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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체급 안 맞는 번영의 종말
[Network Research]
[3호] 2010년 07월 01일 (목) 김흥종 대외경제정책연구원 economyinsight@hani.co.kr

김흥종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센터 소장

1993년부터 2007년까지는 경기 상승세, 어떻게 보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긴 호황기였다. “2001년을 전후해 경기침체가 있었지만 그건 그저 약한 감기가 한번 지나간 것이다. 예방접종 한 번 맞은 것이라고 보자.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 걸쳐 진행된 경기침체와 ERM(유럽 환율조정 체제)의 일시적 붕괴 뒤 15년 이상 미국과 유럽 경제는 계속 대세 상승기에 있었다. 동아시아와 러시아, 중남미의 경제위기는 ‘후지고 비능률적인 후진국 체제의 병’이 도진 것에 불과하다. 선진국 경제는 건강하고 세계화는 좋은 것이며, 자본자유화는 창의적인 신의 영역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새로운 금융산업을 창조해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도화선에 불을 댕기고 미국 투자은행이 공중분해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도래할 때까지 이런 낙관과 믿음은 선진국,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2008년 그 믿음은 깨졌고, 다행스럽게도 대공황을 답습하지 않겠다는 각국 정부의 공조하에 세계적 규모의 정부 재정이 민간에 투입됐다. 이로써 금융위기가 일시적으로 봉합됐지만 재정이 빈약한 나라부터 재정위기가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이고 당연한 수순이다. 어떻게 보면 ‘폭탄 돌리기’를 하는 것과도 같다. 언제쯤이면 살얼음같이 불안한 세계경제가 폭탄의 뇌관을 제거하고 다시 한번 낙관적 전망을 그릴 수 있을까.
그리스에서 시작된 유럽발 재정위기는 미약하게 회복되고 있는 세계경제에 검은 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그리스에 이어 스페인이 흔들렸고, 헝가리는 스스로 고백했으며, 포르투갈과 다른 국가들로 의심의 눈초리가 향하고 있다. 유럽 경제는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형국이어서 다른 나라들은 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문제는 이 위기 국면이 단기간에 해결되지 않고 당분간 지속적인 불안 요인으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데 있다. 왜냐하면 재정위기는 유동성 위기와는 달리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빚을 진 정부가 계속 돈을 빌릴 수 있더라도 어마어마한 부채가 청산되려면 궁극적으로는 수익 모형이 다시 작동해 돈을 벌어 갚거나 채권자가 부채 탕감을 해줘야 하는데, 전자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후자는 금융시장에 큰 충격을 주는 예외적인 상황인 것이다.

   
 
살얼음판 세계경제 폭탄 돌리기

그리스를 살펴보자. 그리스 정부의 국가 채무와 2009년의 재정 적자는 각각 국내총생산(GDP)의 115.1%와 13.6%로 모두 유럽 최고 수준을 보이고 있다. 더구나 이 수치는 2009년 9월 그리스의 전임 정부가 예상한 재정 적자 수준 3.7%를 무려 9.9%포인트나 초과하는 것이다. 신용을 생명으로 하는 금융시장에서 그리스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고 정책 집행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크게 높아진 것은 당연하다(<표1> 참조).
그리스 정부의 파산 가능성이 회자되면서 그리스 정부와 경제에 대한 불신이 어느 때보다도 높다. 지하경제 비중이 높아 세수 기반이 취약하고, 상대적으로 비대한 공공 부문의 비효율이 높으며, 연금 수준이 높다는 분석도 있다.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다면 이런 부분도 그냥 넘어갈 수 있으련만, 위기가 닥치니까 정부의 비효율성과 정책 집행상의 무능력이 비판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리스 정부 내부의 요인과 함께 다른 요인도 찾아보아야 한다. 그리스 경제가 관광과 해운 등 경기 동행적인 산업에 특화돼 있어, 글로벌 경제위기와 같은 경기침체기에 정부가 대응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와 함께 유로존이라는 통화동맹의 한계도 있다. 사실 유로존에 가입함으로써 그리스는 많은 혜택을 누렸다. 상대적으로 낮은 이자율과 높은 신인도를 바탕으로 해외 차입이 훨씬 쉬워졌고, 경제 강국 독일이 사용하는 화폐를 같이 쓰는 행운도 누리고 있다. 갑자기 부자가 된 것으로 느낀 그리스 국민은 과소비를 하고, 그리스 정부는 차입을 바탕으로 세출을 늘릴 수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붐은 거품으로 이어졌다.

경제 체질 약한 남유럽
   
 
이러한 상황은 그리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통화동맹에 속한 주변부 국가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자기 체급에 맞지 않는 경제적 번영은 또 한편으로 막대한 경상수지 및 상품수지의 적자를 가져온다. 남유럽 국가는 경제위기 이전에도 매년 GDP의 10%를 넘나드는 무역수지와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이러한 경상수지 불균형 문제는 이미 통화동맹을 형성할 때부터 예견됐는데, 경제 체질이 약한 남유럽 국가가 독일 등 선진 경제권과 단일 통화로 묶이면서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다.
이 모든 상황이 문제없이 지속될 수는 없다. 미국에서 시작된 글로벌 경제위기로 선순환 고리가 깨지자 거품은 꺼지고 빚만 잔뜩 남게 된 것이다. 경제위기가 덮친 나라는 일반적으로 화폐 가치를 떨어뜨려서, 또는 자연스럽게 하락해 국민과 정부가 허리띠를 졸라맬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겠지만, 통화동맹하에서 그리스는 이런 수단을 활용할 수 없다. 결국 위기 극복은 혹독한 구조조정의 대가로 받을 수 있는 구제금융뿐인 상황이다.
지난 5월10일 유럽연합(EU) 재무장관회의는 5천억유로 규모의 재정 안정 메커니즘 설립을 추진하기로 합의했고 국제통화기금(IMF)도 2500억유로 상당의 지원 의사를 밝혀, 총 7500억유로 상당의 재정 안정 메커니즘 지원 계획이 발표됐다. 이에 앞서 그리스 정부는 향후 3년간 그리스 총 GDP의 11%에 해당하는 300억유로 상당의 재정 감축안을 발표해 구제금융 지원의 근거를 제공하려 했다. 하지만 재정 감축안과 구제금융은 모두 한계를 갖고 있다. 우선 구제금융 계획은 우리나라 1년 GDP에 해당할 만큼 이례적으로 큰 규모의 지원 대책임에는 분명하지만 구체적인 시행 방안이 마련되지 않아 작동되기까지 여러 달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그리스 정부의 재정 감축안은 부가가치세율을 23%로 인상하고, 공공 부문의 임금과 연금을 삭감하며, 탈세 방지, 공기업 민영화와 국방비 감축 등을 약속하고 있다. 이 감축안은 5월6일 그리스 의회를 통과했으나 그 실행 여부를 단정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행되더라도 당초 예상한 감축 효과가 날지는 불확실하다. 감축안이 주로 일반 국민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간접세 인상과 공공 부문 구조조정에 집중돼 국민의 광범위한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또한 문제가 되는 고소득층 추가 과세 부분은 유럽 단일시장이라는 특성 때문에 실제로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남유럽 국가 경제위기는 그리스 위기 사태의 추이에 따라 여러 가지 상황을 상정할 수 있지만, 가장 낙관적으로 보아 구제금융이 시장의 안정을 가져오더라도 구조적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취약한 국가들의 높은 국가 채무와 만성적인 경상수지 문제 등이 궁극적으로 해결돼야 한다. 또한 시장이 이미 유로존의 구조적 결함을 인식하는 상황에서 유로화 가치의 방어가 성공할지는 의문이다.
구제금융안이 시장에서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계속 불안정이 심화된다면 그리스 정부는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거나 최소한 채무 재조정을 요구할 수 있다. 이는 2009년 말 기준으로 총 3092억달러에 상당하는 대외 채무 상환을 불투명하게 만들며, 주변국으로 위기를 확산시켜 국제 금융시장을 큰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 결국 그리스 국채를 인수한 은행 등 민간이 경제위기의 손실을 분담하는 것인데, 이는 은행권, 특히 유럽계 은행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치고 다른 유로권 국가로 부정적 여파가 미칠 것이다. <그림>에서 확인하는 바와 같이 남유럽 국가의 부채는 프랑스·독일 등 유럽의 주요 국가 은행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프랑스·영국은행 등 유럽계 은행들의 해외 대출에서 그리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0.1~4.3%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남유럽 국가 재정위기에 포함된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를 모두 포함할 경우 대출 비중이 7.9~24.2%로 높아져 위기가 부각되면 연쇄적인 충격이 불가피하다. S&P는 4월27일 보고서를 통해 채무 재조정이 이뤄질 경우 채무 삭감 규모는 전체 그리스 채권의 20~50%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럽계 은행, 한국 외채 50% 차지
그리스 재정위기가 한국에 영향을 미치는 경로는 다양하다. 첫째, 남유럽 국가의 재정위기로 유럽의 경제회복이 늦어져 우리의 제2수출 대상인 EU와의 교역이 위축되는 것이다. 2000년 이후 우리나라의 대선진국 수출에서 가장 큰 증가를 보인 곳이 EU였다. 이런 수출 증가를 기반으로 EU는 일본과 미국을 제치고 중국 다음으로 우리의 수출 대상지가 되었다. 하지만 최근 대EU 수출은 다른 대상 지역에 비해 매우 낮은 회복을 보이고 있다. 그리스에 대한 2010년 1분기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73.5% 감소한 것을 필두로 네덜란드 수출이 26.6%, 벨기에 수출이 23.6% 감소했다. 그 결과 <표2>에서 보듯 우리나라 수출이 1분기에 평균적으로 34.4% 증가하는 동안 EU에 대한 수출은 주요 수출 대상국 중 가장 낮은 12.6%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상황은 그리스 재정위기가 어느 정도 진화되고 다른 지역에 대한 전이 가능성이 낮아질 때까지는 크게 변화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둘째, 외국계 은행들의 포트폴리오 구성상의 문제 때문에 채무 조정(deleveraging) 과정에서 한국에서 투자 자금을 회수하는 경우다. 그리스 국채를 다수 보유한 유럽계 은행이 한국의 대외 부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0%를 넘는 수준임을 볼 때, 이 은행들이 전세계적인 자산 재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현금 주머니같이 자금 유출입이 용이한 한국에서 손쉽게 유동성을 확보하려고 할 수 있다. 이미 그리스 재정위기를 겪으면서 이러한 충격을 어느 정도 경험했고, 향후에도 단기적 충격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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