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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선율 만들던 손, 여전히 꿈꾸다
[노동과 삶]복직투쟁 5년째 맞는 콜트·콜텍 노동자
[18호] 2011년 10월 01일 (토) 이선옥 economyinsight@hani.co.kr

이선옥 르포작가

   
이인근 콜텍 지회장이 2008년 10월 45m 높이의 송전탑에 올라가 농성하는 모습을 동료들이 올려다보고 있다.
그는 그곳을 ‘꿈의 공장’이라 불렀다. 내 맘대로 해도 간섭받지 않는 공장. 최저임금에 1천원짜리 한 장 얹어주지 않아도, 직원을 마음대로 자르고 들여도, 산재 처리를 하지 않아도 눈치 볼 노조 따위 없는 공장. 해마다 100억원이 넘는 알토란 같은 수익을 수십 년 동안 안겨주었던 공장. (주)콜트·콜텍의 박영호 사장에게 일렉트로닉 기타를 만드는 인천의 콜트, 어쿠스틱 기타를 만드는 충남 계룡의 콜텍 공장은 그야말로 ‘드림 팩토리’였다.
박영호 사장의 꿈이 영글던 그 공장에는 또 다른 꿈을 가진 노동자들이 있었다. 목재 분진과 유기용제 냄새로 가득한 작업장에 시원한 창문 하나만 뚫렸으면 하는 꿈, 사포질로 시큰거리는 손목 좀 잠시 쉴 수 있게 휴식시간이 있었으면 하는 꿈. 잘린 손가락이나 으깨진 살, 구멍난 폐를 제대로 치료받았으면 하는 꿈. 물량이 줄어도 잘리지 않고, 여자든 남자든 일한 만큼 똑같은 대우를 받고, 더 이상 상스러운 욕설을 듣지 않을 수 있었으면 하는 꿈.
불행히도 사장과 노동자들의 꿈은 같은 공장에서 영글 수 없었다. 꿈을 포기한다는 건, 사장에게는 더 많은 이윤과 제왕의 권력을 포기하는 일이었고, 노동자에게는 인간이길 포기한 채 기계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결국 인간답게 살고 싶던 노동자들은 자신의 소박하고 당연한 꿈을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장과 노동자의 동상이몽
노조가 만들어지자 박영호 사장은 콜트공장과 콜텍공장의 문을 닫아버렸다. 2007년 4월 콜텍공장이, 2008년 8월 콜트공장이 적자와 노사갈등을 이유로 덜컥 폐업을 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한 노동자들은 닫힌 공장 문을 멍하니 바라봐야 했다. 콜트의 56명, 콜텍의 67명은 모두 정리해고를 당했다.
당장 생계가 막막했다. 아이들은 한창 돈이 들어갈 나이였고, 월급날이면 이리저리 돈이 빠져나가야 할 일이 줄줄이 기다리는 살림이었다. 적은 월급에 고만고만한 형편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해고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당장 부당해고와 위장폐업에 대한 소송을 벌여야 했고, 기계를 빼내지 못하도록 공장도 지켜야 했다. 소송비와 생계비, 투쟁기금까지 마련해야 하는 암담한 상황이 이어졌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노동조합을 만든 게 이토록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인가? 노동자들은 울었고, 분노했고,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수십 년 동안 결근 한 번 없이 일해서 막대한 이윤을 만들어준 공장이, 단 하루 만에 나를 가차 없이 내쫓을 수 있구나 하는 배신감이 마음을 다잡게 했다.
“워낙 환경이 안 좋으니께 노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 처음에 콜트가 왔을 땐 문 다 걸어잠그고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니께(먼저 노조를 만든 콜트의 조합원들이 콜텍 공장에 선전전을 오곤 했다). 왔다가 그냥 가고 그랬지. 온지는 알았어도 창문은 없으니께 문 걸어잠그면 밖이 안 보이잖어. 창문도 없이 사람이 죽든 말든 기타만 만들면 된다 생각한 거지. 괘씸혀. 폐업하던 날도 일요일에 쉬고 월요일 아침에 출근했더니 문을 잠갔어. 이러이러해서 문을 닫겠다 한마디만 했어도 내가 이렇게 안 싸웠지. 근데 말 한마디도 없이 그냥 닫은 거여. 성질이 나서 지금까지 오기로 견뎌왔지. 가정이 있으니께 타격이 크지. 중간에 정리할까 고민도 많이 했지만,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해서 지금까지 남은 거여.”(박만규·56)
“우리 성과급 100% 줄 때 관리자들은 400%를 주었더라고. 아무도 몰랐는데, 노조 생기고 나서 소송 때문에 회사 서류를 보고 알게 된 거야. 월급도 우리보다 많은데다 400%니 그게 얼마야. 말끝마다 적자라고 우리를 그렇게 쥐어짜더니, 보니깐 흑자더라고. 기가 막힌 거지.”(최정진·49)
그러나 회사를 상대로 싸운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콜트와 콜텍 조합원들 모두 30개가 넘는 소송을 진행했거나 진행 중이다. 소송에 들어가는 돈도,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의 마음고생도 개인이 감내하기엔 너무나 크다. 업무방해, 부당해고, 부당노동행위, 민사부당해고, 가압류, 채권추심, 약식재판, 언론중재, 주거침입, 근로기준법 위반, 상해, 폭력…. 셀 수도 없는 낯선 소송 제목들이 이들의 삶을 따라다닌다. 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는지, 지쳐도 포기하지 않은 탓에 가뭄에 콩 나듯, 더러 기쁜 소식도 있다.
회사가 정당한 교섭을 해태한 사실이 인정돼 박영호 사장이 벌금형을 받았고, ‘노조의 파업 때문에 공장이 망했다’는 <동아일보>의 왜곡 보도에 맞서 걸었던 소송이 지나 9월15일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반노조 정서를 가지고 악의적인 보도를 일삼던 거대 보수 언론사를 상대로 작은 노조가 이긴 것이다. 4년 동안 벌인 ‘양성평등 소송’도 이겼다. 지난 4월28일, 콜텍 공장의 여성 조합원 12명은 ‘동일 노동에도 차별받았던 임금을 지급해달라’는 소송에서 이겨, 밀린 임금을 모두 돌려받았다. 한 고비, 한 고비 이런 힘으로 버티고 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해고 관련 소송은 고등법원에서 부당해고라 판결 난 게 벌써 2년 전인데도 아직 대법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투쟁을 시작한 지 5년이 넘었지만, 대법 판결을 기다리는 지난 2년이 가장 초조하고 절실하다. 복직하면 돼지 한 마리 잡을 거냐는 농담에, 장석천(42) 사무장은 “돼지 잡고 막걸리 마시는 게 문제가 아니죠. 이기기만 하면 그동안 연대해준 동지들과 뮤지션들을 다 모아서 진짜 멋진 공연 한번 하고 싶어요.” 목소리를 높인다. 살짝 높아진 목소리에서 혹시나 하는 불안함을, 그럴 리 없다는 주문으로 간신히 누르고 있는 마음이 느껴져 짠했다.
 
글로벌 스탠더드 안중에도 없는 사장
   
창문 하나 없이 분진과 유기용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공장 내부 모습(왼쪽), 콜트·콜텍 노조원들을 후원하기 위한 문화제.
콜트악기 이동호 조합원의 분신, 양화대교 옆 15만V 송전탑에 올랐던 콜텍악기 이인근 지회장의 고공단식 농성, 본사점거 농성, 고추장과 된장을 만들어 팔며 버틴 생계투쟁, 록페스티벌과 악기쇼를 쫓아다닌 6차례의 해외 원정투쟁 등 이들의 지난 5년은 고단하고 버라이어틱했다. 해외 원정투쟁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독일 원정 때 만난 한 교포는 “독일은 노동자를 함부로 해고할 수 없을뿐더러, 부당해고라는 판정이 나면 그 회사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거의 파산을 각오해야 할 수도 있다. 노동자를 이렇게 대하는 회사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LA 원정 때 헌신적으로 함께한 윤우찬(47) 목사는, ‘자본주의의 천국’ 미국에서도 이런 식의 천박한 행태는 없다고 했다. “미국서는 법에만 호소한다 해도 이렇게 되진 않아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죠. 말도 안 되지. 위장폐업? 원상복구해라 하면 당장 해야 해요.”
하지만 ‘글로벌 스탠더드’는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미국 따라하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이 나라는 해고의 자유만 따라할 뿐, 그 나머지 일은 모르쇠다. 적어도 ‘해고’가 걸린 판결만큼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가장 빨리 처리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법의 문제를 꼭 짚고 넘어가야 해. 자본가는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그 사람들한테는 푼돈도 안 되는 벌금이면 끝이니까. 수조원을 가진 사람한테 400만원, 500만원 벌금으로 무슨 위협이 되겠어. 우리는 하루하루 피눈물이 나는데. 기업이 사회활동을 통해 돈을 버는데, 자본가들은 전혀 사회에 기여를 안 하려고 해. 콜텍이 문화재단이란 거 만들어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데, 노동자들 다 해고하고, 거기서는 공감·나눔·소통 이런 거 주장하니까 웃기는 거지. 수십 년간 기업들이 다 내는 불우이웃돕기 성금도 한 푼 안 낸 사람이었어. 그리고 중국이랑 인도네시아로 물량 빼서 흑자 공장 문 닫고, 거기 가서 똑같은 짓 하고 있잖아. 이게 투기자본이지 뭐여, 단물 쪽 빨아먹고, 노조 만드니까 문 닫고. 그래놓고도 박영호 사장이 법정에서 뭐랬는지 알아? 지랄 같은 노동법 때문에 외화를 그렇게 많이 벌어들인 자기가 살 수가 없대. 판사 앞에서 그런 말을 하더라니께. 참, 말도 안 나오지.” 이인근 콜텍 지회장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사람 좋은 웃음을 가진 영락없는 충청도 아저씨인 그는 할 말이 너무 많은 싸움 탓인지 오히려 말을 잇지 못했다. 가장 어려웠던 순간을 묻는 질문에는 “아이고, 말도 말어~” 하고 웃고 만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첫 번째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기타 이야기>였다. 아마추어든, 인디밴드든, 기성 뮤지션이든 모든 연주자에게 특별한 존재인 기타라는 악기. 우리가 소비하는 많은 물건들 중에 그 물건이 내게로 온 사연을 간직하고 말하고, 추억하는 것의 유일한 소비재.
누구는 어릴 적 차곡차곡 모은 용돈으로 기타를 장만했을 때의 충만했던 기쁨을 기억하고, 누구는 유명 뮤지션이 연주하는 꿈의 기타를 갖기 위해 죽어라 일했던 젊은 날을 아련하게 추억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다른 이의 기타 연주에 하루의 피곤함을 녹이거나, 새로운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기타가 가진 이야기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기타의 이야기가 빠졌다고 영화는 말한다. 바로 그 아름다운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 지문이 닳도록 윤나게 문지르던 기타가 누구 손에서 어떻게 연주되는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이야기였다.
누군가에겐 ‘꿈의 악기’인 기타가 누군가의 꿈을 빼앗는 물건일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아름다운 선율에 이토록 고통스러운 사연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뮤지션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들은 몰랐다. 밖을 보면 딴 생각이나 한다고 창문 하나 없는 공장에서, 최저임금을 겨우 받으며, 온갖 유기용제와 분진 가루에 묻혀 살면서도, 그저 열심히 사포질을 하고, 톱날을 부리고, 나무를 깎아내는 손들이 있었다는 걸. 그 오묘한 곡선과 예민한 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지문이 닳고, 손목이 퉁퉁 붓고, 폐에 구멍이 뚫리도록 일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걸 몰랐다.
그 기막힌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들은 곧 이 싸움에 연대하기 시작했다. 콜트·콜텍 노동자와 함께하는 문화노동자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수많은 뮤지션들이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위해 무대에 섰다. 세계적인 뮤지션부터, 기타 하나 달랑 멘 무명의 밴드까지, 기타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노동자들의 슬픔이 어린 기타로 노래할 수 없다”고 노래해주었다. 그토록 비참한 노동이, 어쩌면 그토록 아름다운 악기를 만들어냈는지…. 소비자인 이들은 처음으로 내가 무심코 쓰는 물건의 뒤안에 묻힌 수많은 생산자들의 노동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클럽에서, 거리에서, 각종 공연장과 록페스티벌에서 뮤지션들은 “노 워커스, 노 뮤직, 노 라이프!”(No Workers, No Music, No Life!)를 외쳤다. 난생처음 자신이 만든 기타가 연주되는 걸 직접 본 노동자들은 감동했다. 내가 만든 기타가 나를 위해 노래해준 건 처음이었다. 나보다 더 귀한 취급을 받던, 징글징글하던 기타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제일 비싼 기타는 한 400만원 정도 간다고 그랬어. 10개씩 나갈 때면 ‘야, 몇천만원 나간다’ 그랬거든. 그런 수제품은 싼 것도 피아노 한 대 값이래. 그거 한번 건드리기라도 하면 아유, 난리나. 뒤지게 깨지지. 이 ××야, 그게 얼마짜린데, 네 월급보다 많은 건데.”(문희, 최정진)
“입사한 첫날 딱 들어갔는데, 눈이 매워서 눈물이 막 나. 시너니 그런 유기용제 때문에. 먼지는 또 얼마나 나는지. 창문도 없지. 들어가면서부터 일을 시작해서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갈 정도로 무섭게 규제를 했어. 그런데 노조가 생기고 나서 아침 8시30분 출근인데도 7시20분부터 일하던 게 없어졌어. 그 시간만 해도 30∼40분을 공짜로 일한 거잖아.”(최정진)
“나는 노조 생기고 좋았던 게 휴식시간을 15분씩 준 거야. 일할 때 옆 사람과 얘기할 새도 없었는데, 오전·오후 15분이 있으니까 그 시간에는 무조건 모이는 거야. 간식도 먹으면서 또 일하고 하니까 진짜 좋더라고. ‘이 돌대가리야’ ‘논에 가서 약 먹고 뒤져라’ ‘저 ×년 잘라버려라’ 하던 욕도 많이 없어지고. 또 학자금 나왔던 게 나는 젤 좋더라고. 아이들 중·고등학교 학자금을 여자들은 안 주다가 받게 됐어. 재밌더라고. (웃음)”(문희·49)
“노조가 있을 때랑 없을 때는 하늘과 땅 차이였어.”(김정심·53)
 
마음의 상처가 가장 아팠다
   
이 행사를 기획한 자원봉사자들.
노동조합을 만든 뒤, 이들은 지옥 같던 일터를 사람 사는 일터로 조금씩 바꿔나갔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대가는 혹독했다. 특히 마음이 많이 다쳤다. 충남 계룡시에서 고추농사와 깨농사를 짓고, 그걸로 고추장과 된장, 장아찌를 만들어 파는 생계투쟁 담당 김정심·문희·최정진 조합원은, 휴가가 한창이던 여름 뙤약볕에서 고추밭을 매며 상처투성이 기억을 끄집어냈다.
“몸이 힘든 거는 잊어버릴 수 있는데, 다친 마음은 힘들더라고. 사람과 사람 관계가… 회사랑 싸운 거보다 동료들끼리 서로 그랬던 게 젤 힘들었던 거 같아. 지금은 오래돼서 식구 같지만, 옛날 갈등이 심할 때는 너무 힘들었어.”(문희)
“지금은 투쟁에 익숙해졌지만 처음엔 갈등이 심하니까 누가 그만두겠다고 해버리면 서로 힘들고 그러잖아. 한 사람 안정시켜놓으면 다른 쪽에서 또 그러고. 그런 게 힘들었지. 지회장이랑 사무장이 날마다 그 뒤치다꺼리하러 다니고, 진짜 힘들었을 거야. 그 힘든 과정에도 둘이서 흔들림 없이 버티니깐 우리가 있지, 둘 중 하나라도 나갔으면 이렇게 못 있었을 거야.”(최정진)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떠난 사람은 떠나고, 남은 사람은 남아 5년 넘는 세월을 버텼다. 그래도 노동조합을 만들었던 것에 후회는 없다. 인간답게 살고 싶은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은, 노동조합뿐이었으니까.
사장이 꿈의 공장이라 부르던 곳에서, 꿈의 기타를 만들면서 정작 자신의 꿈은 잊고 산 노동자들은, 이제 새로운 꿈을 꾼다. 꼭 복직해서 다시 누군가의 꿈을 노래할 기타를 만들고 싶은 꿈, 아이에게 친구들 다 신는 메이커 운동화 하나 사주고 싶은 꿈, 다친 마음을 치유하며 몇 개월 푹 쉬고 싶은 꿈.
거창하고 대단한 꿈들은 이미 노동자로 살면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수줍던 시절에 품은 꿈마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고된 노동은 꿈꿀 여유와, 꿈에 대한 기억마저 앗아갔다.
그러나 닫힌 공장 문을 보는 순간 품게 된 새로운 꿈, “지옥 같은 일터였더라도, 다시 내 발로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이렇게 억울하게 쫓겨날 수는 없다. 반드시 공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복직의 꿈을 향한 눈물겨운 이야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절망의 공장이 노동자의 꿈의 공장으로 바뀌는 날에야, 비로소 이들은 진짜 내 인생의 꿈을 꿀 수 있다. 또 그 꿈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손에서 다시 태어난, 그토록 아름답고, 그토록 눈물겨운 기타의 노래에 맞춰… 그때에야 비로소.
namufr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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