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완 국내편집장
　
지난 20세기 후반에 전세계의 여러 경제석학은 경제발전의 불씨를 찾아나섰다. 서구와 아시아, 남미 등 여러 국가의 역사적 경제발전 경험과 성과를 경제·정치·문화적 제도 등과 비교해 연구했다. 지난 100여 년 동안의 각국 경제성장률과 제도 변수 등 시계열 거시경제 데이터를 엄밀한 계량경제 모형 속에 넣어 국가별 차이가 왜 발생했는지를 실증분석한 것이다. 연구논문의 결론 부분은 대개 △시장 자유화 정도 △국가별 지리공간적 위치 △노동력 품질 차이 등을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제시했다. 어떤 학자들은 민주주의 등 정치·경제적 제도가 경제발전의 핵심적 불씨로 작용했다고 주장했고, 이는 개발도상국의 경제분석가나 경제정책담당자에게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시장지향적인 각종 제도와 민주주의 등 이른바 ‘서구적 제도’를 빨리 폭넓게 도입하는 것이 경제발전의 요체라고 생각한 것이다.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마틴 자크 지음,안세민 옮김 부키 | 2010

마틴 자크의 책(<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이 앞서 언급한 경제발전의 불씨에 대한 기존 경제연구를 검토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 책에서 서구적 제도, 특히 유럽적 의미의 근대성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지난 2세기 동안 서구 세력이 지배한 세계에서 서구적 가치를 문명화된 것으로 보고 다른 지역의 가치는 발전이 늦거나 반동적인 것으로 보는 사고가 만연했다. 서구 세계는 궁극적으로 모든 나라가 고유한 역사나 문화와 상관없이 서구 모델로 수렴할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유럽이 겪은 근대화 과정과 경험은 다른 국가들이 따라야 할 모범적인 전형이 아니고 특수한 것으로 봐야 한다.” 유럽적인 서구 모델은 예외적인 것이라는 얘기다.
지구상에서 서구의 헤게모니는 깊이 뿌리내려 있고, 도처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마틴 자크는 서구의 헤게모니는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며, 언젠가는 종식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계적 힘의 무게중심은 조용하고 은밀하게 (중국을 향해) 바뀌고 있다. 이제 “중국이 방 안의 코끼리”이지만 서구 세계는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서구 사회는 세상을 그들만의 세상으로 바라보는 방식에 익숙해 있다. 국제사회도 서구 사회로, 국제기구도 서구의 기구로, 통화(주로 달러화)도 서구의 통화로, 언어(주로 영어)도 서구의 언어로 바라보고 있다. 지금까지 ‘서구적’이라는 관형사는 항상 앞자리를 차지했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미국은 장기간에 걸쳐 경제·정치·군사 면에서 정신적 외상을 입을 것이며, 심리적·감정적·존재적 위기가 눈앞에 다가왔음을 깨달을 것이다.”
저자는 지금 세상 사람들이 미국 역사의 주요 사건에 익숙한 것처럼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주요 사건에도 익숙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2005년 만리장성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수는 유럽 르네상스의 본고장 피렌체를 방문한 관광객 수보다 많다. 진이 전국시대를 종식시켜 중국 최초로 통일을 이룩한 기원전 221년은 미국 독립선언(1776)이나 프랑스혁명(1789)처럼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연도가 될 것이고, 중국 시황제는 토머스 제퍼슨이나 나폴레옹처럼 유명해질 것인가.
중국의 세기를 부르짖는 그의 주장에는 강한 주관적인 구석이 많다. 그러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여러 객관적인 데이터와 역사적 사실을 곳곳에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영국의 전성기던 1913년 영국 인구는 세계 전체의 2.5%에 불과했고, 당시 서유럽 인구는 세계 전체의 14.6%를 차지했다. 이와 달리 2001년 (동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한) 서구의 인구는 세계의 13.9%를 차지한 반면, 그해 중국 인구는 세계의 20.7%에 달했고, 미국 인구는 4.6%에 불과했다. ‘인구 대국’의 무게감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보더라도 앞으로 전개될 중국 헤게모니 시대는 이전의 유럽·미국의 패권 질서와는 질적으로 다를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와 관련해 마틴 자크가 대표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15세기 정화의 대원정이다. “중국은 15세기에 정화가 동아프리카를 원정했을 때 서구와는 달리 영토를 차지하거나 노예를 확보하지는 않았다. 정화의 대원정과 유럽 탐험가들의 대항해는 목적이 서로 달랐다. 오늘날까지 중국은 대륙을 떠나 다른 지역을 지배하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서구와 중국의 행동 양식에는 역사적으로 차이가 있으며, 서구인들은 멀리 떨어진 지역을 대상으로 그들의 권력을 휘두르려 한 반면, 중국은 서구 국가들처럼 다른 국가에 역사적 앙금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처럼 필자는 ‘베이징 콘센서스’로 부르는 중국식 모델의 성격을 역사적·문화적 특징에서 찾는다.

10월18일 후진타오 국가주석(가운데)이 참석한 가운 데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17차 중앙위원회 5 차 전체회의.

마틴 자크는 이번 세기와 앞으로의 세기는 ‘다양한 근대가 경쟁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주창한다. ‘선진화된 국가’ ‘개발된 국가’ ‘문명국가’라는 말이 더 이상 서구를 의미하지 않고, 특정 국가가 우월하다는 생각이나 이런 국가가 인류 문명과 지혜의 원천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이런 변화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바로 ‘중국’이다. “19세기와 20세기는 서구의 시대였지만 이제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21세기 중반까지 서구 국가들의 국내총생산(GDP)이 전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에도 못 미칠 것이다. 반면 중국과 인도·브라질·한국·대만을 비롯한 개도국이 부상해 세계경제의 무게중심을 크게 바꿔놓을 것이다. 사람들은 경제적 번영으로 자신감과 자긍심을 갖게 되고, 자국 정치제도와 문화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아시아 호랑이들’은 근대화 초기에는 서구 문물을 근대의 상징으로 여겨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려 했고, 자신의 고유문화는 가난과 후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경제 도약을 달성하면서 서구 문물 대신 고유문화의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우리는 서구가 만들고 지배하는 세상에 살아왔으나, 이제 서구가 계속 근대를 독점할 수는 없다. 이제는 더 이상 힌두교나 인도인이 입는 의상이 후진성의 대명사가 아니며, 중국의 정치 전통을 중화사상에 찌든 왕조 시대의 유물로 생각하던 시대도 아니다. 모든 국가는 자국의 역사와 문화, 가치관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조명하면서 이를 후진성이나 실패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새로운 정통성을 얻게 되고, 서구 문화에 대한 경외감보다는 자국의 역사·문화·가치관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고 있다.
그는 중국을 개별 국민국가를 넘어 ‘중국 문명’으로 바라본다. 콜럼버스 훨씬 이전에 정화가 대원정에 나섰고, 과거 중국인이 만든 발명품이 유럽에서 널리 사용됐다는 사실을 근거로 대고 있다. 그의 주장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상당히 ‘중화주의적’이다. 예컨대 옛 조공제도를 중국의 동아시아 및 세계 지배의 한 축으로 설정한다. 그러면서 유럽의 ‘베스트팔렌 체제’(1648년에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구축된 새로운 유럽 국가 간 체제로, 이 조약은 중세의 끝을 의미하면서 주권 민족국가들로 이뤄진 근대 국제질서 체제를 의미함)와 조공 체제를 대비시키고 있다. “조공제도의 요소들이 근대화된 형태로 복원될 수도 있다. 조공제도는 위계질서에 입각한 관계이며 베스트팔렌 체제는 주권을 가진 국민국가 간의 평등한 관계를 의미한다. 조공제도는 중국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변치 않는 위계질서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불안정과는 거리가 멀다. 동아시아와 다른 지역 국가들은 중국의 경제 규모와 영향력이 매우 크고 강력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중국 중심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중국이 지배권을 가지는 위계질서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중략) 조공제도에서는 지나친 불평등이 오히려 안정을 낳는다. 이는 유럽의 경험과는 상반된다. 유럽에서는 평등한 국민국가들이 수세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반면 중국과 주변국 간의 불평등 관계가 근본적 특징인 조공제도에서는 점점 강대해지는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새 질서가 안정을 찾을 것이다.” 물론 현대판 ‘조공 체제’를 동아시아 질서에 적용하는 것 같은 필자의 중화주의적 사고에 대한 비판적 독해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