대한 아웃사이더였던 남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생전에는 흥미롭지만 항상 낯설고 별난 느낌이었다면, 사후에는 존경과 온기가 바쳐졌다. 라거펠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스러울 정도로 무미건조하다”고 말했다. 그는 과도한 경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아부는 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날려버렸다. 라거펠트는 언제나 사람과 일정 간격을 뒀다. 인류와 그의 관계는 프랑스 생물학자이자 철학자 장 로스탕과 곤충의 관계와 비슷했다. “나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와 반대로 사람들이 나를 관찰하는 것은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24시간 연기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 자신 앞에서도.”
 
그는 외형이 인간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1976년부터 공개 석상에서 항상 뒤로 묶은 머리를 하고 선글라스를 썼다. 맹인 가수 레이 찰스 공연을 보고 그는 닫힌 공간 안에서 선글라스가 얼마나 함축성 있는 액세서리가 될 수 있는지 깨달았다. 라거펠트는 레이 찰스의 선글라스와 비슷하지만 안경다리는 더 넓은 모델을 구했다. 손부채 역시 오랫동안 그를 상징하는 물건 중 하나였다. 그는 부채를 사용해 멀리서 그를 촬영하는 파파라치와 담배 연기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
 
비만 혹독하게 비난
라거펠트는 2000년쯤 40㎏ 이상 감량한 뒤 자기 모습의 특징적인 성격을 한층 더 강화했다.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것은 그에게 자기 절제의 표현이었다. 그는 평생 몸무게와 싸웠다. 살이 쪄서 약점을 노출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섹시해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좋은 옷걸이가 되려고 다이어트를 했다.” 
 
다른 사람의 비만은 혹독하게 비난했다. 영국 가수 아델은 그로부터 “너무 뚱뚱하다”는 소리를 공개적으로 들어야 했다. 다이어트를 한 뒤 그는 30사이즈 데님 바지와 슬림핏 양복에 깃이 높은 셔츠를 입고 대중 앞에 나섰다. 선글라스와 뒤로 넘겨 묶은 머리는 계속 유지했다. 백발이 되자 그는 머리카락에 흰색 파우더를 뿌리기 시작했다. 높은 깃과 손가락 부분이 없는 장갑은 늙어가는 목과 어머니 엘리자베스만큼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을 손을 덮는, 기능성과 스타일을 겸비한 실용적인 아이템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라거펠트는 어머니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서, 페미니스트가 될 만큼 못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독일 정부가 유대인 최악의 적 수백만 명을 독일 안으로 유입시킬 수도 있다”면서 무슬림 이민에 반대했다. 2018년 프랑스 잡지 <르푸앵> 인터뷰에서는 “난민정책 때문에 앙겔라 메르켈을 증오한다”고 말했다. 이 정책으로 메르켈이 독일 극우 정당 AfD(독일을 위한 대안당)에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메르켈이 독일 역사를 망각했기에 네오나치가 100명이나 연방의회에 들어왔다.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독일 국적을 포기할 것이다.” 그렇다고 라거펠트가 프랑스인이 되고 싶어 한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국가를 좋아하지 않는 코즈모폴리턴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통제력을 잃지 않는 것 외에 라거펠트가 가진 또 다른 삶의 원칙은 책임 거부다. 그는 말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려 했다. 2015년 <슈피겔> 인터뷰에서 “왜 자신의 회사를 운영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책임감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가족도 이루지 않았고, 회사도 세우지 않았다. 자유를 잃는 가장 쉬운 방법을 알고 싶다면, 회사를 설립해라. 나는 안 한다.”
 
극단적인 자유주의자
그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자, 뼛속부터 자유주의자다. 4년 전 재단과 같은 인도주의적 분야에 재능이 없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가 재단을 만든다면 기회주의적으로 보일 것이다. 게다가 그는 쉽게 질리는 나쁜 버릇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고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아니라고 부인해야겠지만 사실이다. 실제로 나는 관대하다. 하지만 그걸 굳이 널리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가정교육 문제이기도 하다. 어릴 적 나는 걸인에게 돈을 주지 못했다.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고, 그 사람이 걸인에게 주게 했다. 그 행위로 나를 위한 만족을 얻고 싶지 않았다.” 
 
극단적인 개인주의 성향은 그를 괴팍한 고독으로 이끌었다. 예를 들어 그의 점심 식사는 옆집에서 요리사가 만든다. 그가 음식 냄새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19세기 린넨 침구를 사용하고, 속옷은 한 번만 입는다. 생의 마지막 파트너는 고양이였다. 사람들이 사진 찍는 것을 조용히 견디는 라거펠트의 반려묘 슈페트는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 데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버마고양이다. 라거펠트는 고양이를 위해 전속 요리사를 고용하고, 슈페트 이름으로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했다. 슈페트도 스타가 됐다. 오펠은 라거펠트가 찍은 슈페트 사진으로 판촉 달력을 만드는 대가로 300만유로(약 38억원)를 지급했다.  
 
라거펠트는 30만 권의 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중 7만 권은 그의 사진 스튜디오에 있는 4~5m 높이의 책장에 꽂혀 있다. 실내 수영장만큼이나 넓은 공간이다. 
 
 
▲ 2019년 프랑스 파리 패션위크에 참석한 모델 클라우디아 시퍼. 라거펠트는 1988년 시퍼를 발탁해 ‘샤넬걸’로 만들었다.REUTERS
독서광이자 장서가
독일 괴팅겐의 출판업자 게르하르트 슈타이들은 오랫동안 라거펠트의 서적과 재판을 담당했다. 슈타이들은 요제프 보이스(독일 퍼포먼스 예술가), 귄터 그라스(독일 노벨문학상 수상자) 같은 사람과 함께 일했지만, 그중 가장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라거펠트라고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가 책을 정말 읽는지 의심했다. 그러다 어느 날 책장에서 아무 책 한 권을 뽑아, 그 책을 놓고 라거펠트와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그는 책의 모든 내용을 이야기했다.” 
 
라거펠트가 활동하는 도시엔 그가 항상 즐겨 찾는 서점이 있었다. 미국 뉴욕 리졸리서점, 독일 베를린 뷔셔보겐서점, 함부르크 펠릭스유트서점 등이다. 그는 책을 상자 단위로 파리로 가져왔다. 파리에는 직접 운영하는 서점이 있었다. ‘7L’이라는 이름의 서점으로, 거장이 관심을 갖는 책만 팔았다. 박물관처럼 큐레이팅된 서점이다. 
 
슈타이들은 1991~92년 라거펠트에게 자신과 함께 사진집을 출판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라거펠트는 그럴 생각이 없다고 했다. 사진집은 대부분 인쇄 질이 좋지 않아서 사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한데 뭉쳤다. 2010년 슈타이들과 라거펠트는 함께 ‘라거펠트 슈타이들 인쇄출판’(Lagerfeld Steidl Druckerei Verlag)이라는 출판사를 만들어 약칭 ‘L.S.D’로 불렀다. 마약 같은 책, LSD처럼 잠재의식을 확장시키는 책이라는 의미다. 라거펠트의 아이디어였다.
 
아침형 인간인 슈타이들이 새벽 4시30분에 책상 앞에 앉으면, 아이디어 스케치와 몇 가지 질문이 담긴 라거펠트의 팩스가 도착해 있었다. 바로 답하지 않으면 1시간 뒤 팩스를 읽어보지 않았느냐며 그에 대한 코멘트를 청하는 팩스가 또 왔다고 한다. 라거펠트는 주말에도 아침 7시부터 전화를 걸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두 사람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라거펠트의 정치풍자 일러스트를 모은 <카를리카투렌>(Karlikaturen·캐리커처들)이라는 책을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라거펠트는 표지에 관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전하고, 함부르크의 펠릭스유트서점에서 출판기념회를 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날짜는 정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연초 알스터(함부르크의 강과 그 강의 물을 가둬 만든 호수, 둘 다 함부르크의 상징 -편집자) 인근은 아직 춥고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좀더 따뜻한 5월이 좋겠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5월이 더 좋다고!” 
 
* 2019년 4월호 종이잡지 29쪽에 실렸습니다.
 
ⓒ Der Spiegel 2019년 9호
L’Égoïste
번역 황수경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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