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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제 일자리’ 미련을 버릴 때
[경제와 책]
[95호] 2018년 03월 01일 (목) 이코노미 인사이트 economyinsight@hani.co.kr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아리엘 키루 지음 | 권오룡 옮김 | 문학과지성사 펴냄 | 1만2천원
 
최대연 편집자 cdypress@moonji.com
 
나는 1983년에 태어났다. 브라운관 텔레비전으로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는 장면을 보았고, 친척 중에 삼촌이 가장 먼저 PCS폰을 장만했을 때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이터랄 게 딱히 없던 어린 시절에는 친구들과 골목골목 누비며 얼음땡, 탐정놀이, 다방구를 했다. 중학생 때는 친구들과 용돈을 모아 비디오대여점에서 임청하, 장국영, 여명 등이 나오는 홍콩 영화 VCR 비디오를 수없이 빌려 보았으며 드디어 집에 ‘486 컴퓨터’가 생기자 각종 게임을 섭렵할 수 있었다. 삐삐에서 광케이블을 거쳐 스마트폰까지, 나의 성장기는 기술발달과 궤를 같이했다.
 
 
 
며칠 전 서울 광화문 광장을 걷다가 우연히 평창겨울올림픽 행사 부스에 들렀다. 5세대(5G) 무선통신 신기술을 소개하는 부스로, 가상현실(VR) 기기를 쓰고 봅슬레이를 타보거나 성화 봉송 주자가 되어보고, 모션 인식 기능을 도입한 촬영 영상으로 아이스하키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다각도로 볼 수 있는 가상체험 공간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임시 건물이지만 다양한 5G 체험을 제공하는 그곳은 가상공간으로 연결돼 무한대로 늘어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불과 30여 년 만에 기술혁신은 놀라워 할 틈도 없이 너무 빨리, 익숙하게 생활 곳곳에 파고들었다. 4차 산업혁명은 이미 우리 눈앞에 다가와 있다.
 
2016년 세계경제포럼(WEF)은 ‘일자리의 미래 보고서’에서 2020년까지 일자리 710만 개가 사라지고 200만 개가 새로 탄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세계경제포럼은 2018년에도 ‘분열된 세계에서 공동의 미래 창조’라는 주제로 인공지능과 자동화 문제 등을 다뤘다. 자동화로 단순노동은 사라지고, 빈부 격차는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술과 매체에 대한 독창적인 연구 성과를 통해 전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프랑스 기술철학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이런 진단의 선봉장 격으로 보인다. 자동화로 향후 20년 안에 임금제 고용에 기초한 사회가 소멸하리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일자리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붕괴되고 국가권력과 경제구조의 재편이 불가피할 것이다. 이 엄청난 변화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스티글레르의 신간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는 이 질문에 천착하는 책이다.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예측은 불길한 소식으로 들린다. 그렇다고 200년 전 러다이트처럼 컴퓨터와 스마트 기기를 부수며 반기를 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관건은 어떻게 변화를 맞이할 것인가다. 스티글레르에 따르면, 케인스와 루스벨트의 복지국가 모델은 임금제를 기반으로 하는 재분배 시스템이었는데, 이는 특히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를 기점으로 구조적 상환 불능에 처했음이 드러났다. 이제는 패러다임을 바꿀 때다.
 
고용 없는 성장이 가속화된 세상에서 얼마 남지 않은 임금제 일자리를 두고 제로섬게임을 벌일 것이 아니라, 또 실업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엄청난 비용을 들여 쓸데없는 고용을 창출할 것이 아니라 경제와 재분배 시스템을 재고하고 임금제 기반에서 벗어난 새로운 경제모델을 수립해야 한다고 스티글레르는 말한다. 선행할 것은, 성장과 이익이라는 기존 소비주의적 가치를 기여적·재분배적 가치로 이행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여러 논의 공동체와 실험 영역을 만들어 새로운 경제적 합리성, 자동화의 합리성을 세우는 발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자리를 잃어버린 인간은 어떻게 삶을 영위할 것인가. 스티글레르는 우리를 구제할 것은 역설적이게도 테크놀로지 자체라고 말한다.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기계적 일자리를 기계가 차지하는 것은 잘된 일이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노동이란 소외된 노동이라고 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서 소외되며, 그것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임금을 지급하는 자본가에 속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소외와 단순 반복을 넘어서는 좀더 창조적인 일, 자신의 독특성을 개발하고 (프랑스 철학자 시몽동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의 ‘할 줄 앎’과 ‘살 줄 앎’을 증대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해야 할 일은 자동화와 비자동화 사이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프리웨어나 위키피디아, 협동경제 프로젝트와 같이 비궁핍화에 도움이 되는 자동화를 받아들이고 ‘비자동화 능력’을 길러내는 것이다.
 
비자동화 능력이란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사유하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예컨대 훌륭한 바이올린 연주자나 장인은 오랜 연습과 노력 끝에 숙달의 경지에 이른 자동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연주법이나 작업 방식을 개발한다. 스티글레르는 ‘비자동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기초교육의 재발명과 기본소득·기여소득 같은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다양한 이론을 기반으로 광범한 논의를 압축적으로 소개, 서술하는 이 책은 고용 위기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소용돌이에 직면한 현시점에서 미래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반드시 참고해야 할 지침서다.
 
고용의 구조적 소멸이라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젊은 세대를 위해서, 또 근본적으로 달라질 사회,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서 모두 함께 잘 살아가려면 스티글레르가 말하는 기여경제 모델로의 혁명적 이행이 필수 과제일 것이다. 철학적, 지적 자극으로 가득한 이 짧은 대담집이 다양한 토론과 논의의 장을 여는 촉매가 되어주기를 희망한다.
 

● 인사이트 책꽂이
 
 
일본 기업은 AI를 어떻게 활용하는가
닛케이 톱리더, 닛케이 빅데이터 엮음 | 신희원 옮김 | 페이퍼로드 펴냄 | 1만5800원
일본 기업들의 인공지능 실용화 현황을 살피고 인공지능의 진화가 어떤 변화를 불러오는지 소개한다. 기업들의 인공지능 활용 사례를 운영·고객 지원 분야, 판매·마케팅·영업, 제조·물류, 인사·인재 관리, 경영 등 5개 부문별로 나눠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의학 연구, 영상·광고 제작 같은 전문 분야의 인공지능 도입 현황도 알려준다. 엮은이는 인공지능을 동료이자 아군으로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르시시스트 리더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 이지혜 옮김 | 와이즈베리 펴냄 | 1만3천원
나르시시즘에 빠진 권력자들이 연이어 등장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그 이유를 고찰한다. 심리학자인 저자는 “오늘날 ‘나르시시스트’는 사회의 핵심 결정체이자 열광적인 애착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다”며 “나르시시즘이 성공과 인기, 위대함을 약속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현명한지, 평정을 되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따진다.
 
 
 
 
 
돈의 흐름으로 읽는 세계사
오무라 오지로 지음 | 신정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펴냄 | 1만5천원
20세기 이후 세계 정세를 ‘돈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살핀 책이다. 영국이 파운드로 세운 금융 제국, 미국의 달러 패권, 자원 대국 소련, 독일과 일본의 부상, 아랍의 석유 이권, 중국의 부상, 유럽연합 출범 등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미국과 중국 중 누가 세계경제 패권을 쥘지 예측한다. 일본 국세조사관 출신인 저자는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돈과 경제”라며 “돈을 축으로 삼아 역사를 더듬어가면 해답이 쉽게 나온다”고 주장한다.
 
 
 
브라질은 바나나를 닮았다
이영선 지음 | 경향미디어 펴냄 | 1만6천원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의 브라질 상파울루 무역관장이 쓴 브라질 분석서다. 먼저 브라질의 국가 체계를 분석하고, 그 체계의 축적 과정과 특징을 살핀다. 이어 한국, 중국, 오스트레일리아, 이스라엘과 브라질을 비교한다. 마지막으로 브라질 축구에서 한국이 배울 점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브라질이 1889년 공화국을 시작할 때 국기에 써넣은 ‘질서’와 ‘진보’를 지적하면서 이 둘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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