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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클리셰의 진화
[Culture & Biz] 영화 <아쿠아맨>의 성공 비결
[106호] 2019년 02월 01일 (금) 문동열 rabike0412@gmail.com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 정통 슈퍼히어로 영화로 인기를 모은 <아쿠아맨>의 주연 배우들이 2018년 12월12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시사회에 참석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REUTERS
현대 콘텐츠산업에서 최종 소비자인 대중의 힘은 막강하다. 아무리 잘 만든 콘텐츠도 대중이 외면하면 콘텐츠 제작에 들어간 시간과 돈을 포함해 제작자의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그러다보니 대중의 바람을 제대로 읽어내 콘텐츠에 반영하는 것이 제작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됐다. 창작자의 예술적 감성을 오롯이 담아내고 대중을 자신의 창작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은 점점 과거의 방식이 되고 있다. 또 콘텐츠 제작자에게 기회이기도 한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수많은 경쟁자 사이에서 자신의 콘텐츠를 돋보이게 해야 하는 어려움을 키웠다. 
 
이런 무한 경쟁에서 제작자는 흥행 위험 요소를 최소화하려 애쓴다. 기존 콘텐츠에서 흥행했던 요소를 적극적으로 모방, 차용하기 시작했다. 모방한 흥행 요소로 성공을 거두는 콘텐츠가 늘어나자, 콘텐츠업계에는 ‘성공 공식’이 생겼다. 이것이 현대 대중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클리셰’(cliché)의 탄생 배경이다.
 
정통 슈퍼히어로 영화
‘상투어’란 뜻의 클리셰는 원래 인쇄 연판을 가리키는 프랑스어다. 납 활자를 이용해 인쇄하던 시절, 많이 쓰는 상용구를 미리 조판해 판짜기의 효율을 높이는 기술의 하나였다. 활판인쇄가 거의 사라진 요즘 대중문화에서 클리셰는 자주 쓰는 맥락, 스토리라인, 인물상 등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유행이나 사람들의 보편적 생각을 콘텐츠 창작에 반영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일로 볼 수 있다. 
 
클리셰가 대중문화에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에는 사람들이 즐기는 유행이나 선호하는 트렌드라는 말을 대신해 쓰이기도 했다. 다매체 시대로 접어든 2000년대 후반, 콘텐츠산업 경쟁이 심해지자 많은 제작자가 대중에게 자신의 콘텐츠를 더 많이 노출시키기 위해 클리셰를 의도적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이후 새 작품을 제작할 때 이전 작품들에서 모방한 성공 공식이나 흥행 요인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창작이 새로운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전 작품에서 받은 영감이나 영향력에 기인한 2차 창작도 있다. 그렇다고 많은 제작자가 너나없이 클리셰를 차용해 콘텐츠를 만들다보니 부작용을 피할 수 없었다. 클리셰 남용으로 서로 다른 콘텐츠에서 비슷한 클리셰가 넘치게 된 것이다. 클리셰 남용은 결국 클리셰의 의미가 ‘진부한’ 또는 ‘틀에 박힌 표현’을 뜻하는 것으로 바뀌는 데 이르렀다. 
 
클리셰를 남용하는 콘텐츠를 꼬집어 ‘클리셰에 충실한 작품’ 또는 ‘클리셰가 넘쳐나는 작품’이라고도 한다. 클리셰 남용으로 진부한 작품이 되어버렸음을 비꼬는 것이다. 클리셰의 부정적 의미가 일반화되니 최근에는 클리셰를 다시 한번 뒤틀어 반전의 재미를 주는 콘텐츠도 나온다. ‘클리셰 파괴’ 콘텐츠다.
 
파괴는 클리셰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진부해진 클리셰를 재활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존 것을 뒤틀어 다른 이미지를 부여하려 하지만, 그 원천은 결국 상투적 클리셰이기 때문이다.
 
클리셰는 고정불변이 아니다. 오히려 변동성이 크고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이다. 사람에 따라 클리셰를 싫어하기도, 좋아하기도 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비슷한 클리셰에 많이 노출된 사람들은 진부하다고 평가할 것이고, 처음 노출된 사람들은 신선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여러 팬덤 현상을 보면, 팬들은 이미 비슷한 클리셰에 많이 노출돼 제작자가 심어놓은 클리셰를 쉽게 파악한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해온 클리셰가 새 작품에서 사라지면 오히려 불쾌감을 느낀다. 
 
2018년 개봉한 슈퍼히어로 영화 <아쿠아맨>이 좋은 예다. <아쿠아맨>은 개봉 보름 만에 한국 관객 400만 명을 돌파했다. 그동안 미국 코믹스 양대 산맥의 하나인 마블에 밀려왔던 DC 슈퍼히어로 영화의 암흑기에 한 줄기 빛을 비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쿠아맨>은 과거 DC 영화들이 주었던 실망에서 비롯한 많은 우려를 안고 출발했다. 그러나 슈퍼히어로 영화의 클리셰를 충실하게 영화에 담으며, 그동안의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잇따라 보인 클리셰 파괴와 비틀기에 지친 팬들에게 환영받았다. 진부한 클리셰에 충실한 것이 오히려 간만에 제대로 된 슈퍼히어로 영화라는 좋은 반응을 부른 것이다. 
 
   
▲ 인도 뭄바이 주요 거리의 광고판에 대표적인 주문형 동영상 서비스 업체인 넷플릭스가 제작한 인도 텔레비전 드라마 <신성한 게임>의 광고가 걸려 있다. REUTERS
클리셰와 아키타입
클리셰는 그 복잡성과 예상 불가능한 변수들로 사용 부담이 예전보다 커졌다. 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제작 요소로 남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것이 클리셰가 현대 대중문화에서 차지하는 본질적 의미이기도 하다.
 
클리셰의 본질은 대중의 욕망이다. 대중이 원하는 것을 콘텐츠에 투영해 욕구를 충족시킨다. 클리셰는 일상 곳곳에서 흔히 보인다. 스테레오타입이라는 전형적 인물, 뮤직비디오나 스포츠 중계의 카메라 구도, 예능 프로그램의 특정 장면에 꼭 나오는 배경음악 등도 넓은 의미에서 클리셰라고 할 수 있다. 클리셰는 제작자에게 양날의 칼이다. 잘 쓰면 약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진부한 것으로 매도되고 외면당한다. 클리셰는 진부한, 틀에 박힌 표현의 동의어로 쓰이지만 진화를 거듭해 완성형으로 발전하면 더는 그런 비난을 받지 않는다. ‘원형’이라는 아키타입(Archetype)으로 승격된다.
 
이 둘은 착각하기 쉽다. 아키타입은 원형 또는 전형으로 번역된다. 진부함을 주는 클리셰와 달리 아키타입은 사람의 본성, 습성, 심리 저변에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문화 요소를 뜻한다. 수없이 차용되더라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다. 권선징악형, 영웅형 서사 구조를 예로 들 수 있다. 수천 년 동안 구전설화에서 최근의 슈퍼히어로 영화까지 끊임없이 반복되며 수많은 콘텐츠가 파생됐다. 대표적으로 범죄·스릴러 장르에서 아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나 판타지 장르에서 존 로널드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클리셰를 넘어 원형으로 자리잡았다. 이런 고전 원형을 활용한 콘텐츠 제작은 대중이 더 쉽게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또 익숙한 원형을 약간 변형하는 것만으로도 신선함을 줄 수 있다. 많은 제작자가 콘텐츠 원형을 발굴하는 데 주력하는 이유다.
 
원형을 포함한 클리셰는 이제 대중문화는 물론 비즈니스에서도 빠뜨릴 수 없는 필수 요소로 거듭났다. 특히 미국 할리우드나 일본 애니메이션 같은 흥행 산업에서는 일찍부터 많은 클리셰를 적극 연구해 새 작품에 필수적으로 반영해왔다. 클리셰가 투자 유치 등 제작비 확보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흥행 성공에 따른 수익 못지않게 실패로 인한 손실 위험도 크기에 투자자들은 낯선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제작자는 기획 단계부터 클리셰를 활용한다. ‘이미 시장에서 검증받은 소재’임을 부각해 투자자들의 부담감을 누그러뜨린다. 기업 마케팅에도 클리셰 활용은 도움이 된다. 마케팅에서 대중이 원하는 것을 찾아내 자사 상품의 이미지와 연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많은 콘텐츠에서 증명이 끝난 클리셰를 가져다 쓰는 것은 마케팅의 안정성을 높인다. 물론 너무 진부한 것은 역효과를 내겠지만.
 
클리셰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몇 차례 변화했다. 지금 같은 콘텐츠 홍수 시대에는 대중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 제공하는 맞춤형 콘텐츠가 중요해졌다. 예술에서 흥행물로 바뀌는 콘텐츠산업에서 클리셰의 역할은 갈수록 더 주목받는다. 또 창작 영역에서 클리셰는 인공지능(AI)이 콘텐츠산업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는 기본 데이터 구실을 한다. 
 
콘텐츠산업의 기본 데이터
예를 들어 제작자들이 많이 참조하는 미국의 ‘TV 트롭스(Tropes)’라는 커뮤니티 사이트가 있다. 대중매체 전반을 아우르는 이 사이트는 현존하는 대중문화의 모든 클리셰를 다룬다. 클리셰 자체의 분석부터 클리셰 출현 이유의 사회학·심리학적 분석까지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든다. 여기 나오는 클리셰들을 무작위로 뽑아 캐릭터를 만드는 제작자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특히 넷플릭스 같은 멀티미디어 OTT(인터넷 동영상) 서비스는 클리셰를 키워드로 사용자 취향을 데이터로 분석해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한다. 비록 클리셰를 남용하여 진부한 표현과 동의어가 되었지만 지금 같은 콘텐츠 무한경쟁 시대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대중의 욕구를 형태화하고, 수많은 콘텐츠를 통해 시행착오와 검증까지 거친 훌륭한 빅데이터 자료라는 측면에서 재조명을 받고 있다.  
 
* 문동열은 영상콘텐츠 스타트업 레드브로스 대표로 저비용·고효율의 한국형 영상콘텐츠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미디어마케팅을 전공했고 SBS 콘텐츠허브에서 방송 프로그램 제작을 담당했다. 또한 IBK기업은행 문화콘텐츠금융부에서 콘텐츠 금융과 콘텐츠 기업 컨설팅을 맡았다. 방송 제작과 금융에 모두 정통한 문화콘텐츠 산업의 전문가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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