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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를 했어야 했다
[곽윤섭 기자의 '포토 인']
[81호] 2017년 01월 01일 (일) 곽윤섭 <한겨레>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 곽윤섭 한겨레 기자

지하철을 탔다. 요즘 ‘중년 여성들’처럼 빈자리를 향해 몸을 날리는 편인데 그날은 빈자리가 없었다. 앉을 자리를 노린다면 아무 앞에 설 수는 없으니 여러 경험법칙을 동원한다. 이 판단은 꽤 정확해서 내가 선 앞의 승객이 그 줄 좌석에서 가장 먼저 내리는 일이 왕왕 있다. 이날도 촉을 곤두세워 빨리 자리가 날 곳에 섰다. 여자 중학생 2명이 나란히 앉았고 오른쪽 하나 건너에 또 한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이때 초기 판단이 틀렸던 것을 지금도 후회한다.

학생들은 나를 힐끔 보더니 별 반응이 없었다. 한 역 지나 60살은 훨씬 넘어 보이는 두 여성이 탔다. 나란히 앉은 여학생들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10초 정도 지나 일어서서 자리를 양보했다. 보기 좋았다. 혼자 마음속으로 웃었다. ‘학생들이 착하군.’ 여기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하나 남은 여학생이 나를 쳐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혼자 중얼거렸다. ‘너 나한테 자리 양보하려고 그러는 거니? 나 아직 50대 초반이거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나이 많다고 자리를 양보받은 적이 없다. 이 여학생,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기세다. 최대한 웃는 표정을 지으며 “그냥 앉아 있어요”라고 말을 꺼냈다. 여학생이 끝내 일어나버렸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노인 대접 받은 적 없다니까?
 
자리는 비었고 나는 그 앞에 서 있는데 ‘절대 앉지 않을 테야’ 다짐하면서 위기를 넘기기 위해 한병철의 <투명사회>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나에게 자리를 양보한 여학생은 ‘왜 앉지 않을까, 이 노인네’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책에 집중했다. 헐, 어제 47쪽까지 봤고 다음 장을 넘기니 하필 소제목이 ‘포르노사회’. 왼쪽에 선 여학생이 행여 볼까 책을 기역 자로 꺾었다. 다음 역에서 다행히 ‘내 생각에’ 나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여성이 탔고 힐끔 내 얼굴을 보더니 아주 잠깐 머뭇거리다 빈자리에 앉았다. ‘그냥 앉지 내 얼굴은 왜 봐?’
 
어쨌든 나에게 자리를 양보한 여학생, 빈자리에 앉은 여성, 나, 우리 모두 편안해졌다. 내리기 직전 여학생들에게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물었다. 착한 아이들이다. 그건 그렇고 아침에 면도를 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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