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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길닦이
[이순원의 마음쉼터]
[17호] 2011년 09월 01일 (목) 이순원 economyinsight@hani.co.kr

이순원

   
 
지금도 강원도 대관령 아래의 고향 마을에 가면 따뜻한 가을 풍습 하나가 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풍습이라기보다는 산업화 이후에 새로 생긴 게 아닐까 싶은데, 가을이 되면 마을 이장님의 동네방송으로 집집마다 한 명씩 마을회관에 모여 그날 하루 마을 길을 단장하는 것이다.
대개는 추석 명절을 앞둔 때이기도 하고,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회를 앞둔 때이기도 하다. 가을 비바람에 논의 벼가 깔리거나 마을 길이 울퉁불퉁 파이면 객지에 나간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오는 걸음걸이도 뭔가 쓸쓸하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른들이 모여 그날 하루 비에 깎여나간 길을 단장하고, 또 내 논 네 논 가릴 것 없이 큰길가에 쓰러진 벼들을 힘을 합쳐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그때 남의 논에서 일을 하는 아버지에게 아이들이 묻는다.
“아버지, 우리 논도 아닌데 왜 거기서 일을 해요?”
“추석이라고 객지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오랜만에 고향에 오는데, 동네를 그 지경으로 그냥 두면 마음이 좋겠나?”
외지에 나갔던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올 때, 너희가 객지에 나가 있는 동안 우리도 이렇게 마을을 잘 지키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걸 우리는 예전부터 ‘추석 길닦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마을의 큰길, 작은 길 모두 시멘트로 포장해 웬만큼 비가 내려도 삽을 들고 나갈 일이 없지만 그래도 마을에 남아 있는 나이 든 어른들은 회관에 모인다. 길가의 아무렇게나 자란 풀이라도 깨끗하게 깎아 마을 모습을 보기 좋게 하자는 것이다.
그 길을 새로 단장하며 객지에 나가 있는 아들과 손자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명절을 맞아 새로 이발한 아이의 머리처럼 단정해 보인다. 지금은 내가 고향을 찾아가는 입장이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엔 내가 어른들을 대신해 추석 길닦이를 한 때도 있었다.
고향에 갈 때 빠뜨릴 수 없는 게 어른들을 위한 선물이다. 꼭 크고 좋은 선물이 아니면 어떠랴. 마음이 선물이고 정성이 선물이라는데. 아버지·어머니 선물뿐 아니라 이웃 어른들께 드릴 작은 선물들도 준비한다. 그러면서 아주 오래전 초등학교 동창인 이웃집 여자아이가 동네 집집마다 돌린 선물을 생각했다. 그 친구는 중학교 졸업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구로공단의 한 직물회사에 다녔다. 처음 고향을 떠날 땐 집안 어른들 몰래 먼저 서울로 간 동네 언니를 따라서였다. 바로 추석 뒤끝이었다.
그 아이는 몇 해 동안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추석 때 그 아이가 돌아와 집집마다 어머니와 함께 인사를 다니며 이다음에 아기를 낳으면 기저귓감으로 쓰라고 서울 공장에서 자기가 짠 소창을 돌렸다. 동네 어른들 모두 장하고 착하다며 제 딸처럼 그 아이의 손을 어루만졌다.
저마다 바쁘게 살다 보니 명절이 아니면 멀리 떨어져 사는 형제들 얼굴도 보기 쉽지 않고, 같은 고향 산천에서 자란 벗들의 얼굴도 이때가 아니면 보기 힘들다. 명절이라도 있어야 고향을 찾아가는 모습 속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한 친구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명절 때마다 부모님도 안 계시는 고향에 가야 할지 망설이다 ‘그래도’ 하는 마음으로 고향을 찾는다고 했다. 왠지 그렇게 다녀가는 것만으로도 이제까지 바쁘게 산 삶이 위안받고 새 기운이 충전되는 기분이란다. 꼭 명절이 아니더라도 고향은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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