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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한진 동물원과 재벌 개혁 2라운드
[경제사 산책]
[18호] 2011년 10월 01일 (토) 이병천 economyinsight@hani.co.kr

이병천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

대한민국 재벌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들의 고삐 풀린 탐욕과 독식, 약탈적 축적이 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제2라운드의 재벌 개혁과 경제 민주화운동, 달리 말해 거의 ‘공공악’(Public Bads)처럼 된 재벌의 횡포에 대항해 ‘공공선(Public Goods) 연대’, 민주적 ‘공생발전 연대’ 운동을 시작해야 할 때다. 우리는 정치적 민주화 이후 오히려 국민 대중의 살람살이가 더 팍팍해지고 미래가 불안하게 된 ‘민주화 역설’과 마주하고 있다. 이 역설은 왜 초래됐나? 절차적 민주주의하에 우리나라의 경제와 사회, 그리고 국가권력조차 소수 재벌의 탐욕과 ‘정글 자본주의’의 포로로 붙들린 데 큰 요인이 있다.

고삐 풀린 탐욕과 배제적 ‘정글 자본주의’
재벌 개혁은 세계 어디서나 민주적 선진화로 가는 기본 관문이었다. 유럽에서 스웨덴과 독일이 그 관문을 통과했다. 특히 스웨덴의 발렌베리와 한국의 삼성이 얼마나 다른지는 이미 널리 알려졌다. 미국의 뉴딜은 의료·주택 복지의 후진성에서 보듯이 유럽식 복지국가를 달성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노동의 힘도 약했다. 그렇지만 반독점주의만큼은 어떤 나라보다 투철해 재벌 개혁의 관문을 통과했다. 그 점에서 한국 시장은 미국 시장보다 닫힌 시장이다. 아시아의 경우, 일본은 전후 미국 점령기에 재벌 해체를 단행해 이후 고도성장의 기초를 닦았다. 대만·싱가포르에는 재벌체제가 없다. 대만은 국영기업과 중소기업의 두 바퀴, 싱가포르는 국영기업과 외국기업의 두 바퀴 체제다. 홍콩은 워낙 예외적인 자유시장 국가다. 따라서 한국만이 예외적으로 민주화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재벌에 발목 잡힌 ‘개혁 지체 국가’다.
상황을 돌아보면, 2005년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대화를 담은 ‘안기부 X파일’이 공개돼 파문을 일으켰다. 2007년에는 김용철 변호사에 의해 삼성의 비자금 관리와 로비 행각이 낱낱이 알려졌다. 노무현 정부 때 일어난 이 사건들은 민주정부 시기 재벌의 ‘국가 지배’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X파일에서 거론된 ‘떡값 검사’들과, 대화 당사자인 이 전 회장과 홍 회장은 모두 무혐의 처리된 반면, 삼성과 검찰의 불법 비리를 고발한 이상호 문화방송 기자,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고문은 유죄판결을 받은 게 우리의 현주소다.
이명박 정부 들어 고환율, 부자 감세, 각종 규제 완화 등 재벌에 퍼주기식 정책, 그리고 서민과 노동자에게 고통주기 정책으로 재벌은 한국 현대경제에서 최고·최대의 자유를 구가했다. 완전히 고삐 풀린 재벌들의 비리·독점·독식의 횡포는 중소기업에 대한 납품단가 후려치기는 기본이고, 비상장 계열사에 일감 몰아주기식 편법적 부 대물림, 계열사에서 소모성 자재 구매 대행, 문방구·떡볶이장사 등 서민형 자영업종까지 파고드는 싹쓸이식 문어발 확장으로까지 번졌다.
어디 그뿐인가. 노동 분야는 어떤가. 삼성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고 강변한 창업자의 방침 이래 무노조 경영으로 일관하며 노동자 위치 추적까지 자행하더니, 자율 노조가 설립되자 곧바로 부당해고로 대답했다. 현대자동차는 2년 이상 근무한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조차 짓밟고 있다. 김진숙의 제85호 크레인 농성 사투와 희망버스 연대운동을 가져온 한진중공업의 경우, 사태에 주된 책임이 있는 조남호 회장이 국회 청문회 출석 요구에 불응하고 해외 도피성 행각을 벌이더니 청문회에 출석해서는 ‘커닝페이퍼’를 읽으며 “정리해고 철회 불가” 방침을 반복했다. 그 와중에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노골적인 대정치권 로비를 회원 기업들에 주문한 문건을 배포해 파문을 일으켰다.

재벌 개혁은 새 희망버스의 기획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이 서울시장 불출마 선언 다음날인 9월7일, 경북 구미 금오공과대학 대강당에서 열린 ‘2011 청춘콘서트’에서 강연하고 있다.
오죽하면 한국의 대표적 보수신문에서 재벌의 사회적 책임과 ‘따뜻한 자본주의’를 운운하고, 심지어 현 정부조차 “탐욕경영에서 윤리경영으로, 자본의 자유에서 자본의 책임으로, 부익부 빈익빈에서 상생번영으로 진화하는 시장경제 모델” 운운하며 ‘공생발전’을 들먹일 정도까지 됐을까. 데이비드 하비는 민영화와 상품화, 금융화, 위기관리와 조작, 감세 등 국가재정의 재분배를 통해 자행되는 신자유주의적 축적에 대해 ‘수탈을 통한 축적’(Accumulation by Dispossession)이라고 했지만, 그 이름은 세계화 시대 한국 재벌의 축적 방식에 딱 들어맞는다. 그러나 재벌의 수탈적·약탈적 축적 체제 개혁과 새 민주적 공생발전의 길이 재벌의 자선과 시혜에 구걸해서 어찌 가능하겠나. 재벌에 민주적 규율 고삐를 물려 시민기업으로 거듭나도록 제2라운드의 재벌 개혁 시민정치운동을 시작할 때다. 재벌 개혁과 경제민주화 운동은 정리해고자, 비정규직, 자영업자, 중소상공인, 혁신 벤처기업가, 중견기업인까지 넓게 묶어 세울 수 있는 진보 개혁의 중심 고리가 될 수 있다. 노동자·서민은 물론 광범한 중간층들이 독점·독식 재벌의 공공악적인 약탈적 축적과 탐욕 행위의 희생자로 돼 있는 구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상황은 노동의 힘이 미약할뿐더러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노동연대 구성력, 취약한 대국민적 신뢰, 또 재벌에 의해 노동이 분할 지배당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한진중공업의 부당 정리해고에 대한 희망버스 연대운동도 이 문제에 걸려 있다. 희망버스 동력이 약화되는 한편, 안철수의 등장에 대한 대중의 폭발적 호응을 보라. 안철수 현상에는 여러 요인이 겹쳐 있으나 그 뿌리에는 ‘삼성동물원’ ‘재벌동물원’에 갇힌 채 불공정하고 약탈적인 행태에 숨막혀하는 수많은 ‘을(乙)들’의 공정·공생 경제과 경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는 것이 분명하다.
김진숙이 노동의 가치와 존엄을 위해 ‘한진동물원’과 싸운다면, 안철수는 기업 및 산업의 공생 생태계를 가꾸기 위해 ‘삼성동물원’과 싸운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두 사람이 오늘의 배제적 정글 자본주의 꼭짓점을 지배하는 탐욕스럽고 무책임한 재벌과 싸우는 데 연대해야 하고, 연대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철수’와 ‘진숙’은 만나야 한다.”(조국) 그렇지만 철수와 진숙의 만남이 단지 자연인만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곧 세계화 시대에 약한 노동조건 속에서 공정·공생 시장의 생태계 진보와 노동 진보가 만나고 연대하는 문제다. 다양한 주체 위치에 흩어져 각개약진하는 ‘을’ 대중의 광범한 저변을 공생의 협력 연대로 묶어 세우는 문제, 그리하여 ‘민주적 공생연대’와 ‘고진로(High Road) 자본주의’라는 새 희망버스의 기획, 그 집단적 주체와 ‘집단의지’를 재구성하고 재창조하는 문제다.

친일에서 부정 축재로
이제 대한민국 재벌의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다시 재벌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한국의 현대 자본주의는 친일 행위로 거대한 부를 축적한 재벌의 주요 분파들이 자신의 과오를 참회하는 데서 출발해야 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중 경제인은 55명인데, 이 중 눈에 띄는 인물은 경성방직 김연수와 화신백화점 박흥식이다. 이들은 반민특위법에 따라 구속돼 재판을 받았는데, 둘의 태도는 대조적이었다.
김연수는 구속될 때부터 자신의 과오를 회개했고, 처벌 없이 재산 일부 몰수와 공민권 정리라는 이례적 처분을 받았다. 반면 반민특위 제1호로 검거된 화신재벌 총수 박흥식은 아무런 참회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죄목은 반민법 4조 7항 “비행기 병기 또는 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에 해당하는데, 검찰 기록이 무려 6천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그런 그였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에 대해 뉴라이트 이데올로그인 이영훈 교수는 박흥식을 처벌할 실정법상의 근거가 취약했고, 주요 죄목인 비행기회사 경영은 자의가 아니라 강요에 의한 것이었으며, 재판은 ‘한 편의 희극’ 같은 것이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현대 한국 재벌의 기원을 식민지 유산에서 찾는 것은 무리다. 화신재벌이나 경성방직 계열은 오히려 예외에 가깝다. 농지개혁으로 토지자본이 몰락하고 신흥재벌에서 지주계급 출신이 거의 배제됐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신흥재벌은 한국전쟁 이후 헌법 개정에 따른 귀속 대규모 공장의 민간 불하, 미국 원조물자 불하, 은행 특혜 융자를 통해 형성됐다. 신흥재벌의 탄생은 곧 특혜와 정치자금을 교환하는 천민적 정경유착, 부정부패 고착화 과정과 일치했다. 그리하여 부정 축재 처리가 4·19 혁명이 안은 시대적 과제로 제기됐지만 이는 민주당 정권과 박정희 정권을 거치며 유야무야 끝났다. 이즈음 전경련의 전신인 한국경제협의회(초대회장 이병철)는 “부정 축재 처리 법안이 노리고 있는 것은 사회주의혁명이라고 규정하더라도 변명할 여지는 없을 것이며, 공산화에의 길을 닦아주는 길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희대의 성명은 지금도 별 변화 없는 대한민국 재벌의 윤리적 수준을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있다.

   
서울 종로에 들어섰던 화신백화점의 전경(위). 지난 6월 대구시 중구 인교동 삼성상회 터 기념공간 준공식에

‘성장의 주역’과 ‘탐욕의 화신’
부정 축재자로 내몰린 재벌들은 권위주의 개발정권의 동맹자가 되어 성장의 주역으로 탈바꿈했다. 이 시기 재벌의 축적은 한편으로 국가가 제공하는 거대한 특혜와 지급보증,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서민의 희생, 재벌 특혜 비용의 전 국민적 전가에 의해 가능했다. 압축성장의 중핵에는 재벌의 고도성장이 있었고, 성장의 주된 과실은 재벌이 거의 독차지했다. ‘선(先)성장 후(後)분배’ 성장체제를 위해 병영적 통제의 억압과 착취 속에서 ‘산업전사’로 헌신한 노동 대중의 희생 아래 ‘한강의 기적’이 꽃피었고, 재벌의 부가 쌓였다. 그 역사 안에 전태일의 분신이 불의 문자로 새겨졌다. 재벌이 비대해지는 만큼 중소기업의 발전은 낙후됐다. 이렇게 재벌 지배하의 불균형 계급구조를 포함해 인사이드와 아웃사이드 간 이중구조적 불균형(나는 이를 ‘개발주의적 이중구조’라 부른다)을 물려주었다는 점에서 박정희 체제는 현재다.
이 시기 재벌의 탐욕과 무책임한 사익 추구를 잘 보여준 사건으로는 ‘삼분(三粉, 설탕·밀가루·시멘트) 폭리’, 삼성 재벌 사카린 밀수, 1972년 ‘8·3 비상 사채동결 조치’ 등이 있다. 밀수 사건은 삼성 계열의 한국비료가 사카린을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난 것이다. 삼성은 한국비료의 공장을 짓기 위해 일본 미쓰이사에서 정부 지급보증으로 상업차관까지 도입해놓고도 이런 일을 저질렀다. 그런데 이 사건은 박정희와 이병철이 공모한 조직적 밀수 사건이었다. 다음은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의 증언이다.
“1965년 말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 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 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달러를 줬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 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가,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 현장은 내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한편 8·3 긴급조치는 사채를 마구 빌려 부실화된 재벌에 대해 사채 부담을 대폭 감해준 것으로, 거의 혁명적인 특혜 조치였다. 이는 전경련이 ‘정부예산을 반으로 줄이라’는 등 압박해 정부가 받아들인 조치였지만, 기업이 돈을 빼돌려 사채놀이를 하는 ‘위장 사채’가 전체의 3분의 1로 드러나 악덕 기업인의 탐욕을 다시 증거해주었다.
lbch@kangw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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