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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시장과 그 적들
[info@econo]우리 시대 기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1호] 2010년 05월 03일 (월)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economyinsight@hani.co.kr

올해는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탄생한지 1백주년인 해다. 삼성에서는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벌이고 있다. 비자금 사건에 휘말려 물러났던 이건희 전 삼성회장도 최근 경영에 복귀했다.
지난 위대한 번영의 시대에 ‘거대기업’은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물품을 효율적으로 생산·공급하면서 국민 경제의 성장과 고용을 책임지는 존재였다. 즉 더 많은 케이크를 만들어내고, 많은 일자리를 제공해 사람들이 ‘더 많은 케이크’를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메커니즘의 한복판에 거대기업이 있었다. 기업은 풍요로운 삶으로 가는 자본주의의 기관차이자 ‘번영의 불씨’였다. 그래서 거대기업들은 ‘국가 경제의 대표선수’로 불렸다. 일찍이 1952년 미국 국방장관에 발탁된 찰스 어윈 윌슨 당시 GM 사장은 의회청문회에서 “국가에 좋은 것은 GM에도 좋은 것이고 GM에 좋은 것은 국가에도 좋은 것”이라고 간명하게 천명했다.
그러나 그 뒤 거대기업의 존재는 점점 더 국가 그 자체처럼 성장했다. 우리의 삶은 이제 국가의 각종 정책과 제도 못지않게 거대기업의 흥망성쇠에 따라 출렁거린다. 거대기업이 생산·유통하는 수많은 상품 목록을 보라. 일자리·소득·소비·주거·교육·치료, 심지어 죽음까지 거대기업이 지배하고 있다. 자기 재산의 일부를 주식·펀드에 넣어둔 수많은 사람의 한쪽 눈은 투자한 거대기업이 돈을 잘 버는지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지에 시시각각 촉각을 곤두세운다. 기업이 불안하고 위기에 처하면 우리 삶도 불안과 위기에 처한다.
<이코노미 인사이트>는 이번 창간호에서 ‘우리 시대, 기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근본 질문을 던진다. 이번호 136쪽에 실린 ‘이코노북’ 코너 역시 미국 기업사에서 대표적인 거대기업으로 꼽히는 록펠러와 JP 모건을 다룬 책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 미국 초기 기업사를 대표하는 두 인물. 존 데이비슨 록펠러 1세(왼쪽)와 존 피어폰트 모건. 플래닛 제공
19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의 생산과 소비를 조직하는 기구는 시장이라고 여겨져왔다. 이론상 무수히 많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가격 신호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면서 모종의 몰인격적인 힘인 ‘보이지 않는 손’이 전체 ‘경제’의 균형과 성장을 이끈다고 하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경제학 교과서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아직도 무수한 공급자, 무수한 소비자가 모두 ‘가격 수용자’로 행동하며 운동하는 ‘완전경쟁시장’이 하나의 규범(norm)이 되어 21세기에도 여전히 대학에서 현실 경제의 모습인 양 버젓이 가르쳐지고 있다.
현재 세계 경제를 구성하는 무수한 ‘시장’들 가운데에 몇 개 (심지어 단 하나)의 거대 기업에 의해 공급이 장악되지 않는 시장을 몇 개나 들 수 있는가. 19세기 말부터 이미 다양한 생산자들은 그 생산 과정에서의 위치에 따라 수직적으로 통합되어 거대한 기업 합동체를 이루는 운동을 시작하였고, 1차대전이 끝나고 나면 그러한 운동은 세계 자본주의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다. 멈포드(Lewis Mumford)의 표현을 빌면, 이제 자본주의 경제는 거대한 ‘생산 기계’로 재조직된 것이다. 미국에서의 대기업에 의한 산업 지배의 과정을 연구한 챈들러(Alfred Chandler)는 20세기 자본주의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존재하지 않으며, 전 사회의 생산과 소비는 대기업들의 ‘보이는 손’에 의해 조직 되었다고 말한다. 라조닉(William Lazonick) 같은 이는 챈들러의 연구에 기초하여, 20세기 자본주의의 현실을 ‘시장 경제’라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하나의 ‘신화’라고 명시적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이 대기업들은 여전히 경쟁 관계에 있지 않은가. 비록 사회 전체의 생산과 소비의 상당 부분이 “대기업 경제(corporate economy)” 의 지배 아래에 들어갔다고 해도, 그것을 구성하는 대기업들이 서로 “팔 길이 관계(arm‘s length)”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경쟁을 벌이고 있다면, 비록 19세기 자본주의와 같은 정도의 의미는 아닐지라도 모종의 몰인격적인 시장 메카니즘이 상당히 변형된 채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서 이 기업들을 누가 소유하고 지배하는가의 문제가 중요해진다. 만약 대기업들이 소유와 지배 모두에 있어서 나름대로 독자성을 가진 실체로서 의사결정을 하고 있다면 모를까, 그도 아니라 서로 불가분으로 연결된 상태에서 주요한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다면 20세기 자본주의의 생산과 소비의 상당 부분은 시장 경제라기보다 ‘대기업 경제’라는 ‘생산 기계’로 조직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20세기 자본주의에서 대기업들의 지배와 소유가 실제로 조직된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를 따져보기 전에 먼저 우리는 ‘영리 기업’과 ‘부재 소유자’라는 베블런의 이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베블런의 <영리 기업의 이론>

여기에서 이 “대기업(corporation)”이라는 조직의 속성 자체를 좀 더 세밀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주식회사가 지배적인 기업 형태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1904년에 미국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은 이 기업 형태를 세밀하게 분석한 고전적 역저를 발표하였다. 그 제목은 <영리 기업의 이론(The Theory of Business Enterprise)>. 이 저서는 주식회사를 기본적으로 소스타인 산업 활동을 맡아보는 생산 조직으로 보는 통념을 완전히 거부하고, 주식회사는 ‘산업’ 활동 그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오로지 그 산업 활동을 지배함으로써 그 지배 권력을 통해 수익의 흐름을 창출하고 이를 자본화하는 영리 조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베블런이 보기에 실제로 인간 생활에 쓸모가 있는 재화 및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산업(industry)’이며, 그저 돈으로 계산되는 이익을 추구하는 활동인 ‘영리 활동(business)’과는 본래 아무 상관도 없다. 즉 ‘산업’ 그 자체로 돈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인류에게 큰 도움이 되더라도 잘 팔리거나 비싸게 팔리지 않을 물건을 만든다든가, 또 생산성을 발휘해 지나치게 많이 만들어 공급함으로써 가격을 심하게 떨어뜨린다든가 하면 오히려 영리 활동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에 산업 혁명 이후로 산업이 폭발적으로 팽창하게 되자, 이것이 ‘어리석게도’ 인류의 물질생활을 지나치게 개선하여 이윤의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참극이 빚어지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생겼다. 이를 막기 위해 유형 무형의 생산 수단들을 유형 무형의 ‘자산’으로 독점하여 사회로부터 일정한, 아니 최대의 수익 흐름이 창출될 수 있도록 전환하는 ‘영리 활동’이 절실해졌다. ‘주식회사’ 형태의 대기업이란 바로 이러한 2차 산업 혁명의 산물을 이윤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나온 ‘영리’ 기업이 그 본질이라는 것이 베블런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주식회사 대기업은 그 출생부터 ‘경쟁적 시장’과는 그 조직 원리가 상극이 된다. 또 대기업으로 하여금 생산성 극대화로 이끌어줄 ‘보이지 않는 손’ 따위도 없다. 대기업이란 그저 현존하는 유의미한 생산 활동의 모든 유형 무형의 계기를 있는 대로 ‘독점’하여 산업 과정에 대한 지배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활동의 핵심이다. ‘경쟁’은 없애야 할 적이다. 실제로 ‘파괴적 경쟁이 소멸하여 안정적 이윤이 보장되는 잘 짜여진 경제 체제’가 모건(J. P. Morgan)의 경제 철학이기도 했으며, ‘기업 사회(corporate society)’로 미국을 개조한 20세기 운동의 원리이기도 하였다. 20세기 미국의 경우 약 4번 정도에 걸친 대규모 인수·합병 운동은 경제의 집산화라는 이상을 가깝게 실현시켰다. 그래서 이제 경제 통제의 권력 원천은 대기업 자체도 아니고, 인수·합병 기관으로 이동한다. 베블런이 말했듯이, 대기업의 주식 소유를 기초로 하여 그 대기업들보다 훨씬 더 높은 천상의 어딘가에서 일개 산업이나 부문만이 아니라 경제 전체의 작동을 조절하는 ‘부재 소유자(absentee owner)’야말로 20세기 자본주의 경제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에 핵심적인 개념이 된다.
 
경영자주의 vs 은행지배론

20세기의 대기업 지배 소유에 대한 설명과 관련해 ‘경영자주의’와 ‘은행 지배론’ 간의 오랜 논쟁이 있어 왔다. 먼저 아돌프 벌리와 가리너 민즈(Adolph Berle and Gardiner Means)는 1930년대 초 미국 200개 대기업의 지배 및 소유 구조를 조사하여, 주식 소유가 크게 분산되면서 소유자의 기업 지배가 크게 약화되고 대신 기업 경영을 실제로 맡은 전문 경영인이 기업 의사 결정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경향이 뚜렷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번햄(James Burnham)의 유명한 저서 <경영자 혁명(The Managerial Revolution)>을 통해 대중화되었고, 2차 대전 이후에는 다니엘 벨, 다렌도르프, 갤브레이스, 바란과 스위지 등 보수주의자, 미국식 진보주의자, 유럽 사회민주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등 광범위한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동조자를 얻게 되었다. 특히 갤브레이스는 이제 대기업이 주식 소유자의 이윤욕으로부터 해방되어 기술적 합리성의 극대화를 꾀하는 기술 관료들에 의해 지배되는 거대한 ‘기술구조(technostructure)’가 되었음을 강조했다. 요컨대, 대기업을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산산히 흩어져 있는 주식 소유자들이 아니라 기업을 매일매일 운영하는 경영자 및 기술 관료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경영자주의’는 심각한 도전에 처하게 된다. 이들이 기업의 지배 소유 구조의 문제를 단지 개별 기업 차원에서만 해명하려고 했지, 기업들 간의 관계 나아가 거대 은행 등의 금융 기관 등 다른 경제 주체들과의 전체적 관계에서 해명하려 들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한편 힐퍼딩 이래 ‘금융 자본론’의 전통을 고수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실제 대기업의 주식 소유는 거대 은행들을 중심으로 한 금융 기관에게 집중되어 있으며 따라서 실제로 이들 기업을 지배하는 것은 경영자들이 아니라 배후에 있는 거대 은행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미 1950년대에 미국 공산당의 경제학자 빅터 펄로(Victor Perlo)는 월스트리트에 기반한 8개의 거대한 은행들이 자신들이 주로 소유한 무수한 기업들을 모아 각자의 ‘금융 제국’을 건설하였고, 이 은행들이 촘촘한 거미줄처럼 엮인 주식 소유 관계를 통해 산하의 대기업들을 실제로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거대 은행들과 월스트리트의 기업 지배 권력은 실제로 미국 정치에서도 큰 문제로 제기된다. 그리하여 1968년 패트만 포고서(Patman Report) 그리고 1974년의 멧캘프 보고서(Metcalf Report) 등 미국 의회는 대금융 기관들의 대기업 소유 지배 관계를 세밀히 조사한 보고서들을 내놓아 그 현황이 자세하게 드러나게 하였다. 그러자 핏치와 오펜하이며(Robert Fitch and Mary Oppenheimer) 등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논지를 더욱 자세하게 가다듬어 제시한다. 거대 상업 은행들은 신탁 활동을 통한 주식 소유와 기업 융자라는 두 개의 방법을 사용하여 기업 경영의 의사 결정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며, 또 자신들 산하의 클러스터 형태의 기업 집단 속에 겸임이사(interlock)들을 파견하여 개별 기업들의 경영이 집단 전체의 방향과 조율되도록 구체적으로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 거대 은행들은 경영자주의의 주장과는 달리 해당 기업 자체의 기술적 효율성과 장기적 수익성의 입장보다는 은행의 단기적 이윤 동기를 충족시키기 위해 개별 기업을 희생시키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연구 사례들은 이러한 은행 지배설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을 제기하였다. 첫째, 은행의 주식 소유나 대부와 같은 활동은 대기업의 의사 결정을 실제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고 보기 힘들며, 은행과 기업의 관계는 그렇게 한쪽이 종속되는 대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서로가 대등하게 협력하는 관계인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둘째, 실제로 기업들 간의 겸임 이사나 주식 소유 등의 관계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런 식의 거대 은행을 정점으로 한 ‘금융 제국’의 존재를 말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결국 경영자주의든 은행지배설이든 모두 대기업과 금융기관 등으로 이루어진 기업 경제부문 전체가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거나 복합적으로 엮여 하나의 생산기계를 형성하는 과정을 놓치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사실 소유와 통제라는 두 가지 문제를 기계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소유와 통제라는 행위는 서로를 목적으로 할 때에 비로소 온전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한몸이기 때문이다. 베블런의 ‘영리 기업’의 이론을 상기해보라. 기업 조직을 가동시켜서 산업 활동을 지배할 수 있도록 만드는 실제의 경영 활동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흐름으로 온갖 돈계산과 계략을 통해 기업 가치를 극대화하는 부재 소유자들의 ‘기업 금융’ 활동은 불가분으로 엮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유와 통제를 대립적인 관계로 놓고 한쪽만을 강조하는 대신, 그 둘을 ‘산업 활동에 대한 기업 경제라는 생산 기계의 포괄적인 권력’으로 연결시켜서 연구해보면 어떨까.
 
‘금융적 헤게모니’와 ‘이너 서클’

70년대 말 이래로 기업들 간의 관계 그리고 기업들과 은행들 간의 관계를 체계적인 방법으로 연구한 베스 민츠와 마이클 슈바르츠(Beth Mintz and Michael Schwartz) 등 일군의 사회학자들 (소위 ‘MACNET group’) 은 경영자주의나 은행지배론 모두가 기업 세계의 현실을 잘못 파악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이들은 은행 지배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기업들은 서로 간의 주식 소유 및 융자 등 기업 자산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겸임이사제를 통하여 기업 지배 구조의 측면에서도 촘촘한 네트워크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은행이 실제로 중심적인 역할을 맡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은행들은 기업들 간에 중복 투자나 과잉 경쟁 등이 벌어지지 않도록 통제하면서 또 공동의 이윤 창출의 기회를 만들어내는 조정 과정 또한 주도하며, 그 과정에서 기업의 경영 전략들을 제시하고 나아가 기업의 실제 통제에 깊숙이 관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은행의 활동이 결코 일방적인 지배나 통제라고 부를 성격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일단, 개별 기업들의 실제 의사 결정에 있어서 최고 경영자들이 상당한 자율성을 누리고 있으며 은행과의 관계 또한 종속적인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들 기업들의 네트워크는 비록 중심적인 “허브(hub)”를 기준으로 하여 몇 개의 집단으로 나누어볼 수는 있지만, 이는 확연히 구별되는 그룹이 아니라 전체 기업 경제 부문에 걸쳐서 전방위적으로 뻗어있는 기업 간 네트워크의 연속된 그물 위에서 상대적으로 더 긴밀하게 엮여 있는 느슨한 집단, 즉 스콧(John P. Scott)의 표현대로 “별자리 모양의 이익 집단들(constellation of interests)”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 “별자리들”은 분명히 그 내부의 개별 기업들에 대해 전략적 통제를 가한다. 하지만 그 방법은 직접적인 경영 간섭이나 전략 수정의 강요가 아니다. 이러한 집단들의 중심을 이루는 여러 금융 기관 특히 거대 은행들은 상호 주식 소유나 대부 조건 등을 이용하여 문제의 기업이 자금을 조달하는 조건을 정함으로써 문제가 되는 전략을 포기하도록 하는 “금융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것을 성격으로 한다. 결국 이러한 연구는 20세기 경제의 현실이 ‘시장 경제’가 아니라 챈들러나 라조닉이 주장하는 것처럼 “뻔히 보이는 손”에 의해 지휘되는 ‘기업 경제’에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을 확인해 준 셈이다.
그런데 이들의 연구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이러한 기업들 전체를 아우르는 그물망의 꼭지를 저 위에서 잡아당기는 집단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한 줌도 안되는’ 금융 자본가들이 은행 소유의 위에서 뭉쳐있는 음모 이론적인 모습은 아니다. 되려 이들 통제 집단은 금융 부문과 정치 부문에 걸쳐서 공공연하게 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먼저 앞의 “금융적 헤게모니”라는 말이 암시하듯, 개별 기업의 경영을 맡아보는 이사진들과 최고경영자들은 대규모 투자은행 및 상업은행 신탁부 등을 통해 금융 자본 산업 자본 할 것 없이 광범위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또 이들의 네트워크는 미국의 정치 분야와 정부의 경영을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내부자 집단을 형성하기도 한다. 현재 와튼 스쿨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사회학자 우심(Michael Useem)은 그의 고전적인 연구 <이너 서클(Inner Circle)>를 통하여 이러한 내부자 집단의 존재와 조직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기도 했다. 이 집단은 단순히 정부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인사 결정에 있어서도 직접적인 지배력을 발휘하며, 그 범위는 단지 재계의 이익 뿐만 아니라 대외 정책, 교육 정책 등에 이르도록 포괄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20세기의 기업 지배 소유의 현실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극적인 방향 전환을 맞는다. 바로 지구화와 함께 진행된 소유의 초국적화이다. 위에서 언급한 사회학자들의 연구가 주로 80년대까지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할 때, 지구적 자본 시장의 거대한 부흥과 또 투자 은행의 부활이 본격적으로 벌어진 그 이후 현재까지의 상황을 볼 때 전지구에 걸친 기업 지배 소유의 네트워크는 더욱 복잡하고 총체적으로 발전하였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998년 정도에 절정을 이루었던 최근의 지구적인 인수 합병의 물결은 이미 지구적 차원에서의 초국적 지배 소유 구조의 출현을 예감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신흥 시장에 집중되고 있는 지구적 자본의 흐름과 복잡한 지배 소유 구조의 변화는 그러한 지구적 지배 소유 구조의 발전이 대단히 지구적이고 대단히 아랫 부분의 기업들에까지 촘촘히 들어와 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한국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욱 복잡하다. 가족 소유의 대규모 기업 집단 형태인 ‘재벌’이 온존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방금 언급한 미국 자본주의에서와 같은 “성단 형태의 이익 집단”보다 훨씬 노골적이고 확연한 기업 소유 지배의 집단이 노출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집단이 전쟁 이전 일본의 재벌들처럼 금융의 작동과 정치의 작동에서 상대적으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금융 헤게모니’와 ‘이너 서클’로의 확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해지고 있다. 이미 대재벌등은 강력한 법률 법인등을 매개로 하여 정부의 소위 ‘회전문 인사’와 연결되는 이너 서클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관측이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또 지금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금산분리법 완화를 통하여 대재벌들이 은행 - 현재 한국의 은행들은 금융지주회사의 형태를 빌어서 투자은행업과 상업은행업을 겸병하는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 에까지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경우, 한국에서의 ‘금융 헤게모니’의 조직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또 한번의 중요한 고비를 맞게 될 것이다. 이미 한국의 대기업들은 소유 구조에 있어서나 실제 경영 전략에 있어서나 상당히 지구화된 상태이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손’이니 ‘일반 균형’이니 하는 시장 경제의 미몽으로 현실을 파악할 상황이 아니다. 지구적으로나 한국에 있어서나 체계적이고도 세련된 방법론에 기초하여, ‘기업은 누가 어떻게 지배하는가’ 그리하여 ‘경제는 누가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문제까지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연구 프로젝트가 실로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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