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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프랑 강세에 흔들리는 스위스 산업
시험대 오른 ‘스위스 웨이’(Swiss Way)
[68호] 2015년 12월 01일 (화) 오혁종 economyinsight@hani.co.kr


스위스는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 생존의 방편으로 ‘영세중립국’을 선택했다. 안전한 중립국의 ‘금고’에는 자연스레 돈이 몰렸다. 스위스는 중립국 지위로 얻은 금융자본을 발판 삼아 경제성장을 이뤄왔다. 하지만 21세기 개방의 파고 속에서 스위스의 중립주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스위스 프랑의 가치 상승은 관광 수입과 수출 감소를 불러왔고, 은행 비밀주의는 미국에 천문학적 벌금을 내는 빌미가 됐다. 국민투표로 가결된 이민 제한 조치는 유럽연합과 마찰을 빚으며 스위스의 상징인 ‘주민자치’도 위기를 맞았다.

오혁종 KOTRA 스위스 취리히무역관장
 

   
▲ 스위스프랑(왼쪽)과 유로 동전의 모습. 유로 대비 스위스 프랑의 가치가 오르면서 수출이 감소하고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는 등 스위스 경제가 위기를 맞고 있다. REUTERS

대표적 산업 강국으로 세계 최고의 소득 수준을 자랑하는 스위스. 2008년 금융위기로 확산된 글로벌 경기침체 속에서도 견실한 성장을 지속해온 스위스가 최근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국 통화의 급격한 가치 상승으로 내로라하는 강소기업조차 매출과 이익이 줄어들면서 비용 절감을 위해 인원을 감축했다. 또 ‘은행 비밀주의’ 포기를 요구하는 외부 압력에 굴복해 형사처벌을 면하는 대신 수천만달러의 벌금을 내는 은행이 속출하고 있다. 2015년 10월 중순 실시된 총선에서 이민 반대 기치를 내건 우익 보수당의 약진으로 자유로운 인력 이동의 보장을 요구하는 유럽연합(EU)과의 분쟁이 심화될 우려도 커졌다.

1815년 오스트리아 빈 협약으로 중립성을 확보한 이후 200년 동안 유럽의 크고 작은 전쟁과 정정 불안을 피하며 산업과 경제 발전을 효과적으로 이뤄온 스위스의 외부 ‘절연 정책’이 21세기 들어 거세진 글로벌 개방 파고의 도전을 받고 있다.

강소국 스위스의 선진성을 보여주는 지표는 매우 많아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쉽지 않다. 1인당 국민소득은 2014년 국제통화기금(IMF) 기준으로 8만1천달러가 넘는다. 산업국가 중 가장 높다. 산업구조도 부러울 정도로 견실하다. 부가가치가 높은 금융과 물류 서비스가 주도하는 서비스업 비중이 국내총생산(GDP)의 60%가 넘고, 제조업도 제약·화학·정밀기계·식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골고루 발달돼 있다.

이처럼 견실한 스위스 경제가 2015년 자국 통화의 급격한 강세로 수출이 감소하고 소비·투자가 위축되면서 2015년 들어 3분기까지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고 있다. 2015년 7월까지 수출이 지난해보다 3.3% 줄고 기업의 생산설비 투자도 감소세로 돌아섰다. 이에 따라 스위스 중앙은행은 2015년 경제성장 전망치를 애초 2.1%에서 0.9%로 낮췄다.

스위스 프랑의 가치가 크게 오른 것은 스위스 중앙은행이 2011년부터 시행해온 스위스 프랑의 유로화 페그제(고정환율제 -편집자)를 2015년 1월 중순 전격 포기했기 때문이다. 스위스 프랑의 가치 상승을 억제하기 위한 유로화 매입 자금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유로와 스위스 프랑의 교환 비율은 1 대 1.2에서 1 대 1.1로 올라갔고, 스위스 제품은 10% 이상 가격 경쟁력을 잃어버렸다.


화폐 가치 상승으로 수출 감소

이는 ‘성공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세계경제 회복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안전 자산인 스위스 프랑의 선호 현상은 여전히 지속됐다. 이로 인해 스위스 관광업은 당장 큰 피해를 입었으며 제조업체에도 점차 피해가 미치고 있다. 한스 헤스 스위스 기계산업협회 회장은 회원사 5개 중 1개가 존립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최근 스위스 언론은 2015년 3분기 영업 실적의 악화로 각 기업이 비용 절감을 위해 인원을 감축한다고 보도했다. 또한 스위스의 기계·전자·금속(MEM) 산업 회사 16%가 일부 생산 공장과 영업점의 해외 이전을 검토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스위스 프랑의 가치가 오르자 국경 인근 주민들이 생활필수품 구입을 위해 독일·프랑스·이탈리아로 쇼핑 관광을 다녀오는 현상도 늘고 있다. 2015년 10월1일 스위스 북부 아르가우주 신문 <아르가우어 차이퉁>(Aargauer Zeitung)의 보도에 따르면, 스위스 소비자의 인근 국가 쇼핑 금액은 연간 110억스위스프랑(약 12조7천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스위스 소매 유통 매출액의 10% 정도며, 이로 인해 뺏기는 일자리도 6천개나 된다고 한다.

예금주에 대한 비밀 보장을 철저히 지켜온 ‘스위스 금융 왕국’의 지위도 ‘거래 투명성’이라는 가치에 도전받고 있다. 스위스 은행과 보험업 등 금융산업은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5% 내외로 스위스가 자랑하는 MEM 산업을 능가한다. 또 26만명의 고용을 창출하고 스위스 정부 조세 수입의 13%를 차지한다. 300개가 넘는 은행·보험 등 금융기관이 관리하는 자산은 약 5조6천달러(약 6550조원)로 전세계 역외자산 관리 시장의 4분의 1이 넘는다.

   
▲ 스위스 은행 UBS는 미국인의 세금 회피 자금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미국 정부에 천문학적 금액의 벌금을 냈다. 스위스 국기가 스위스 바젤의 한 UBS 지점에서 나부끼고 있다. REUTERS

스위스 금융산업의 발전에는 중립주의와 은행 비밀주의가 기여한 바가 크다. 스위스 정부는 1934년 고객 정보 유출에 대해 형사처벌할 수 있는 ‘은행비밀법’을 만들어 사실상 금융 비밀 유지 관행에 대한 법적 보호 장치를 마련했다. 여기에 더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세계 정세의 불안은 스위스 금융업을 한단계 발전시켰다.

은행 비밀주의의 실질적 변화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 미국이 스위스 정부가 아닌 은행을 압박하면서 시작됐다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스위스 은행 UBS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자산 규모 1조5천억달러(약 1755조원)로 세계 최대의 은행인 UBS는 미국인 고객 수천명의 세금 회피 자금을 은닉하는 데 도움을 준 사실이 확인돼 2009년 2월 미국 법무부에 벌금 7억8천만달러(약 9천억원)를 냈다. 스위스 정부는 미국과의 합의에 따라 2013년 2월 ‘해외 금융자산 신고에 관한 협정’(FATCA)에 서명했고, 2014년 7월부터 미국인의 금융 계좌 정보를 미국에 정기적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정부 간 협약과 별도로 미국인 은닉 자산이 많은 49개의 스위스 은행은 2013년 8월 불기소 처분을 전제로 조사에 협조한 뒤 혐의가 있을 경우 은닉 자산의 최대 50%까지 벌금을 내겠다는 내용의 ‘스위스 은행 프로그램’(Swiss Bank Program) 협정에 자발적으로 가입했다. 이는 미국 세무 당국이 마련한 협정이다. 이 협정에 따라 2년간 조사를 벌인 결과, 외국계를 포함한 47개 스위스 은행이 최대 수천만달러의 벌금을 내게 됐다. 이 프로그램이 시행되기 전에 이미 조사가 시작된 크레디스위스은행에는 2014년 무려 28억달러(약 3조2천억원)라는 천문학적 벌금이 부과됐다.

스위스의 ‘대량 이민 제한’ 조치도 소규모 개방경제인 스위스에 큰 타격이 될 전망이다. 스위스는 2014년 2월9일 대량 이민을 제한하는 내용의 국민 발의를 투표로 가결했고, 2017년 시행을 위해 체류 허가와 노동 허가 규정 등을 포함한 외국인법 개정을 준비하고 있다. 주요 내용은 제3국을 포함한 EU 국가 국민의 유입에 연간 상한을 두고 할당제를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EU 단일 시장의 근간을 이루는 ‘상품·서비스·자본·노동력 4대 생산요소의 자유로운 교류’라는 이념은 물론이고 스위스가 2002년 6월 EU와 별도로 체결한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과 취업을 보장하는 협약’과도 정면 배치되는 모순을 안고 있다.


이민 제한으로 EU와 통상 갈등

스위스는 외국인 인력 비율이 4분의 1이나 되는 특수성을 주장하면서 EU가 독자적으로 추진하는 모든 정책을 스위스에 일괄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EU는 시장 개방의 4대 요소 중 하나인 인력 이동을 제한하는 정책에는 타협할 수 없다는 태도다. EU에 대한 교역 의존도가 60%에 이르는 스위스는 안으로는 자국 국민을 설득하고 밖으로는 슬기로운 협상을 통해 EU와의 통상 마찰을 해결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현재 스위스가 처한 4가지 주요 이슈는 세계화의 개방 추세 속에서 효과적인 보호막으로 작용해온 스위스 중립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더 나아가 중요한 정책을 국민이 직접 결정해온 스위스 특유의 풀뿌리 민주주의의 효율성에 대한 시험으로 볼 수도 있다.

스위스는 강대국 사이에 낀 지리적 위치와 서로 다른 종교 및 민족의 유입 등에 따른 ‘이질적 집단의 통합’이란 특수성을 주장하며 중립적 위치를 확보받았다. 이를 통해 두 세기가 넘도록 세계의 갈등 구도에서 벗어나 강력한 산업 기반을 구축해왔다. 스위스는 그동안 ‘중립의 마술’에 성공했으나 냉전 체제가 무너져 중립이라는 개념이 희박해진 지금 ‘자리를 지키는’ 전략만으로는 생존이 쉽지 않게 됐다.

통상은 정부 차원에서 민간 기업들의 교역 조건을 규율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스위스는 지금까지 중립을 방패로 ‘맞춤형 통상 정책’을 정부가 아닌 국민의 주도로 시행해왔다. 통상은 협상을 통해 서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양허를 주고받는데, 통상 정책을 주도하는 스위스의 ‘자치 체제’가 이제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주민 공동체는 개방보다 보호에 비중을 두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 역사가인 요나탄 슈타인베르크는 스위스 공동체를 ‘무게중심이 아래에 있는 오뚝이 인형’에 비유했다. 전자시계의 도전에 플라스틱 패션 시계인 스와치(Swatch)를 개발해 시계 산업의 도산 위기를 넘긴 것은 정부가 아닌 민간이었다. 지금까지 중대 기로에서 현명한 선택을 해온 스위스 국민이 산적한 경제 현안을 어떻게 풀어갈지 주목된다.

hyeokoh@kotr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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