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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업 지배하는 ‘아재의 힘’
[Culture & Biz] ‘아재 코드’에서 찾는 세대 공감의 열쇠
[86호] 2017년 06월 01일 (목) 문동열 redbros@redbros.co.kr
아저씨의 낮춤말로 쓰이던 ‘아재’가 최근 트렌드의 핵심으로 급부상했다. 기업의 마케팅부터 방송 프로그램, 게임, 뮤지컬, 영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등장하는 ‘아재 코드’는 이제 문화콘텐츠 산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굵직한 키워드가 됐다. 과거 ‘꼰대’와 비교해 현재 아재들의 문화 구매력은 강력하다. 더 나아가 아재는 세대 간 벽을 허무는 소통의 구실도 한다. 젊은 층에게 꼰대가 고집불통 아저씨라면 아재는 말이 통하는 아저씨다. ‘아재 코드’야말로 세대 공감의 열쇠인 셈이다.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 가수 김건모 등 SBS 예능 프로그램 <미운우리새끼> 출연자들은 ‘아재 코드’를 무기로 중·장년은 물론 10~20대 젊은 층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김건모(가운데)가 콘서트 무대에서 열창하고 있다. 연합뉴스
 
언제부터인가 ‘아재’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아재는 ‘아저씨’를 낮춰 부르는 말로 일반적으로 나이 든 중년 남성을 지칭하지만 ,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실제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 행동을 하거나 최신 트렌드를 따르지 못하거나 낡고 오래된 것을 선호하는 사람을 포함해 ‘아재’라고 통칭하는 경우가 많다. 젊은 세대가 자신의 기준에서 볼 때 오래되고 진부한 것에 ‘아재’라는 꼬리표를 붙인 것에서 시작한 용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래되고 진부한 것을 아재라 한다 해서 부정적 표현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 젊은 층이 기성세대를 폄하하는 의미로 곧잘 사용했던 ‘꼰대’와는 조금 다르다. 꼰대가 나이 들어 옛것만 고집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부정적 의미로만 사용된 것에 비해, 아재는 상대적으로 친근함이 담긴 표현이다. 꼰대가 세대 차이로 인한 갈등에서 파생된 말이라면 아재는 세대 차이에서 오는 자기와 다른 모습에 대한 젊은 층의 ‘호기심’, 더 나아가 ‘차이 존중’의 의미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인터넷상에서 단순히 젊은 세대와 중·장년층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에 가까웠던 아재가 2016년부터 점점 트렌드의 핵심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젠 ‘아재 열풍’이라 할 정도로, 트렌드에 민감한 기업의 마케팅부터 텔레비전·영화·게임 등 장르를 불문하고 콘텐츠산업 곳곳에서 ‘아재 코드’를 만날 수 있다.
 
SBS 예능 프로그램 <미운우리새끼>를 보면 불혹을 지나 지천명의 나이인 가수 김건모를 비롯해 출연자들 면면이 40대가 넘는 아재다. 이들은 젊은 층이 생각하는 ‘아저씨’들과는 모습이 좀 다르다. 여전히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며 아주 가끔씩 ‘중년의 관록’을 보이는 반전 매력에 시청자는 세대를 초월하는 공감과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미운우리새끼>가 10〜20대 젊은이에게도 인기를 끄는 이유다. 젊은 층은 ‘아재 파탈’(치명적 매력을 가진 여성을 칭하는 팜파탈에서 유래한 신조어)이라며 열광한다. 치명적 매력을 가진 아재들의 활약 덕분에 <미운우리새끼>는 일요일 저녁 9시라는 늦은 시간대에도 시청률 20%를 넘기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방송에서 게임으로 번지는 ‘아재’ 열풍
방송 초기만 하더라도 ‘나이 많은’ 아재들이 얼마나 선방할지가 관건이었지만 의외로 좋은 결과가 나왔다. 여기에 고무된 다른 방송사들이 합세해 주요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진이 40대 이상 남성으로 채워지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텔레비전에서 중·장년의 모습은 딱딱한 권위주의에 가부장적 이미지였지만 최근 아재들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편안하게 다가가는 친근함과 인생의 경험에서 오는 안정감까지 동시에 준다. 제작자에게 다양한 세대를 시청층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최고의 소재가 ‘아재’다.
 
텔레비전에서 아재가 세대 차이를 넘어 친근하게 다가서는 모습이라면, 게임업계 등에서 부는 아재 열풍은 콘텐츠 산업계가 왜 아재에 열광하는지 숨은 의미를 보여준다. 그동안 규제 등 여러 원인으로 부진에 시달리던 한국 게임업계가 아재들을 등에 업고 급속도로 활기를 되찾고 있다. 한국 게임산업의 전성기인 200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게임들의 지적재산권(IP)을 활용한 리메이크 게임 버전이 최근 봇물처럼 쏟아지며 큰 반응을 얻고 있다. 특히 1998년에 나와 20년 가까이 한국 온라인 게임을 대표하며 2016년 기준 누적 매출 3조원을 넘어선 온라인게임 <리니지>의 IP를 활용해 선보인 넷마블 모바일게임 <리니지2 레볼루션>은 2016년 12월 출시 한 달 만에 추정 매출 2천억원을 가뿐히 넘어섰다. 전문가들은 2017년 한 해 매출 1조원을 어렵지 않게 넘어설 것으로 예상한다. 거기에 최근 원조 <리니지>를 모바일게임으로 이식한 <리니지 M>이 <리니지> 개발사 엔씨소프트에 의해 5월, 출시되기 전에 예약자 300만 명을 넘기는 기염을 토했다. <리니지> 프랜차이즈 열풍의 근간에는 한국 게임산업의 전성기인 2000년대에 10〜20대였던 ‘원조’ 게이머들이 있다. 시간이 흘러 이제 30~40대를 바라보는 아재로 성장한 이들이 구매력까지 갖춘 든든한 지원군으로 나선 것이다.
 
이미 티켓 가격이 비싼 뮤지컬 등 공연 업계에선 30~40대 여성 파워를 어떻게 동원하는지가 흥행 공식의 관건이 되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 사업자 CGV가 2017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40대 이상의 티켓 파워가 놀라울 정도로 성장해 2007년 5.3%에 불과하던 40대 이상 중·장년층 관객 비율이 2016년에는 20.3%까지 급증했다. 10년 만에 5배 가까운 성장세를 보인 것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미녀와 야수>는 20여 년 전에 개봉한 원작 애니메이션의 향수를 자극해 2017년 4월 말 기준 500만 관객 동원에 성공했다. 영화 티켓 파워에서도 아재들의 입김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이렇듯 아재로 지칭되는 30~40대 중·장년층이 보여주는 활발한 문화 소비는 우리가 이전까지 가졌던 30~40대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현재 노년층에 해당하는 과거 30~40대는 문화 소비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지금 30~40대는 다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다양한 문화가 융성하던 1990년대에 10~20대 시기를 보낸 그들은 문화가 생활의 일부였다. 경제적으로도 자립한 지금, 그들의 문화 구매력은 최강에 가깝다.
 
현재 30~40대와 10~20대의 문화적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도, 아재 열풍의 또 다른 측면이다. 예전에 즐겼던 게임을 자녀와 함께 즐기는 30~40대 아빠라든가, 10~20대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아이돌 공연장에 자연스럽게 딸과 함께 환호하는 30~40대 팬이 점점 늘고 있다. 20대에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를 본 40대 여성 관객이 옛 향수를 안고 자녀의 손을 잡고 영화관을 방문하는 모습에서, 10~20대와 30~40대가 분리된 시장이 아니라는 인식이 콘텐츠 산업계에 퍼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업계 처지에선 단일 콘텐츠 시장이 확대되는 측면이 있고, 문화공유를 통한 세대 교류 확대가 그동안 한국 사회의 문제로 지적된 세대 갈등 해법으로까지 거론된다.
 
   
▲ 문화콘텐츠 산업에서 ‘아재’들의 구매력이 커지는 가운데, 영화 <미녀와 야수>는 20여 년 전 개봉한 원작 애니메이션의 향수를 자극해 흥행에 성공했다. <미녀와 야수> 출연자들이 2017년 2월 영국 런던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아재 코드’로 허물어지는 세대 장벽
아재 열풍의 시작은 ‘아재개그’라고 부르는 유머 코드였다. 이를테면 ‘늙은 사람들이 다니는 대학교는 연세대학교, 사람들이 바쁜 대학교는 부산대학교, 물가가 싼 대학교는 인하대학교’ 같은 단순한 말장난이 그것이다. 썰렁하지만 꾸미지 않고 투박하면서도 남녀노소 누구나 들으면 한 번쯤 피식 웃게 되는 아재개그가 인터넷 등에서 회자되며 30~40대가 10~20대로부터 ‘아재’라는 친근한 별칭을 얻었다. 여기에 세대 공감의 열쇠가 있다.
 
아재개그의 웃음 포인트는 어이없는 유머를 듣는 사람의 반응이다. 상황적으로 거스르기 힘든 ‘부장님’(또는 나이 많은 아저씨)이 썰렁한 아재개그를 날리면 ‘괴로워하며’ 마지못해 웃어주는 젊은 사람들의 반응이 중요한 포인트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부장님은 왜 썰렁한 개그를 날리는 것일까다. 썰렁한 농담에 괴로워하는 부하 직원들을 보며 즐기기 위해서?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자기 말에 웃어주는 부하들을 보며 권력의 단맛을 만끽하기 위해서? 아니다. 부장님은 자신을 어려워만 하는 젊은 층에 파고들기 위해 나름 노력 중인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가 그동안 경직된 수직적 체계에서 수평적 체계로 변화하는 추세에 적응하려는 중·장년층의 노력이 담겨 있다. 중·장년층의 노력과 함께 썰렁한 개그를 듣고 괴로워하지만 그것을 비웃고 자기와 다르다고 선을 긋는 게 아니라, 하나의 문화 코드로 이해하고 중·장년층을 자기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젊은 계층의 화답이 아재 열풍을 일으켰다. 이는 결국 우리 사회의 세대 벽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좋은 신호가 아닐까.
 
과거 기성세대는 젊은 층과 괴리됐다. 전쟁을 겪고 경제 기적을 일으키기 전의 어려운 삶을 체험한 기성세대는 고생을 모르고 자란 젊은 층을 이해하기보다, 젊은 시절에 그러했듯 자신의 논리에 끼워 맞추려고만 했다. 그렇게 과거의 유산과 충돌하며 성장하고 민주화를 일궈낸 지금의 아재들은 기성세대가 되면서 과거 기성세대를 닮아가기보다 젊은 층에 동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재 열풍은 ‘우린 그렇게 다르지 않아’ ‘공감할 수 있어’ ‘같은 것을 좋아하고 열광할 수 있어’라는 상호 이해와 양보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세대 융합이란 측면에서 더욱 의미 있어 보인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 사회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세대 갈등이었다. 흔히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으로 강제적으로 분리된 세대는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며 갈등의 씨앗을 만들었다. 2017년 대선 때도 세대 대결 양상은 여전했지만, 20~50대가 보인 변화는 이제 점점 세대 갈등이 눈 녹듯 자연스럽게 해소되리라는 기대감을 안겨준다. 작은 바람이 봄이 오는 것을 알려주듯, 지금의 아재 열풍이야말로 머잖은 미래에 다가올 우리 사회의 진정한 통합을 알리는 작은 봄바람일지 모르겠다.
 
* 문동열은 영상 콘텐츠 스타트업 레드브로스 대표로 저비용·고효율의 한국형 영상 콘텐츠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미디어마케팅을 전공했고 SBS 콘텐츠허브에서 방송 프로그램 제작을 담당했다. 또한 IBK기업은행 문화콘텐츠금융부에서 콘텐츠 금융과 콘텐츠 기업 컨설팅을 맡았다. 방송 제작과 금융에 모두 정통한 문화콘텐츠 산업의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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