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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보다 앞섰던 ‘정치’의 선택
[Special ReportⅠ]1 유로화의 탄생 (1991~ 2001)
[19호] 2011년 11월 01일 (화) 페리 바초글로우 외 economyinsight@hani.co.kr
페리 바초글로우 Ferry Batzoglou 만프레드 에르텔 Manfred Ertel 울리히 피히트너 Ulrich Fichtner 하우케 구스 Hauke Goos 랄프 호페 Ralf Hoppe 토마스 휴틀린 Thomas Huetlin 귀도 밍겔스 Guido Mingels 크리스티안 라이어만 Christian Reiermann 코르디트 슈닙벤 Cordt Schnibben 크리스토프 슐트 Christoph Schult 토마스 슐츠 Thomas Schulz 알렉산더 스몰치크 Alexander Smoltczyk 이상 모두 <슈피겔> 기자 유로화가 왜 현재 유럽 대륙을 떨게 했는지 이해하려면 시간을 20∼25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독일의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던 1980년대 후반, 아직 유럽인들의 뇌리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고 통일된 독일이 다시 유럽에 위험요소가 될지에 대해 유럽 각국이 토론하고 있던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그렇지 못하면 서로 다른 국가와 민족이 공동 통화를 사용한다는 이상적이면서도 용감한 프로젝트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자크 들로르는 이 시대에 대한 최고의 증인이다.그는 10년간 유럽집행위원회 위원장이었고, 유로화의 기초를 닦은 ‘마스트리흐트 조약’을 만든 사람이다.오늘날 그는 당시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허점투성이였는지, 공동 통화라는 비전이 얼마나 허상적이었는지에 관한 비판을 듣고 있다.하지만 들로르는 이 비판에 수긍하지 않는다.그는 그의 처음 의도대로 되었다면 유럽은 훨씬 더 통합되고 중앙 집중적으로 통치됐을 것이고, 집행위원회가 유럽 각국 정부 수장들의 협의회에 의해 매번 방해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들로르는 자신과 함께했던 정치 엘리트들과 영원히 같이 일하고 싶었다.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독일의 헬무트 콜, 네덜란드의 뤼돌퓌스 뤼버르스, 포르투갈의 실바…. 이들은 오늘날의 정치가들과는 달리 모두 확신을 가진 유럽인이었다.하지만 진정한 유럽 통합을 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유럽 각국을 짜맞추지는 못했다. 1992년 체결돼 최초로 유럽 연합을 설립한 마스트리흐트 조약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이 조약은 유럽을 ‘3개의 기둥’ 위에 세웠다.첫 번째 기둥은 ‘경제통화공동체’를 포함한 경제 기둥이었다.이를 통해 제도적 틀이 마련됐고, 세금 및 금리 정책 조정 합의 같은 공동경제 정책 역시 가능했다.하지만 마스트리흐트 조약의 틀을 채울 정치적 의지가 부족했다. ‘유럽합중국’은 결국 주례 연설용 미사여구로 남았지만, 그럼에도 유로화와 함께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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