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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이 품었던 진보 경제학
[경제사 산책]
[7호] 2010년 11월 01일 (월) 류동민 economyinsight@hani.co.kr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 교수   코흘리개 초등학생 시절의 일이지만 아직도 내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의 한 장면이다.아마도 심부름 때문에 무언가를 사러 약국에 들렀을 때, 약사 아저씨는 수많은 사람이 체육관에 모여 투표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시청하고 있었다.어느 아주머니가 약사에게 물었다. “저게 뭐하는 거래요?” “이제부턴 대통령을 저렇게 뽑는대요.” 40여 년 전의 일이니 내 기억이 정확할 리 없으며, 더구나 약사 아저씨의 반응이 시니컬했다는 것은 이후에 형성된 내 생각이 회고적으로 투영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그러나 지식검색 사이트에서 찾아낸 제8대 대통령 선거에 관한 다음과 같은 무미건조한 기록은 적어도 박정희 시대에 특별한 기억이나 이해관계를 갖지 않은 객관적 관찰자의 눈에도 그것이 아주 기묘한 과정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경제 개혁 공약으로 대선 돌풍 정당이 배제된 가운데 공영제로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선거를 거쳐 선출된 대의원 2359명은 1972년 12월23일 1명의 결석도 없이 전원 장충체육관에 모였고, 박정희는 2357표(무효 2표!)로 당선돼 제8대 대통령이자 네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그 바로 1년6개월 전인 1971년 4월27일 열린 제7대 대통령 선거는, 그러므로 위기에 놓인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건곤일척의 싸움이었다.장충단공원에서 벌어진 유세에서 박정희 후보는 “국민에게 표를 찍어달라고 말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선언했으며, 제1야당인 신민당 후보 김대중은 “이번에 정권 교체를 이루지 못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우리는 ‘사후적 지혜’(Hindsight) 덕분으로, 일견 모순되는 듯한 두 후보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음을 알고 있다.이른바 ‘10월 유신’을 통해 사실상 총통제에 해당하는 종신 집권의 길이 열렸고, 따라서 박정희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말할 필요 자체가 없어졌으며, 국민의 직접투표를 통한 대통령 선거 제도를 되찾는 데는 무려 15년 뒤인 1987년에야 그것도 수많은 희생을 거친 끝에 비로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더라도 젊은 40대의 김대중 후보가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결국 90만여 표 차이로 아깝게 패배하면서 사실상의 승리를 거둔 데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그러나 그가 내세웠던 향토예비군과 교련 제도 폐지, 남북 교류를 비롯한 평화적 통일 방안 등 혁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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