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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흥행작의 비밀
[Culture & Biz] 진화하는 여성 캐릭터
[107호] 2019년 03월 01일 (금) 김윤지 yzkim@koreaexim.go.kr
김윤지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연구위원
 
   
▲ 1930년대 독립군 암살단의 활약을 그린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 포스터. 쇼박스 제공
2018년 우리 사회를 관통한 열쇳말은 단연 ‘미투’다. 법조계부터 정치계, 학계, 연예계, 체육계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 있던 곪은 상처들이 터져나왔다. 용기를 낸 피해자의 고백에 많은 사람이 경악했다. 분노와 탄식, 지지와 반성이 쌓이며 사회도 조금은 변화했다. 여성 권리에 대한 논의가 늘어났고, 곳곳에 밴 남성중심주의를 다시 생각하는 흐름도 이어졌다. 
 
이런 변화가 미디어 속 여성상에도 영향을 주었을까. 사람들 취향이 가장 빠르게 반영되는 TV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이전과 달리 당당한 여성에 대한 선호가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코미디언 이영자가 연말 지상파 TV 연예대상에서 여성 최초로 대상을 받은 것은 이런 시대적 변화 덕분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예능인 브랜드 평판 1위를 거머쥔 박나래, 다양한 기획력을 발휘한 송은이, 걸크러시 매력이 돋보이는 김숙 등 어느 때보다 씩씩한 여성 예능인이 많이 보인다. 
 
수익성 높은 여성 주도 영화
캐릭터가 더 도드라지는 영화와 드라마에도 이런 흐름이 반영됐음직하다. 미투 불씨가 먼저 타오른 미국에서는 이미 변화가 자리잡았다. 최근 미국 영화에선 여성 배우들이 주도한 영화가 남성 주도 영화들보다 더 흥행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편견을 뒤집는 결과다. 일반적으로 영화산업에서는 여성보다 남성 배우의 흥행력이 더 높은 것으로 여겨졌다. 
 
미국의 대표적 엔터테인먼트 기획사인 CAA와 민간연구소 시프트7이 2014~2017년 흥행한 미국 영화 350편을 분석해 이런 결과를 얻어냈다. 분석 대상 350편 가운데 여성 주도 영화는 105편이었다. 이런 연구에서 ‘여성 주도 영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의외로 까다로운 문제다. 몇몇 영화는 제목만 들어도 바로 분류가 가능하지만 실제 많은 영화가 남녀 공동 주연인 경우가 많아 남성 주도와 여성 주도를 가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서는 공식 언론 자료나 오프닝 크레디트에 여성 배우 이름이 가장 먼저 오른 것을 여성 주도 영화로 분류했다. 물론 이런 분류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내용 면에서 여성이 주도하더라도 마케팅 등을 위해 유명 남성 배우를 앞세우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에서 주인공은 레이 역을 맡은 데이지 리들리였지만 공식 언론 자료에는 해리슨 포드가 가장 먼저 언급됐다. 배우의 마케팅 활용도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측면에서 연구진은 이 방법을 채택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제작비 규모를 기준으로 다섯 구간으로 나누었을 때 모든 구간에서 여성 주도 영화의 흥행력이 더 높았다. 제작비 1천만달러(약 113억원) 이하의 저예산 영화든, 1억달러(약 1130억원) 이상의 블록버스터든 여성이 주도했을 때 더 많은 관객을 끌어모았다는 이야기다.
 
영화의 성평등 지표
연구진은 영화의 성평등 시험지로 잘 알려진 ‘벡델 테스트’도 했다. 벡델 테스트는 1985년 미국의 여성 만화가 엘리슨 벡델이 영화에 최소한의 젠더 개념이 반영됐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다음 세 기준을 충족하는지를 측정한다.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두 명 이상 등장하는지, 이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지, 이들의 대화 내용이 남성과 관련 없는지다. 
 
세 조건을 모두 충족하면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라고 말한다. 여성 캐릭터 비중이 최소한은 반영된 영화라는 의미다. 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각본 단계부터 여성 캐릭터 역할이 축소되거나 무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측정 방식이 손쉬워 성평등 관점에서 영화를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테스트다. 
 
CAA 연구에 따르면, 분석 대상 350편 가운데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모두 192편(55%)이다.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들은 모든 제작비 구간에서 그렇지 않은 영화보다 수익성이 높았다. 제작비 1억달러(약 1120억원) 이상에서는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의 평균 수익이 50%나 높았다. 돈을 많이 들이는 영화에선 남녀 캐릭터를 고르게 잘 활용해야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글로벌 수입이 10억달러를 넘는 영화는 모두 이 테스트를 통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쥬라기 공원>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분노의 질주: 더 세븐> <주토피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등 애니메이션을 포함해 총 11편이다. 공상과학(SF), 액션,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여성 배우 불모지였던 히어로 영화에도 여성 캐릭터 활약이 두드러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에선 ‘다양성’이란 가치가 오래전부터 존중된 덕에 여러 인종과 성별 캐릭터들이 영화에 고르게 자리를 잡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여성이 주도하거나 여성 캐릭터가 더 활발하게 나오는 영화는 관객 호응도도 더 높다는 것이 데이터로 확인됐다. 
 
   
 
2018년 한국 영화의 진화
그럼 우리나라 상황은 어떨까?
 
2004~2018년 ‘천만 관객’을 돌파한 한국 영화는 2005년 <왕의 남자>부터 2018년 <신과 함께: 인과 연>까지 모두 15편이다. 여성 주도라고 할 만한 영화는 아쉽게도 전지현이 주연한 <암살>밖에 보이지 않는다. 벡델 테스트를 해보면 <국제시장> <도둑들> <광해, 왕이 된 남자> <해운대> <괴물>을 포함해 6편이 통과했다. 전체의 40% 정도다. 할리우드 고수익 영화에는 미치지 못하는 결과다.
 
하지만 2018년에 나온 영화로 한정하면 사정이 조금은 나아졌다고 하겠다. 2018년에 개봉한 영화 가운데 29편이 관객 100만 명 이상을 동원했다. 이 가운데 여성 주도 영화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국가부도의 날>(김혜수 주연), <마녀>(김다미), <협상>(손예진), <도어락>(공효진), <리틀 포레스트>(김태리) 5편이다. <협상>은 손예진·현빈 공동 주연이지만, 공식 자료에는 손예진 이름이 먼저 나온다. 천만 관객 영화 15편 가운데 여성 주도 영화 비율이 7%인 데 견줘, 2018년 중수익 이상을 거둔 29편에서 그 비율이 17%로 늘었다.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도 <완벽한 타인> 등 모두 14편으로 분석 대상 절반에 육박한다(표 참조). 할리우드 영화(55%)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 전년보다 크게 늘었다. 2017년 ‘백만 관객’을 넘어선 27편 가운데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군함도> <아이 캔 스피크> <특별시민> <장산범> <악녀> 5편밖에 되지 않았다. 
 
정리하면, 천만 관객을 불러모으는 고수익 한국 영화에서는 아직 여성 캐릭터의 힘이 미약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박’ 이상을 거두며 영화시장 저변을 이끄는 영화에서는 여성들이 약진하고 있다고 하겠다. 
 
벡델 테스트의 한계를 지적하며 여성 캐릭터 수만 늘어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평가절하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모든 현상은 ‘양질 전환의 법칙’을 따르는 법이다. 일정 규모 이상 양이 축적돼야 질적 전환이 일어난다. 일단 양이 늘어야 좋고 나쁜 것이 선별될 수 있다. 기업 여성 임원이나 의회 여성 의석 비율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2018년 한국 영화에선 멜로나 로맨스가 아닌 장르의 여성 캐릭터가 늘어난 것에 더 후한 점수를 줘도 되지 않을까 싶다. 여성 주도라고 하더라도 비련의 주인공이나 로맨스에 목매는 연약한 인물뿐이라면 긍정적 현상으로 보기 어려웠을 터다. 특별한 능력의 여성 캐릭터가 탄생한 <마녀>나, 경제라는 전문 영역에서 여성 캐릭터들을 앞세운 <국가부도의 날> 같은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좀더 주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 김윤지 연구위원은 한겨레신문사에서 발행한 경제주간지 <Dot21> <Economy21>에서 산업부·경제부 기자를 했고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한국 중소기업의 대기업 종속성과 관련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에서 정보기술(IT) 산업, 문화콘텐츠 산업, 중소기업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연재를 통해 문화산업을 경제학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 접근해갈 계획이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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