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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보다 더 미국스러운 사람들
[Cover Story]‘경제 관료’에 갇힌 한국경제
[4호] 2010년 08월 01일 (일) 정태인 economyinsight@hani.co.kr

정태인 경제평론가·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이 글은 단순한 경험담이다. 처절한 실패의 경험이다. 어떻게 해야 이런 우를 다시 범하지 않을 수 있는지, 몇 번씩 되새겨보지만 뾰족한 답을 찾지 못했으니 단순한 이야기에 그칠 수밖에 없다. 관료제에 대한 이론과 수많은 경험을 종합해서 대안을 찾는 것은, 다른 뛰어난 사람, 예컨대 사회학자가 할 일인지 모르겠다.
한국의 관료들은 우수하다. 특히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등 경제 관료는 빼어나다. 다른 무엇보다 속도에 관한 한 혀를 내두를 만하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들어가면 두 종류의 관료를 만나게 된다. 한쪽은 보고하러 오는 장차관 및 국장급, 다른 한쪽은 위원회에 배치된 국장급 이하 실무자다.
   
▲ 지난 6월24일 2010년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 합동 브리핑에 참석한 장관들. 왼쪽부터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 전재희 보건복지부 장관,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임태희 노동부 장관, 김영학 지식경제부 2차관.


관료의 위력을 실감하다
전자는 과거의 정책을 미화하고 때로는 대통령 당선자 앞에서도 뻣뻣하다. 유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오히려 현직 관료들의 논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예컨대 노동운동가 출신 노동부 장관이 그랬다. 그의 말은 재경부, 또는 노동 유연성에 목매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의 주장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노동시장의 경직성 때문에 생산성이 낮고 실업도 많다는 것이다. 재경부 차관과 국장은 투자를 늘리기 위해서는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예컨대 유럽 기준으로 된 디젤 엔진 환경 규제를 약화시켜야 자동차 투자가 늘어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당시의 환경 규제는 디젤차 수입을 막기 위해 현대 등 한국 자동차 산업계가 주장했고, 이제 디젤 자동차를 생산하게 되면서 규제 완화를 들고 나오게 된 것이다. 물론 미국 자동차 산업의 요구이기도 했다.
후자는 관료들의 능력을 바로 실증했다. 지나가는 말처럼 정책 아이디어를 내놔도 다음날 아침, 잘 정리된 보고서가 책상 위에 올라와 있다. 물론 그 때문에 국책연구원 박사들이 인수위 두 달 동안 밤을 새웠다는 후문을 들었지만 어쨌든 당선자의 의중을 간파하고 이를 빠르게 산뜻한 보고서로 만드는 엄청난 능력을 보여준다. 그도 그럴 것이 인수위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청와대의 눈에 드는 일이고 인수위에 파견된 국장들은 청와대 행정관이나 비서관을 거쳐 대부분 임기 내에 장·차관을 지내는 경로를 밟았다. 대통령의 정책 기조를 알아내야 하는 각 부처에서 가장 우수한 공무원을 보냈겠지만 동시에 이들은 인생 최대의 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인수위를 거친 외부 인사들은 “공무원을 믿지 말라”는 조언을 되풀이해 들었음에도 ‘입 안의 혀’ 같으면서도 유능한 모 국장을 깊이 신뢰하고 또 의존하게 된다.  
참여정부 출범 당시 인수위 1분과(금융·재정)는 일주일이 채 넘지 않아 앞의 관료들의 위력을 실감해야 했다. 그 힘은 언론에서 나왔고 주제는 역시 재벌이었다. 당시 인수위 부위원장이던 김아무개 실장은 공무원과 재벌의 희망이었다. 선거 과정에서 거친 말투로 재벌과 친시장 정책을 비판한 당선자가 손꼽은 유능한 공무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분과가 어떤 결정을 하기 전에 미리 방어선을 쳤다. 예컨대 참여정부의 재벌정책은 ‘점진적·단계적·자발적’ 기조를 따르며, 집단소송제가 도입되면 출자총액제한제는 폐지할 것이라는 등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성격이 다른 사후 규제와 사전 규제를 맞바꿔서라도 재벌 규제 총량을 늘리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1분과에서는 당연히 그런 정책을 검토하거나 나아가서 결정한 바가 없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보수 신문은 일제히 ‘점령군’ 등의 표현을 써서 인수위 내의 갈등을 부각시켰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재경부에서 각 신문의 경제부장을 소집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경제보좌관까지 지낸 한 재경부 국장은 기자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1년 내에 전부 쫓아낼 테니 두고 보라”는 호언까지 했다. 이른바 ‘개혁 3인방’(이정우·이동걸·정태인)이 모두 사라지는 데 2년6개월쯤 걸렸으니 꽤 오래 버틴 셈이다.
일개 재경부 국장의 기개 뒤에는 정권이 바뀌어도 늠름히 버티는 불변의 지배 체제가 있다. ‘재벌(특히 삼성)-고급 관료(특히 재경부)-보수 언론(특히 조선·중앙·동아)’의 삼각동맹 체제가 그것이다. 대통령 측근에도 정권을 잘 운영하려면 이들과 대립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가진 충성파가 존재하기에 ‘386 출신-당료 출신-재경부’ 간의 연합도 이뤄진다. 참여정부 초기에 ‘강원도의 힘’(권오규 전 경제부총리·이광재 전 의원·정만호 전 청와대 의전 비서관을 지칭함)이라고 불리며 청와대를 장악한 세 사람이 대표적이다.
이 동맹 체제와의 대립은 역시 재벌·규제완화 정책을 둘러싸고 불꽃을 튀길 수밖에 없다.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경제학자는 수없이 많다. 미국 주류의 시장만능론이 한국에서는 곧 친재벌, 이명박 대통령의 언어로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경제 관료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던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 앵글로색슨형 사회를 정책으로 만드는 요원이다. 실제로 이정우 당시 경제특보가 삼성에만 특혜를 주는 금산분리 문제로, 그리고 이동걸 당시 금감위 부위원장이 삼성생명의 상장 문제로 해임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동맹 체제는 노태우 정부 때부터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한국의 재벌이 공개적으로 재경부 정책에 반기를 든 것은 조순 부총리 시절인 1988년의 금리 논쟁이었을 것이다. 권위주의 발전 국가 시절 관료의 일방적 우위가 서로 협력하는 관계로 바뀌었다. 재벌 임원 월급과 관료 월급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경제 관료가 퇴임하거나 훗날을 기약하면서 중간에 그만둔 뒤 공기업이 아닌 금융권이나 기업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조·중·동이 노골적으로 보수화한 것도 1987년 이후이니 이들은 적극적인 공생 관계를 이루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기관 시절에 미국에 유학을 가고 국장급이면 국제통화기금(IMF)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에 파견 나가는 것이 유능한 경제 관료의 출세 코스이니, 동맹 체제의 이념은 글로벌 스탠더드로 내면화된다. 구체적인 정책부터 철학, 출세를 위한 처세까지 삼각동맹은 대단히 유용했고 또 지금도 나날이 힘을 불려가고 있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자 종부세 등 참여정부 초기에 내놓은 강력한 부동산 대책들이 시일이 흐르면서 유야무야되거나 개악된 것이야말로 삼각동맹의 위력이 관철된 좋은 예이며, 보수 정권이더라도 감히 시도하기 어려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대통령이 앞장서서 밀어붙이도록 만든 것이야말로 삼각동맹 체제 역대 최고의 성과다.

길고도 험난한 관료 개혁의 길 
각 부처는 나름의 고유한 정책 방향이 있어서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새로운 구호로 치장해서 집어넣는다. 경제 부처의 경우 금융시장 논리로 무장됐는데, 예컨대 동북아 시대라는 역내 협력정책을 금융 허브와 경제자유구역의 경쟁력 정책으로 뒤바꾸는 식이다. 국토해양부(옛 건설교통부)는 건설 재벌들의 공급정책을 신념으로 삼는다. 뿐만 아니라 참여정부 시절의 ‘물 산업화’ ‘의료산업화’,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무슨무슨 ‘선진화’ 구호에서 드러나듯 공공재를 다루는 부처에도 시장의 논리는 스며들어 있다. 추상적인 이론 체계로 무장해 있다거나 구체적인 정책을 일일이 갖춘 수준은 아니더라도 경제 관료가 이런 철학에 물든 것은 분명 사실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총애한 관료들이 호남과 수도권 일부를 빼곤 대부분 한나라당 후보로 선거에 출마하는 것도 이런 경향을 증명한다. 
재벌 편향, 부자 편향, 시장 만능을 최소한이라도 교정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미국의 금융위기 앞에서도 미국보다 더 미국스러운 사람들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30년을 풍미한 신자유주의의 몰락과 함께 자연스럽게 교정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당과 시민사회의 정책 역량이 강화됨으로써 제대로 된 견제도 받게 될 것이다. 개혁적 외부 인사를 팀으로 짜서 청와대와 정부에 배치한다면 개혁적 정책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각동맹 체제라는 현실이 의연히 존재하는 한 경제 관료 스스로의 변화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산업구조와 언론 등 사회 전체의 동시 변화만이 관료를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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