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엔화 약세를 등에 업고 잇따라 차량 가격을 내리며 적극적으로 국내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지난 3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모터쇼에 전시된 도요타의 신차 '하이랜더'. REUTERS

도요타·혼다 등 FTA, 엔저 발판으로 국내 시장점유율 확대 위해 공격적으로 가격 인하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엔화 약세를 등에 업고 잇따라 차량 가격을 내리면서 적극적인 국내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이후 미국에서 생산되는 일본차들이 가격경쟁력을 갖춘 것도 여기에 힘을 보태고 있다. 값비싼 독일차와 경쟁하기보다 현대·기아자동차를 타깃으로 하겠다는 것이 일본차 업체들의 전략이다.

강기택 <머니투데이> 산업부 기자

도요타에 이로운 것은 일본에 이롭고 일본에 이로운 것은 도요타에 이롭다. 무제한 돈을 풀어 엔화 약세를 유도하는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경제정책)에 기반해 도요타·닛산·혼다 등 일본 자동차 업계의 수익성이 개선되고 있다. 이는 일본의 국부 증대를 의미한다.

반면 일본 자동차 업체와 직접적 경쟁관계에 있는 현대·기아자동차 등 국내 완성차 업체와 타이어·부품 업체에 엔저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공격적인 가격 인하보다 영업이익을 내는 데 방점을 뒀던 일본차 업체들이 가격을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 수출 감소와 수익성 악화 등을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미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5월1일 닛산이 미국에서 판매되는 18개 차종 가운데 7종의 가격을 내린 데 이어 도요타와 혼다 등도 가격 인하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국내 시장의 경우 도요타·닛산·혼다 등 일본차 '빅3'는 지난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를 전후해 미국 공장에서 생산한 자동차 가격을 낮춘 데 이어 올해 들어서도 추가적인 가격 인하를 단행하고 있다. 지금은 BMW·메르세데스벤츠·아우디 등 독일산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들이 시장을 장악하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지만 엔저가 지속될 경우 할인 공세는 더 거세질 수 있다.

입지 회복 계기 마련해준 한-미 FTA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어난 2008년, 국내 수입차 시장은 일본차가 대세였다. 당시 수입차 시장점유율 1위는 혼다(20.04%)고, 4위는 도요타의 고급 브랜드 렉서스였다. 닛산의 고급 브랜드 인피니티는 8위(5.24%)였다. 당시 도요타는 국내에 진출하지 않았고 닛산도 막 발을 들여놓아 판매가 미미할 때였지만 국내 수입차 시장에서 일본차의 시장점유율은 35.5%로 사상 최고였다. 혼다 어코드3.5가 수입차 시장의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고 CR-V가 3위, 렉서스ES350이 4위, 혼다 어코드2.4가 5위에 오르는 등 톱5 중 4개가 일본 모델이었다.

2012년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도요타·닛산·미쓰비시·스바루 등 국내에 들어온 브랜드는 늘었지만 독일차가 강세를 보이며 일본차 점유율은 18.3%로 반토막이 났다. 국내 시장을 장기간 평정할 기세이던 혼다의 점유율은 3.01%로 추락했다. 도요타의 신형 캠리가 베스트셀러 2위에 오르고 프리우스 하이브리드가 9위에 올랐지만, 톱10 중 8개는 독일차의 몫이었다. 지난해 수입차 시장이 24.6% 성장한 가운데 도요타 판매가 115% 급증했을 뿐 혼다(25.1%), 렉서스(21%) 등은 수입차의 평균 성장률 근처에 머물렀다. 닛산은 36.9% 급감했고 인피니티 역시 48.7% 줄었다. 스바루는 5.6% 감소하며 한국 시장을 떠났다. 2011년 34대를 팔고 철수했다가 다시 들어온 미쓰비시도 81대를 파는 데 그쳤다.

이처럼 일본차의 점유율이 하락한 것은 기본적으로 가격보다 브랜드파워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디젤 모델의 경제성을 앞세운 독일의 럭셔리카 업체들이 할부유예 등을 통해 초기 구입비용을 낮춰주는 방식으로 차를 팔면서 일본의 '대중적'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가 급격히 떨어진 것이다. BMW나 벤츠가 흔해지면서 재규어·벤틀리·포르셰 등 더 희소한 브랜드로 고급차 수요가 옮겨갔고, 도요타·혼다 등은 더 이상 서울 강남 거리에서 수입차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때 렉서스ES가 '강남 소나타'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고, 강남 아줌마들 사이에서 인피니티 바람이 불기도 했지만 모두 옛날 이야기다. 그래서 렉서스를 제외한 일본 브랜드들은 더 이상 독일산 세단과 경쟁하지 않고 그랜저·소나타 등 현대차의 주력 모델 시장을 넘보고 있다. 심지어 렉서스까지 제네시스·K9 등의 시장을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

그나마 급락하던 일본차의 국내 점유율을 지탱해준 건 한-미 FTA였다. 일본차 업체들은 한-미 FTA 협정 발효 이후 국내 시장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미국 공장에서 생산한 차들을 대거 국내로 들여왔다. 도요타 캠리, 닛산 알티마, 혼다 어코드, CR-V 등이 대표적인 모델이다. 특히 도요타는 자사의 대표적 글로벌 베스트셀러 캠리 가격을 기존 모델보다 100만원 싸게, 캠리 하이브리드 가격을 300만원 더 저렴하게 책정했다. 일차적으로 미국에서 생산됐기 때문에 엔고 부담이 사라졌다는 점, FTA 발효와 동시에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가 기존 8%에서 4%로 낮아지고 배기량 2천cc 초과 차량의 개별소비세도 10%에서 8%로 낮아졌다는 점을 반영한 가격이었다. 도요타가 이같은 가격정책을 들고 나오자 혼다·닛산 등도 어코드와 알티마 가격을 캠리와 동일한 수준에서 책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FTA 효과는 일본차 업체에 '지속 가능한' 모멘텀이 되지 않았다. 단적으로 캠리의 신차 효과가 사라지면서 지난 1~4월 도요타 판매량은 45.1% 급락했다. 혼다와 닛산이 각각 32.8%, 23.6% 판매가 늘었지만 어코드·알티마 등의 신차 효과에 기댄 측면이 크다. 일본차의 전체 점유율은 14.2%로 지난해 말보다 더 줄었다. 일본에서 생산해 한-미 FTA와 무관한 렉서스의 판매가 26.8% 늘었는데 이 역시 신형 ES 시리즈의 신차 효과와 이례적으로 하이브리드 자동차 가격을 가솔린보다 낮춘 가격정책이 크게 작용했다.

값싼 일본차들이 대거 밀려들면서 현대·기아차와의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일본 도쿄의 혼다 전시장. REUTERS

도요타의 지난 1분기 글로벌 판매 대수는 1년 전보다 2.2% 줄었지만 영업이익은 60.5% 늘어났다. 이는 엔저에 기대 가격을 내리기보다 수익성 확대에 치중해왔다는 뜻이다. 그러나 앞으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닛산은 이익 증대보다 판매를 늘리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엔저 기반에 수익성이 높아질수록 일본차들의 이런 욕구도 강해질 것이다. 국내에 진출한 일본차 업체들 역시 본사 정책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물론 한국도요타·한국닛산·혼다코리아 등 일본차 국내 판매법인(임포터)은 2008년 이후 판매 급감으로 적자를 내는 등 본사에 비해 여건이 좋지 못하다. 3월 결산 법인인 한국도요타와 한국닛산의 지난해 실적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적자가 예상되고 있다. 한국도요타는 판매가 늘긴 했으나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을 벌인 탓이고, 한국닛산은 판매가 줄어든 까닭이다. 게다가 두 회사 모두 자본이 완전잠식돼 본사의 저리 대출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국내 판매법인이 가격을 낮춘다면 이는 충분한 수익성을 확보했다기보다 일본 본사의 지원에 힘입어 점유율을 늘리기 위한 차원으로 봐야 한다. 한국도요타가 5월 한달 동안 캠리, 캠리 하이브리드, 프리우스 등의 가격을 300만원씩 내린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다. 때마침 엔화 약세라는 외부 여건과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기아차에 근접한 일본차 가격

사실 나카바야시 히사오 한국도요타 사장은 그동안 "엔저라고 해서 가격을 쉽사리 조정할 수는 없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여왔다. 엔고로 인해 한국도요타가 적자에 시달렸고 엔저 기조 속에 가격을 내렸다가 다시 엔화 강세로 돌아서면 곧바로 가격을 올릴 수도 없다는 얘기다. 2008년 엔화가 약세에서 강세로 돌아섰을 때 혼다코리아가 환율변동을 이유로 어코드 가격을 600만원가량 인상한 뒤 판매가 수직 낙하한 사례도 있다.

게다가 가장 판매 대수가 많은 캠리나 캠리 하이브리드는 일본이 아니라 미국에서 생산돼 엔저 효과를 노리고 가격을 낮출 여력이 크지 않다. 이뿐만 아니라 브랜드 가치 하락을 감수해야 하고 중고차 가격이 떨어져 기존에 구매한 고객들의 불만도 감당해야 한다. 그럼에도 최근 한국도요타는 일본 본사와 협의해 가격을 낮췄고 이는 엔저에 기반한 본사의 수익성 개선에 힘입어 점유율을 끌어올리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일본차 빅3 중 넘버1인 도요타의 가격 할인은 닛산과 혼다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한국닛산과 혼다코리아가 항상 한국도요타의 가격을 참고해왔기 때문이다.

이같은 가격 할인 공세는 독일차나 미국차 등 다른 수입차보다 국내 시장의 80%를 점유한 현대·기아차에 부담이 될 수 있다. 예컨대 하이브리드 전용 차종인 프리우스 기본형이 2830만원으로 내렸는데 이는 현대차 소나타 하이브리드 최저가형(2865만원)보다 싸다. 물론 소나타 하이브리드도 5월에 50만원을 할인해 실제 구매 가격은 여전히 프리우스가 비싸다.

그러나 2009년 말 프리우스가 국내에 처음 출시될 때 3790만원이던 것을 감안하면 프리우스 가격은 25% 이상 떨어졌다. 더욱이 엔저가 가속화할수록 일본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국내 판매 가격을 낮출 여력이 커지므로 차종을 막론하고 가격 역전 현상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또 판매량이 늘어나면 규모의 경제가 가능해져 부품 가격을 낮출 수 있고, 이는 그만큼 국내 소비자에게 일본차 구입의 이점을 크게 해준다. 다시 말해 현대·기아차의 '효자 종목'인 소나타와 K5, 그랜저와 K7 등의 시장을 일본차 업체가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다. 윤대성 한국수입자동차협회 전무는 "엔화 강세로 고전해온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가격을 낮추고 판매를 늘려 '규모의 경제'를 갖추면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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