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정치권에 ‘386세대’란 말이 유행했다.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1990년대 말부터 정치권의 ‘젊은 피’로 거론되다가 200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사라져갔다. 기대했던 것만큼 새 바람을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386세대가 최근 경제계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60년대생 최고경영자(CEO)가 속속 배출되고 있는 것이다. 1~2년 전만 해도 간혹 한두명 나오는 정도였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는 60년대생 CEO가 쏟아진다. 이전과 다른 점은 나이가 50줄에 들어섰다는 점이다. 세월이 흘러 386은 586으로 변했다.

금융권에선 김병호 하나은행장(1961년생), 김용범 메리츠화재 사장(1963년), 홍성국 KDB대우증권 사장(1963년) 등이 CEO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재계에선 지난해 말 삼성이 60년대생을 대거 사장으로 발탁했다. 이윤태 삼성전기 사장(1960년), 전영현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사장(1960년), 김현석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사장(1961년)이 그들이다. 장동현 SK텔레콤 사장(1963년)도 올해 초 젊은 CEO 명단에 올랐다. 중견 기업으로 내려가면 그 수는 무수히 많다.

올해 물꼬를 텄으니 내년부터는 훨씬 많은 1960년대생 CEO들이 나올 것이다. 이 추세라면 몇년 뒤 국내 기업 CEO 가운데 절반 정도가 60년대생으로 채워질지도 모른다.

1960년대 초반에 태어난 사람들은 대학 학번으로 치면 80년대 초반 학번들이다. 이는 1980년대 초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대학생들이 한국 경제의 주역이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재와 재벌을 비판하던 학생들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주요 기업의 책임자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들이 어떤 경영을 할지 일반화해서 말하기는 어렵다. 기업마다 문화가 다르고, 사람마다 경영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60년대생, 80년대 학번들에게는 공통의 시대적 경험이 있다. 산업화 시대에서 민주화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경험이다. 이들은 1980년대 후반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를 이뤄낸 주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효율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기업에서 수십년 동안 일해왔다. 그동안 다져진 역량을 바탕으로 뭔가를 이뤄낼 것이란 기대를 갖게 하는 배경이다.

실제 젊은 CEO들과 얘기해보면 과거의 기업 경영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권위보다는 소통을 중시하며, 밀어붙여 만들어내는 성과보다는 합리성을 높게 평가한다.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들도 있다. 이는 국내 기업들이 이전보다 훨씬 건강하고 유연한 조직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았다는 얘기다. 마침 우리 사회도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해 구조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1960년대생 CEO들은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한단계 더 성숙한 사회로 끌어올릴 책무를 떠안고 있는 셈이다. 그들의 눈부신 활약을 기대해본다.

정남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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