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무대 위에 두 사나이가 멍하니 서 있다. 그들은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어째서인지, 언제부터인지, 고도가 무엇인지, 오기는 올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그저 하염없이 기다리는 두 사나이에게 한없는 지루함과 무의미만 넘쳐난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현대 세계의 한 단면을 소름 끼치게 드러낸다. ‘현재’가 어떤 의미와 구조와 내용인지를 밝혀줄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미래의 한 시점에만 드러나게 돼 있다. 그래서 현재라는 시간은 아무런 의미도 구조도 내용도 없이 지루하고 무의미한 시간으로 멈추어 있다. 그래서 미래가 올지조차 불분명해진다.

‘이념형’ 시장경제와 경제사 단계설
인간의 경제생활에 어떤 발전 단계가 존재하고, 또 그 단계들 사이에는 하나의 발전 법칙과 경향이 내재한다는 사고방식은 아주 오래됐다. 애덤 스미스는 물론이고 영국식 정치경제학에 거리를 유지하려 했던 독일 역사학파 또한 더 정교한 경제발전 단계론을 제시하는 데 고심했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경제발전에 단계가 있다는 것은, 19세기 유럽인들의 의식을 지배한 ‘진보’라는 세계관에 깊게 뿌리박은 독특한 사고방식이었다. 이런 ‘단계론’의 경제사관 근저에는 강력한 메시지가 두 가지 있었다.
첫째는 ‘목적론’이다. 인간 역사의 일반은 물론, 특히 경제체제 변화는 아무런 방향 없이 무작정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더 높은 단계, 즉 더 우월하고 이상적인 체제로 발전하는 진보의 법칙을 가지고 그에 부합하도록 합목적적으로 흘러간다. 여기까지만 보면 대단히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역사철학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 현실적이고 절박한 정책적 과제를 제시하는 두 번째 특징으로 이어지게 된다. 경제발전 진보의 도식 속에 비추어서 현존하는 경제체제의 본질을 규정한다. 이런 진보의 도식 안에 내재한 발전의 일반 법칙에 비춰 현존 체제가 더 높은 단계의 체제로 나아갈 수 있는 정책과 과제를 일괄적으로 도출해낸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후예도, 독일 역사학파도, 마르크스주의자도 이 두 가지를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경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의 단계론은 우여곡절 끝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월트 로스토의 경제성장론, 그리고 이와 맞물리는 총체적 사회개발 이론인 ‘근대화론’으로 정리된다. 서방 선진국들이 19세기 이래 겪어온 자본 축적 과정과 정치사회 발전 과정을 하나의 모범적인 과정으로 도식화해 교과서를 마련한다. 저개발국은 이 교과서의 ‘매뉴얼’을 그대로 따라함으로써 전근대적 사회에서 근대사회라는 높은 단계로 발전할 수 있다고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고방식 또한 이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철저했다. 이들은 주어진 사회생산의 모든 형태를 관찰해 그것의 본질이 봉건제인지 자본주의인지 등을 먼저 밝혀내고, 여기에서 ‘당면 혁명의 성격’, 즉 반봉건 부르주아 혁명 혹은 반자본 사회주의 혁명 등을 규명해낸다. 이에 근거해 사회세력을 분석하고, 어떤 세력과 어떤 식으로 연대해 어떤 구호와 강령을 내걸지 차례로 도출한다.
약간 다른 형태도 있었다. 일본 경제사학의 대가인 오쓰카 히사오는 역사적 유물론과 독일 역사학파 및 베버의 방법론을 결합해 ‘독립적 소유자 생산과 국민경제’라는 가상 모델을 근대적 자본주의 출발점의 이념형으로 추출해냈다. 이는 고 박현채 선생의 한국 자본주의론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 경제는 일제강점기의 반봉건성이 그대로 온존된 가운데 자본주의로 진입한 경제로서, 이런 이념형으로서의 근대 자본주의 사회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독립적 소유자로서의 시민도 육성되지 못했고, 국민경제도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파행적’이고 ‘천민적’인 ‘국가독점자본주의’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자와 농민뿐 아니라 소상인과 중산층 모두가 단합해 외국에의 종속과 국가 및 독점자본의 지배를 종식시킨 정상적인 국민경제, 즉 ‘민족경제’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87년 ‘분단 42년 토론회’에 참석한 박현채 선생(맨 오른쪽).

60년대 이후 한국 경제론의 계보와 단계론
누가 경제사를 별 볼일 없는 연구 분야라고 했던가. 이 세 가지 조류의 경제사관은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우파와 좌파 모두의 의식을 거의 지배하다시피 했다. 1960년대 이후 우리 사회를 횡행한 경제 담론, 특히 한국 경제론의 계보를 되짚어보라. 근대화 이론, 민족경제론, 사회구성체 논쟁,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병행 발전론, 급기야 ‘글로벌 스탠더드’와 지난 정권에서 시작된 ‘자유무역협정(FTA) 입국론’까지. 한국의 우파·좌파·중간파 모두 현존하는 한국 경제의 상태에 불만이 많았다. 각각 모두 하나의 경제발전 단계론을 품었고, 거기에서 ‘목적론’으로 주어진 더 높은 단계의 이상형을 하나씩 품었으며, 이것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지금 한국 경제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모두 이를 실현할 정치적 프로젝트를 벼리고 종종 정치세력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경제사 발전 단계론에 대한 도전이 없지는 않았다. ‘세계경제 발전’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한 나라의 발전 단계는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일찍이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결합불균등발전론’을 제창했고, 종속이론과 세계체제론 또한 흐름은 조금 달라도 비슷한 논지의 비판을 내놓은 바 있다. 하지만 학술적 비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단계론의 처방이 정치적 프로젝트로서 시행됐을 때 그 사회가 순탄하게 그 처방에 따라 순풍에 돛 단 듯이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 경우가 별로 없었다는 현실이다.
사회 현실이란 단계론으로 깔끔하게 포괄되기에는 너무나 많고 다양하고 압도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 한국 경제 단계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든, 그래서 그다음 단계를 무엇으로 설정하든, 그것이 ‘역사적 현실’로서 눈앞에 버티고 있는 한국 경제의 진상과 과연 얼마나 관련 있을까. 한국 서민들의 주거 양태에서 결정적 특징인 전세제도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해되는가. 과열을 넘어 광기에 가까운 대학 입학 경쟁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됐고, 이것은 한국 노동시장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노동운동이 산업별이 아닌 기업별 운동으로 귀착된 역사적 배경과 이후의 예후는 어떠한가. 현존하는 재벌 체제는 어떻게 형성됐고, 어떤 성격을 지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단계론적 사고에서는 항상 더 높은 단계가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현존하는 상태는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이행하는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운 미성숙 상태로만 치부된다. 논리적으로 일관성을 가진 새로운 질서는 오로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더 높은 단계에서만 발견될 뿐이다. 우리는 이렇게 순수한 이념형으로서 제시된 미래의 높은 단계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저분한 현실을 비판하고 바꾸어야 한다는 당위의 채찍질만을 되풀이한다. ‘현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미래’의 선명한 이데아만이 시야에 가득 차며, 급기야 색안경으로 변한다.
1950년대 이후 경제발전 단계론에 입각한 사회개조 프로젝트가 광범위하게 진행된 지역에서는 어이없는 혼란과 비극이 지루하게 되풀이된 경우가 많았다. 기세 좋게 사회주의를 선언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은 실상을 들춰보면 날도둑놈 같은 사회주의 정권의 공공연한 도둑질과 가렴주구에 시달리다가, 오늘날에는 영세한 농업 및 목축업에 기초해 종족 간 전쟁 및 그와 관련된 비즈니스가 판치는 몇천 년 전의 부족사회로 퇴행해버리기도 했다. 미국의 ‘뒤뜰’로서 근대화 이론의 실험장이던 남미는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사회갈등과 혼란이 멈추지 않고 있다. 전세계가 무역과 자본 이동의 자유 속에서 영구적인 번영과 안정으로 갈 것이라는 지구화의 약속은, 2008년 이후 누구도 취하려 들지 않는 부도수표가 되었다. 전 지구적으로 더 높은 단계로 오르기 위해 발버둥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고도’는 아직 오지 않았다. 언제 올지도 모른다. 이제는 정확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또 기다려서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도 기억이 가물거린다.

‘진화론’적 경제사를 위해

1990년대 극단 산울림의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 한겨레 자료

일찍이 베르너 좀바르트나 소스타인 베블런은 단계론적 경제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발생론적’ 혹은 ‘진화론적’ 경제사를 시도한 바 있다. 첫째, 현존하는 사회경제적 관계가 과거로부터 어떤 인과관계의 연속선에서 어떤 양태로 결정됐는지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 여기에서 경제사는 경제 이론 및 분석과 다시 하나로 통일된다. 눈앞의 현실을 파악한다는 건 곧 ‘그것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파악하는 일이다.
둘째, 경제사의 진행 과정에 대해 아무런 목적론적인 높은 단계 따위를 설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어떤 사건과 과정이 어떤 사건과 과정을 배태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철저한 인과관계 파악만을 목표로 할 뿐이다. 따라서 미래가 현재 및 과거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인과관계가 누적돼 먼저 파악된 현재의 기초에서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이때 미래는 한없는 선택과 우연성의 장으로 열려 있게 된다.
맥없이 한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나이는 사실 기억상실증 환자들이다. 이들이 감옥 같은 상태를 벗어나는 길은 먼저 기억을 회복하는 것뿐이다. 어째서 언제부터 무엇을 위해, 그리고 정확히 무엇을 기다리는지를 똑똑히 자세히 복기(復棋)해봐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고도’라는 ‘미래’가, 빼앗아가버린 ‘현재’가 눈에 들어오고, 자신이 지금 서 있는 곳은 시골길 언덕배기의 한 그루 나무 아래라는 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는 단계론적인 경제사와 그 경제 담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국 경제와 사회가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시 기억을 복기하기 위한 새로운 경제사가 필요하다. 전셋값 대란을 보면서, 그리고 전세제도에 얽힌 한국 서민들의 현실은 돌아보지 않고 그 소멸을 선진국형 제도로의 발전이라고 툭 던지는 평자들을 보면서 이를 더욱 절실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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