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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화는 억울하다
[In-depth]
[5호] 2010년 09월 01일 (수) 저우치런 economyinsight@hani.co.kr

저우치런 周其仁 중국 베이징대학 국가발전연구원장, 중국 인민은행 통화정책위원
   
저우치런

위안화는 한 번도 황금을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명나라 시대 이후에 통용되던 은냥(銀兩)1)과 동전을 함께 사용한 전통 화폐는 국민당 정부의 법정통화로 대체됐다. 국민당 정부가 무너지고 인민정부가 정권을 인수하자 중국 대륙의 화폐발행권도 함께 인수됐다. 하지만 금본위제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제스 위원장이 정부가 비축했던 황금을 모두 대만으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비축한 황금이 없으면 고전적인 금본위제도나 정부가 황금 태환을 보증하는 화폐제도 모두 실행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큰형님’ 역시 법정통화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새롭게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은 무엇이든 옛 소련을 모방했고 통화제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소련의 루블화와 연동할 필요는 없었다. 각 혁명 근거지에서 일찍부터 화폐를 발행하고 관리한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新)중국이 해야 할 일은 각 근거지에서 발행하던 화폐를 통일해 전국적으로 항일전쟁을 지원하던 기능에서 국민경제를 재건하는 쪽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난한천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은행장은 그의 전기에서 인상 깊은 일화를 소개했다.
 
위안화가 금태환을 못하는 이유

“우리는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에 진주했을 때처럼 울긋불긋한 지폐를 들고 입성할 수 없었다. 새로운 위안화가 탄생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당시 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선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위안화를 심사할 때 자신의 얼굴을 화폐에 담는 것을 반대했다. 1976년까지 위안화의 도안은 ‘노동자와 농민, 군인 대단결’이었는데 인민의 화폐가 인민에게 거래 매개체를 제공한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하지만 어쨌든 법정통화였다. 그래서 위안화는 탄생한 날부터 ‘닻’을 선정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화폐 발행은 당연히 국가의 권리지만 대체 무엇을 근거로 ‘화폐 발행량’을 결정해야 하는가? 경제적 특성을 고려하면 황금과 백은은 화폐를 충당하는 기능 말고도 다른 실질적인 용도가 있다. 이에 반해 화폐는 순수한 거래 매개체로서 적게 발행하면 거래를 질식시키고 생산에 타격을 주고, 과도하게 발행하면 물가를 끌어올리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 따라서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국가의 화폐발행량을 구속할 것인가, 즉 법정통화의 ‘닻’을 정하는 문제가 불거졌다.
이론적으로 보면 전쟁과 혁명, 특히 정권의 교체는 화폐가치의 극심한 불안정과 인과관계를 갖는다. 이 세상을 누가 갖게 될지 불투명한 상황에서는 프랑스 루이 15세의 말처럼 ‘내가 죽은 뒤에 홍수가 나든 말든’(Apres moi, le deluge)이라는 기회주의적 사고가 판을 치게 된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정권이 기울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에 집정자는 ‘통화’라는 수단을 과도하게 이용해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권력의 수명을 연장하곤 했다. 또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면 아직 기반을 잡지 못한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세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화폐를 초과 발행했다.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 볼셰비키의 러시아혁명 등 새로운 정권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그 뒤를 따랐다. 이는 모든 장애물을 무너뜨린 혁명과 보수적인 화폐 사이에 태생적으로 함께 어울릴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위안화는 예외였다. 황금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순수한 지폐이자 신생 혁명정권의 화폐였지만, 위안화는 첫날부터 ‘온건한’ 화폐 노선을 선택했다. 위안화는 무엇을 ‘닻’으로 삼을 것인가? 이리저리 고심한 결과 맨 처음 ‘닻’으로 삼은 것은 ‘역사적 교훈’이었다. 먼 과거사는 말할 것도 없고 가까이 국민당 정부가 남긴 화폐의 교훈을 신중국의 통화정책을 책임졌던 지도자는 머릿속에 새기고 있었다. 법정통화에서부터 1948~49년 국민당 정부가 지배한 지역에서 발행했던 ‘금원권’(金圓卷)에 이르기까지 10년 남짓한 세월 동안 ‘국가원수’와 ‘항일전쟁의 영수’란 월계관을 쓰고 있던 장제스 위원장은 국민당 정권을 자멸의 길로 이끌었다. 군사 분야의 무능함과 실책보다 사회·경제 정책의 실패야말로 그 근본 원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물가가 매월 50% 이상 치솟던 악성 인플레이션은 결국 전 국민을 국민당 정부의 반대편에 서게 만들었다.
 
   
 

달리기 실력에 따라 달라진 쌀값

악성 인플레는 사람들이 높은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기대인플레이션)하게 만든다. 어느 해 설날 나는 린이푸2)와 함께 지셴린3) 선생을 찾아뵀다. 당시 선생은 베이징대학 교직원사택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1940년대 겪었던 민생 이야기를 하던 중 선생은 당시 월급을 받으면 곧바로 쌀을 사러 뛰어갔는데 달리기 실력에 따라 쌀값이 달라졌다고 했다. 1948~49년 상하이시에 살던 어른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묻자, 선생은 간이 큰 사람은 돈을 은화(당시 불법이었다)로 바꿨고, 간이 작은 사람은 생활필수품을 사고 돈이 남으면 쌀·종이·수건·비누·담배 등을 사서 쟁여놓았다고 했다. 지폐만 갖고 있지 않으면 됐던 것이다. 국민이 도탄에 빠졌던 그때, 경제정책은 실패를 거듭했고 사람들이 물건을 사재기하자 시장에서는 상품을 구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돈의 값어치를 믿지 못했고 물가는 갈수록 뛰어올랐다.
그런 상황에서 공산당이 인플레이션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곤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천윈4)은 쉐무차오5)를 이끌고 상하이에 입성한 뒤 단 두 가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인플레이션과 기대인플레에 대응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 즉 화폐 발행을 엄격히 통제하고 상품 공급을 늘린 것이었다. 거리에 물건이 많아질수록 사재기해서 가치를 보전하려던 심리가 점차 사라졌고,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시장에 물건을 내놓자 인플레이션은 물론 기대인플레까지 자취를 감췄다. 이로 인해 ‘실물경제를 초과해 화폐를 발행해선 안 된다’는 것은 위안화 관리 책임자가 지켜야 할 첫 번째 규칙이 됐다. 이제 남은 것은 지폐를 얼마나 발행해야 적합한지 ‘경험적 계수’를 구하는 일이었다.
그 이후의 역사는 ‘실물경제를 초과해 발행하지만 않으면’ 위안화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물론 이 규칙이 흔들린 때도 있었다. 미국은 중앙은행이 독립성을 유지하는 나라로 유명하지만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의장은 그의 후임자가 자신처럼 통화 준칙을 신봉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중국도 같은 문제가 상존한다.
통화정책의 최고 책임자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화폐는 제도적인 면에서 취약하다. 인사 변동의 영향을 받지 않는 제도적 보장을 갖추려면 ‘비인격화’한 사물과 연동시키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위안화의 가치를 특정 사물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객관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물을 선택해야 할까? 미국의 물리학자 제롬 프리드먼은 ‘돌 화폐의 섬’(The island of stone money)이라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하지만 돌덩이는 너무 무겁다. 금과 백은은 양이 적고, 중국의 역사는 위안화를 위해 귀금속을 남겨주지 않았다.
물론 외국 화폐를 선정해 연동시킬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달러화가 한창 잘나갔던 황금기에 위안화는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다. 1944년 브레턴우즈 협정을 체결했을 때 중국 대표도 현장에 있었지만 서명하진 않았다. 그때 협정에 가입해서 국민당 정부의 법정통화가 고정환율로 달러화에 연동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화폐 발행을 남발해 내전을 추진하던 장제스 위원장의 ‘야심’에 제동이 걸리지 않았겠는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뒤 수십 년 동안 위안화가 외국 화폐를 ‘닻’으로 선정하려 했더라도 달러화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중국과 미국은 전혀 왕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서야 위안화를 달러화에 연동시키는 구상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화폐였던 달러화는 이때 이미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위안화는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쳐 미 달러화에 가치를 고정했다. 먼저 1955년부터 1970년까지 15년 동안 위안화 환율은 1달러당 4.618위안에서 조금도 변동이 없었다. 그다음은 1998년부터 2005년까지 달러당 8.27위안을 7년 동안 유지했다.
첫 번째 단계는 계획경제 시기로 국가가 대외무역과 외환 수급을 통일적으로 관리했기 때문에  환율이 시장에서 결정되지 않았다. 아니, 당시엔 외환시장이란 게 없었다. 위안화의 명백한 고평가는 정부가 적은 비용으로 희소한 외화를 통제하려는 정책적 의도에서 나왔다. 그러나 행정명령으로 곡물이나 공산품의 가격을 억누르듯 외환 가격을 억누르자 외화의 공급 자체가 줄어들었다. 외화가 적을수록 통제가 심해졌고, 통제할수록 외화는 적어졌다. ‘대약진운동’으로 인해 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높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제도적 배경과 상관없이  ‘고정환율이 최상의 통화 기준이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는 게 드러났다.
두 번째 단계는 현재와 미래의 위안화 환율 시스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는 1997년부터 시작된 위안화의 달러 연동 환율체제는 특정 경제이론이 만들어낸 산물이 아니라 일련의 사건이 빚어낸 결과라고 본다. 세 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1993년 발생한 높은 인플레이션과 그에 따른 후속 조치, 1994년 중국 최초의 환율 개혁, 그리고 1997년의 아시아 금융위기가 그것이다.
당시 인플레이션은 무섭게 찾아왔다. 1993년 중국의 물가 상승률은 16%를 넘었고, 다음해에는 24%까지 솟구쳤다. 다양한 분야에서 물가를 통제했던 것을 감안하면 ‘은닉성 인플레이션’ 압력은 지수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 경제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다. 다행히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던가. 덩샤오핑은 주룽지 전 총리가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며 인플레를 통제하도록 지원했다. 그 결과 3년 만에 물가상승률은 2.8%까지 떨어졌는데 이는 당시 폴 볼커 미 연준 의장의 성적을 능가한 수치다. 하지만 주룽지와 폴 볼커 모두 금리 인상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화폐공급량을 줄여 이를 악물고 인플레를 억눌렀던 방법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치했다.
 
   
 

영웅호걸이 투자했다는 고층 빌딩
미국 로스앤젤레스캘리포니아대학(UCLA)에서 공부하던 나는 1993년 6월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하이난섬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후끈 달아오른 경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중국 국영기업에서 나와 개인사업에 뛰어든 친구들은 한창 공사 중이던 빌딩 옥상으로 날 안내했다. 그 자리에서 바라본 광경은 출국하기 전 원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중소도시 크기로 새로 만들어진 성의 정부 소재지인 하이커우시에는 도처에 고층 빌딩이 즐비했다. 모두 어떻게 만들었을까? 각지의 영웅호걸이 투자했다고 한다. 누구 돈으로? 은행이 대부분을 부담했고 주주도 일부를 부담했다. 주주들의 돈 역시 따지고 보면 은행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빌딩 옥상에서 나는 ‘역 압력 시스템’이란 새로운 용어를 배웠다. 개인과 기업, 지방정부가 대출해달라고 은행을 압박하면 은행 지점은 본점을 압박하고, 각 은행의 본점은 인민은행을 압박했다. 이것이 물가지수를 사상 최고치로 치솟게 만든 기반이었다.
그 빌딩을 구경한 이튿날 주룽지 총리는 금융 관련 ‘치리정돈’(治理整頓·경기 과열을 식히기 위한 긴축) 정책을 하달했다. 은행은 일률적으로 대출을 회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베이징과 상하이의 빌딩은 시세의 절반 가격으로 홍콩이나 대만 동포에게 팔렸고, 하이커우시의 사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친구들이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게 만들어줬던 그 빌딩은 다른 수많은 빌딩과 마찬가지로 8∼9년 넘게 공사가 중단됐다. 홍콩 언론들은 이런 빌딩을 꼬리가 썩은 빌딩이란 뜻의 ‘란웨이러우’(爛尾樓)6)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꼬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와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은 정부 정책을 많이 비판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그때 인플레를 통제하지 않았다면 그 뒤에 이어진 ‘중국 이야기’는 전혀 다른 버전으로 전개됐을 것이란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나는 당시 인플레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가장 현명했던 조처가 바로 물가를 잡은 뒤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중국인민은행법’을 통과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민은행이 중국의 중앙은행이라는 사실을 명시한 이 법률은 ‘중국인민은행은 국무원의 지도하에 법률에 근거해 독립적으로 통화정책을 집행하고 직책을 수행하며 지방정부와 각급 정부기관, 사회단체 또는 개인의 간섭을 받지 아니한다’는 조항을 명시했다. 또 ‘중국인민은행은 정부 재정에 대해 대월(貸越·한도 초과분을 지급해주는 것)할 수 없고 국채와 기타 정부 채권을 직접 응모, 인수할 수 없다’(제29조)고 규정했다. 법률로 중앙은행의 권위를 확립했을 뿐 아니라 재정적 필요에 의해 화폐를 초과 발행함으로써 위안화 가치의 안정을 위협하고 인플레를 조장하던 정부의 관행을 없앴다. 이러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중국의 앞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방의 잠자는 사자 건들기
1994년 발생한 또 하나의 사건은 이원화됐던 환율을 통합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위적으로 고평가된 위안화의 환율체제는 개혁·개방으로 인해 충격을 받았다. 1986년부터 국무원은 외화 창출을 독려했고 기업이 일정 비율로 외화를 남겨 외환조절센터에서 자유롭게 거래하도록 허가했다. 이로써 공정환율 이외에, 시장 수급에 따라 결정되는 외환조절 시장환율이 형성됐다. 이것이 바로 이중환율제다. 지금은 잘 알려진 시장 수급을 기반으로 한 ‘관리형 환율 결정 시스템’의 정책 토대는 사실 이때 만들어졌다. 하지만 달러 대비 위안화 환율이 수년간 불변하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통계적으로 보면 1993년 달러당 위안화 환율은 5.75위안이었고, 1994년에는 8.61위안이었다. 위안화가 달러 대비 33%나 평가절하된 셈이다. 게다가 그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중국의 대외 개방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고, ‘동방의 잠자는 사자’는 오랜 세월 축적해온 수출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세계의 무역과 투자 구도에 변화가 일어났고, 국제사회에서 ‘중국이 평가절하에 기대어 수출을 확대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발하자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총리 등 일부에서는 “아시아 금융위기는 위안화가 대폭 평가절하돼 발생했다”고 말했다. 이것이 과연 논리적인가? 반대로 위안화가 인위적으로 오랜 세월 고평가된 것은 중국이 아시아의 국제주의에 공헌한 게 아닌가?
중국은 아시아의 금융위기에 직면해 대국의 책임을 다해야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위안화의 평가절하를 안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 정부는 그 약속을 지켰다. 이 때문에 1998년부터 달러 대비 위안화의 환율은 수년 동안 평행선을 유지했다. 국제기구와 선진국의 주요 인사들은 책임 있는 대국답게 중국이 위안화를 절하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다시 몇 년이 지난 지금, 외국인이 위안화 평가 절상을 요구한다고 해서 중국이 이에 따르는 것은 애국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위안화를 너무 오래 달러에 연동시킨 결과 시장 수급에 기반해 환율을 결정하려는 개혁 목표와 멀어지게 됐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위안화 안정에 변수가 생기고, 거시경제 조절 압력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원인도 여기에 있다.  
ⓒ 21cbh
번역 유인영 위원   

1) 백은으로 주조한 화폐.
2) 린이푸(林毅夫). 중국 경제학자, 베이징대학 중국경제연구센터 주임.
3) 지셴린(季羨林). 중국 동양학의 거장.
4) 천윈(陳雲). 중국 혁명 1세대 지도자로 중국 사회주의경제의 기반을 마련했다. 마오쩌둥 사망 뒤 덩샤오핑 다음의 2인자로 군림하며 보수적인 경제이론을 고수했다.
5) 쉐무차오(薛暮橋). 중국 사회주의 경제학의 기반을 마련했다.
6) 개발회사가 용지 구입과 설계를 마치고 시공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시공이 중단된 채 방치된 건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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